배설





물이 가득 찬 양동이가 있다
물이 양동이를 가득 채우게 되면 물은 흘러 넘친다
넘친 것은 안에서 밖으로의 외연이다
그러므로 현상학적 사례들은 안의 것이 밖으로 들어난 것이기에
본질상 안과 밖은 같다
형질로서의 차이를 보이는 까닭은
안과 밖의 환경이 다르기에 다른 에너지 형태를 띄는 것일 뿐이다





나는 군부독재의 부스러기를 밟은 세대였다
부스러기라고 말하기에도 멋쩍은 것이
탱크소리가 집 앞을 지나가는 소리도 듣지 못했고
거리에 총성이 울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다행히도 독재의 끝자락이라
내가 들은 것은 선생의 손바닥과 학생의 빰이 부딪히는 소리 뿐이었다





자살은 저질렀다는 동사와 매끄럽지가 않다
살인을 저지르지 자살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저지르다는 것은 관계 속에서 생겨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상 자살과 타살은 본질 상 동일하다 왜냐하면 내연의 확장이 외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살은 자기 자신을 대신해서 죽이는 것이다





생에 대한 맹목적인 의지란 말처럼 존재란 그저 존재일 뿐인 것인가?
만약 밖으로 발산된 의지를 형질이라고 한다면 유기적 시스템은 필히 닫힌 세계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른 것으로 변환되고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엔트로피의 증가 역시 닫힌 세계를 향해가는가?





자가면역이 보수적인가?
보수와 진보란 같은 것을 달리 보는 것이다 되려 이 다름의 기원이 자가면역일 것이다





실증이 상징을 대체할 수 있을까? 무지한 미신의 자리를 계몽이 몰아내었다면 상징이란 무지함인가? 누군가의 머리카락에 담긴 영혼을 대신해 분자구조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면 이것은 깨어있는 것인가? 이것을 진리라고 한다면 이 진리는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가? 화형식을 위한 횃불 대신 우리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논리적 실증 또한 닫힌 세계 속 국소적 현상이지 않을까?
불확정성 속에서 표류하는 우리처럼 불안이 낳은 또 다른 아이의 이름이 과학 아닌가?






쉬는 시간에 교실 뒤편의 벽보를 주먹으로 때려부수던 아이가 있었다그리고는 선생에게 불려가 야단을 맞았다
그 아이의 폭력성은 나이에 걸맞지 않았고 눈빛은 불안하고 슬펐다
나는 우연찮게도 그 아이의 생일에 간접적으로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생일상을 차리는 그 아이의 엄마는 냉담해 보였고 식사를 마친 우리는
다 같이 집 앞 놀이터로 갔다 나는 놀이터에 있는 철봉에다 주먹질과 발길질을 연신 해대는 그 아이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