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

2) Socrates is wise.


만약 첫 번째 진술이 참이라면, 두 번째 진술인 'Socrates is wise ' 역시 참인가?

직관적으로 보기에 그렇다. 이것을 부정한다는 것은, 외국어 번역이 가능하다는

경험적 사실과 상충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둘 사이에 무엇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감각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감각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자의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만들어진 언어로 구성된 문장들이기 때문이다.


문장은 무엇인가? 문장은 기호적 측면과 의미적 측면, 문법적 측면을 가지는 언어적 복합체이다.

그것은 물리적 속성, 추상적 속성 모두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기호도 다르고, 문법도 다른 두 문장 사이의 진리값을 연결지어 주는 것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추상적인 것이기에 기호도 아니고, 자의적인 것이 아니기에 문법도 아니다.

소거에 의해, 그것은 의미적 측면에 있어야 한다.


서로 다른 두 문장의 진리치가 연결되어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물음에 대한 답이 나왔다.

그것은 의미가 같기 때문이다. 문법 체계도, 기호 체계도 다른 두 문장이지만, 그것들은 의미에서 같다.

그렇기에 번역의 가능성, 의사소통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렇다면, 의미는 어떻게 인식되는가? 그것에 대해 어떻게 탐구할 수 있는가?

문장의 의미란, 특정한 방식으로 조합된 어휘들을 시각과 청각, 때로는 촉각(점자)을 통해 감각하거나

혹은 감각했던 기억을 상기할 때, 비로소 인식된다. 우리는 의미 자체를 만질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


우리는 단지 문법 규칙과 자의적인 기호들의 형식을 지닌 말과 글을 눈과 귀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받아들인

문장들은 우리의 사고를 일정한 방식으로 촉진한다. 그리고 그런 사고의 형식속에서 우리는 의미에 대해 파악한다.

다시 말해 문장의 구조, 형식, 내용에 따라 개별 문장들을 감각 할 때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관념들의 숫자와 유형과 관념들을 떠올리는 방식과 패턴이 달라진다.


가령, 아래와 같은 여러 문장들의 형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X는 Y 에게 Z 한다.

X는 Y 이다.

X와 Y 사이에 Z가 있다.


개별적인 변항들에 수 많은 어휘들이 올 수 있다. 저런 형식을 지닌 문장을 감각할 때 우리가

머릿속에 떠올리는 이미지나 관념들도 저러한 형식을 가지게 된다. 예컨데 소크라테스는 현명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대상과 그것에 귀속된 무언가라는 형식으로 문장이 표현하는 사태를 마음에 그릴 수 있다.

즉 문장의 논리적-문법적 형식은 우리의 사고의 형식을 결정한다.


의미는 항상 그 자체로 우리의 마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에서 여러 재료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

그것은 재료들이 놓여진 방식에 의해, 형식으로써 파악되는 것이어야 한다.


사고의 내용물, 가령 개별적인 사물들의 이미지 ( 사람, 나무, 자동차 등등) 혹은 개념을 형상화한 이미지

( 삼각형등의 기하학적 대상을 그리는 것, 실체와 속성 관계를 도식화 하는 것 ) 자체가

의미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심적 이미지들을 떠오르게 만들고,

그것들을 특정한 방식으로 배치하는 무언가가 바로 의미여야 한다.


요약하여 의미는 우리가 문장을 감각하여, 우리 마음에서 사고가 진행 될 때,

사고의 대상들이 놓여지는 순서, 그것들 사이의 논리적, 공간적 관계 따위의 형식적 측면

규정하는 무언가이고, 의미는 항상 우리의 마음에 있는 관념들과 그것들이 놓여지는 특정한 패턴에

의해 간접적으로만 파악됨을 알 수 있다.


마치 경험들을 분석해 인식의 선험적 조건을 분석해낸 칸트처럼, 명제의 가능 조건이 되는 논리적 형식을 추리해낸

비트겐슈타인처럼. 의미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사고들의 절차, 형식, 구조를 분석해

그것들을 가능하도록 만든 의미가 무엇인지 추리해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란 문장을 인식했을 때 우리 마음속에 떠오르는 관념들이라던

로크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의미가 관념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새로운 관념을 학습하는가?

어떻게 새로운 관념들 사이의 관계를 학습하는가?


우리는 책을 읽으며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문장들을 읽는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한번도 마주하지 못한 관념 사이의 연결이 가능해지고

새로운 관념을 얻게 된다.


예컨데 코로나 바이러스와 불임 사이의 관계에 대해 전혀 모르던 사람이 그것과 관련된 글을 읽고

둘 사이의 관계를 새로 알게 되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글을 읽은 이후에는

코로나와 불임 사이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게 된다. 만약 의미가 문장을 인식했을 때 촉발되는 관념이라면,

기존에 존재하지 않았던 관념들 사이의 연결이 무엇에 의해 촉발되었는가에 대해 해명해야 한다.


무엇이 새로운 연결을 촉발시켰는가? 문장의 기호인가? 문장의 소리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들 자체로는 그냥 흔해 빠진 시각 정보이고 청각 정보이다. 짐승의 울음과 사람의 말을 구별 짓는 것이

있어야 한다. 곰이 동굴에 새긴 발자국과 원시인들이 남긴 문자를 구별 짓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의미의 기능일 것이다.


이렇듯 의미와 학습을 연결 짓는다면 우리는 의미라는 것이 '우리의 관념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무언가' 라는 내지는 '새로운 관념을 새기는 무언가' 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나는 그래서 적어도 의미란 의식 독립적인 영역에 있는 무언가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 사고 과정을 규정하는 일종의 도식이나 알고리즘일 것이다.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고, 각각의 의미들은 서로 독립되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할 것이다.


의미와 진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의미를 모르는 외국어 문장의 진위 여부를 가를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무의미하게 나열된 알 수 없는 기호들의 배치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기호이지 그것의 상징이나 의미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한 인식은 의미에 대한 인식에 의존한다. 의미에 대한 인식이 있어야

진리에 대한 인식이 있다. 인과적으로도 그렇고, 논리적 관계로도 그렇다.


어떤 의미 공간에서 살 것인가?


어떤 의미들이 나의 사고 과정과 형식을 결정하도록 만들까?

그것은 나를 파괴하는가? 사고를 명료히 만드는가?


철학의 의미 공간은 살만한 곳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다. 그것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의미의 공간이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