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와 계산에 가려진 형이상학적 가치의 실존이 제대로 포착되는 순간은 다음과 같다.
겸손할 필요가 없는데 겸손하고,
진실될 이유가 없는데 진실하고,
친절할 이유가 없는데 친절하고,
참을 이유가 없는데 참고,
견딜 이유가 없는데 견디고,
소망을 품을 수 없는데 소망을 품고,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화를 내지 않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가운데서 믿으며,
희생할 이유가 없는데 희생을 하는 것.
이러한 순간들 속에서 우리는 각 가치의 본질과 순수함을 온전히 포착할 수 있다.
이는 세상의 논리와 계산을 초월하여, 존재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가치들이다.
나는 이것이 인간 내면에 잠재한 본질적인 선함이자,
때로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한 보편적 가치를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행위가 그 자체로 그 가치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그 이면에는 종종 행위의 순수성을 왜곡하거나 흐리게 하는 동기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참고,
나의 이미지 때문에 겸손한 척하고,
사회적 규범이나 기대 때문에 사랑하는 척하고,
돈 때문에 견디며,
방법이 없어서 참고,
공격받기 싫어서 친절하며,
벌받을까 두려워서 진실을 이야기하고,
또 같은 두려움 때문에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려 하고,
두려움 속에서 헌신하는 것.
이러한 모습들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 그 자체로 가치의 실현이 아님을 보여준다.
때로는 사람들이 이러한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믿거나,
자신의 선함을 과대평가하는 착각 속에 빠진다.
그러나 이러한 동기와 계산에 갇혀 있다면, 진정한 형이상학적 가치의 실존을 경험할 수 없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진정한 가치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채,
단지 사회적 분위기와 당위의 틀 안에서 행동을 가장하며 살아갈 뿐이다.
이것은 우리를 가두는 허상이다.
그러나,
필요가 없는데도 선택하고,
이유 없이도 행동하며,
자신의 이익과 계산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순수한 가치들의 본질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겸손과 진실, 친절과 희생, 소망과 사랑이
어떤 조건도, 어떤 계산도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 가치들은 우리가 초월하고자 할 때, 우리를 통해 드러난다.
이게 가능한가?
나는 불가능 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살다가도
종종 그런 것을 삶에서 살아내는 사람을 마주한다.
그 때 분명히 나는 그 가치들의 실존을 생생하게 느낀다.
혼자 있으면 되잖아?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고 생각해요. 독립된 개체로써 스스로 존재하는 인간도 당연히 없을테구요. 단지 태어날 때부터 던져진 삶의 맥락 속에서 그런 전제들을 망각하거나 당연시 여기는 경우는 있겠지만요.
개체로써 -> 개체로서
@卵出伊刀出伊(220.78) 개좆같이 멍청한 시비나 던지고, 반박은 못하니까 문법나찌 짓이나 하고 있는게 역겨워서 구토가 나와요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하고 저도 그에 깊이 공감합니다. 또 거기에 더해 제 기억을 되돌아보면.... 하나같이 그 실존들의 순수함을 마주했을 때는 깊은 감동과 기쁨? 어떤 위대함 같은 것들이 느껴지더라구요. 그 당위라는 것이 나를 옭매는 법과 껍데기로 여겨지는 이유는... 그 순수함이 주는 기쁨이 삶에서 너무 적은 부분을 차지해서 같아요. 인간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걸 지향하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실존들 자체가 가져다 주는 기쁨과 즐거움을 경험하지 못한 채, 언어로써, 규범과 법으로써 그런 가치들을 접했다면... 그저 그냥 어떤 당위로써, 심지어는 실존하는지 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인생의 비밀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게요... ㅎㅎ
그런 사람들의 삶의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의 격려? 신에 대한 사랑?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있죠. 윤리적 가치들을 추구하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워보이고 힘들어보이는데, 그런 삶이 지속되는 경우가 있다면 그건 분명 어떤 즐거움도 동반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윤리적이고 선한 판단 자체에서 느껴지는 쾌가 있다면 어쩌면 버틸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 말입니다.
저도 말씀과 같은 생각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제가 본문에 쓴 대로 '우리 내면에 있는 선함' 이라는 것은 사실 틀린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위와 같은 삶이 불가능하다는 걸 느끼는 건, 제 안에 그런 가치들이 없다는 방증일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내 안에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 가치와 성품들인데, 삶에서 그런 가치들의 실존을 포착했을 때 정말 큰 위대함과 감동, 숭고함을 느끼고 심지어 눈물까지 날 때도 있는 이유는... 말씀 하신 것처럼 인간이란 존재 '밖'에 뚜렷하게 실존하는 인간의 '지향점'... 어쩌면 신의 '자취'를 느낄 때가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래서 사실 이 모든 것의 이유는, 존재의 차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미 생겨버린 뇌주름과 그 뇌주름의 공격성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것이라, 자신...나라는 주장에 프로젝트 2501은..
이유없는, 조건없는 실천의 근거들은 무의식에 있다이기.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것이 친숙한 것으로 떨어질 때 마치 어떤 행위나 실천이 그자체로서 드러난거같은, 갑툭튀한거같은 느낌이 드는데 이건 글쓴이 게이의 말처럼 "겸손과 진실, 친절과 희생, 소망과 사랑이 어떤 조건도, 어떤 계산도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라는 착각을 불러일으
킨다이기.
의식은 무의식(불가능)을 결코 알 수 없기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세계는 반드시 가능한 세계여야만하며 가능한 경험만이 주어질 수 있는데 글쓴이 게이의 말처럼 우리는 종종 그런것(불가능)을 삶에서 살아내는 사람을 마주하게되고 강렬한 현기증을 느끼게되는데 이것이 '불가능(자유)의 가능성' 곧 '실존'이라 부르는 사건이다이깅
겸손이나 진실이나 친절 소망 사랑 같은 가치들을 무의식이라는 이성적이고 인과적인 차원에서 이해할수있다면 저런것들은 결코 형이상학적일수 없지 않나. 형이하학적으로 이해되는것아닌가?
원형은 원래 형이하적 매개물의 행간에서 읽히지 않을까요? 그것이 시계열에 따른 외적 배열이든, 자체의 속성이라는 외적 표상으로 나타난 것이든.
오.. 재밌는 글이네 개인적으로는 자기자신에 대한 깊은 수준의 책망과 용서, 사랑이 생기면 남에게도 똑같이 해주고 싶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것 같음. 주변 상황이란걸 굳이 생각하지 않고 내가 지금 하고싶은 대로 행하고 나중에 보니 결과적으로 그런걸 추구하는 행동이었더라..라는 느낌.
형이상적이라는 것은 우리 실존보다 본질적인건데 이런 가치들은 결국 수준이 완벽하지 못한 인간의 정신,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임. 누구나 정신적 가치나 물질적 가치를 위해 이타적인 행동을 하기때문에 이기심이 진짜 본질이라고 볼 수 있음. 따라서 자신의 이익과 계산을 중시할 수록 더더욱 이타적임. 너가 말하는 악의적 사회적 상호작용을 제외하고도, 선의적 사회 상호작용도 우리의 본질을 막고있음 너 말대로 이런 것들을 초월해야하는것은 맞지만 스스로를 선하다 믿고, 선의를 과대평가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않는다.
전두엽 기능의 역량에 따라 또는 사용자에 따른 각기 다른 이유로 인하여 행동하는 결과값이 다릅니다인간도 학습하는 생물이라 타인과 지내온 환경에따라 천차만별이니위선적 행위 또는 도덕적 행위를 하는 가장 근거있는 이유는 "자기만족"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속이면서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을 숨기고 지키고 안 들키려고 하는 방어 본능일수도 있고요 이유가 너무 많네요
자기 자신에게 득이라고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니 결국에는 당장(현재)이나 미래에 손해를 안 보려는 계산적 행동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함 또한 어린시절 어른들의 학습에서 학습된거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너무 어렵게하네
형이상학 가치들은 실존을 안함. 아무 효용도 가치도 없는 의미없는 행동을 형이상학적 본질이라고 주장하는건 그 자체로 모순임. 그냥 상식 밖의 행위를 하는 고장난 상태인듯. 모든 도덕적 행위는 다 효용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 효용가치가 없다면 본질을 벗어난 고장난 행위나 관념일 것임.
니체의 아모르파티가 본질적이지 그냥 즐기면된다. 그외에 뭐가 필요하지? 즉 , 즐길수없는것은 철학이 아니지 물질주의같은것이 그것은 단지 생존투쟁일뿐 생존에 있어 철학은 불가능하다 단지 옆사람의 것을 뺏고 싸우고 살아남기 급급할뿐 인간은 현대에 정말로 생존을 위협받는가? 라고 생각부터 해봐야한다 사람들은 천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않고 천재인척 마케팅하는 사업가들의 이야기만 듣기 급급하지 자신이 그 사업가가 될줄알면서 평생 투쟁하고 살아가기마련 철학은 없다 당장 10년내에 agi 가 나온다는데 별 관심없다. 만들어진 얼굴마담인 ceo가 무슨말을 했는지는 대부분 알고있으면서
형이상학적 가치를 '불가능을 뛰어넘는 숭고함'으로 포장하며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려 하네
나도 이 글이랑 비슷한 느낌받음. - dc App
근거는 주장의 참 거짓을 검증할 수단으로서, 주장 자체가 존재인 경우는 해당 존재의 인식여부가 그 근거가 되겠죠. 즉, 인식 주체가 인식하지 못하면 근거가 없고, 인식하면 그 실재 자체로 존재의 근거가 되겠죠. 그런데 형이상학적 관념들은 비가시적이기 때문에 외계(外界)에서 인간이 보고 듣고 맡고 할 수있는 유형물은 아닙니다.
즉 인식 주체가 외형의 장막 너머 원형을 포착하지 않으면, 그 존재는 증명되지 않겠죠. 인식 주체의 관점에서 볼 때, 대상의 존재 유무의 근거는 인식 주체의 인식 여부에 따라 결정되니까요.
불가능을 뛰어넘는 숭고함이라는 텍스트는 용서.환대.애도에 관한 데리다의 쥬장을 떠오르게 하는군
갠적으로 형이상학은 너무 뜬구름 잡는소리 같아서 싫어함
그게 제일 꿀잼인데 그거 없으면 철학 왜 함??????? ㄹㅇ루
니체가 말했듯 오답속에서 왜 진리를 찾으려하지않는지 궁금하네 관념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면서 그 안에서 순수함을 찾는다라. - dc App
칸트와 니체의 간극은 인간이 노력한다고 메워지는 종류의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화자가 실질을 언어에 담아 전달해도, 청자가 실질을 인식하지 못하면 그 언어는 껍데기이고, 그들이 그것의 존재를 허상이라 주장하기에 이르겠죠.
절대적 가치라는 카리스마는 존재 그 자체로부터 나오는 실질이며, 인간이 부여하는 인위적 가치나 인식에 따라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인간의 인식과 별개로 존재하는 실질의 절대성은 니체도 모르지 않습니다. 시대정신을 대상화하여 당위적 부분을 유리시키고 저항했을 뿐, 니체도 절대성을 갈망한 건 같으니까요.
어쩌면 니체가 본 것은 시대정신의 언어와 형식을 외양적으로 추구하는 듯 꾸미나, 그 누구도 그 실질을 담아내지 못하는 세상이었고, 그 경험이 실질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ㅇㅇ 역시 으렵네요 생각해봐야할듯 - dc App
명상해라 청화스님 법문 유튜브에 검색해서 듣고 ㅇㅇ 법문갤 찾아가라이
선함의 근본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공감능력이다 공감능력이 선함의 거의 전부다 선과악은 관점에따라 유동적으로 변하며 허상이고 절대적이지않다(허무주의적 관점아님) 이때문에 애초에 순수한 형이상학적 가치라는 말자체가 모순된다
초등학생이 쓸법한 글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