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인생을 낭비 중인 시간 많은 철갤러sg와 함께 하는 취중의 순수이성비판: 그 첫 번째.
우선 위의 짤을 유심히 봐주세요.
사흘 전 대구에도 눈이 와서 찍어본 사진입니다. 사진을 찍는 내가 서 있는 술집 앞마당으로부터 시선이 뻗은 앞쪽으로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인도(사람길)의 모습과 그 하양을 경계로 가로수 아래의 인도 블록길이 선명히 대비되죠? 잎이 넓은 활엽 가로수 아래라서 거긴 하얀 눈이 쌓인 대신 갈색의 낙엽만 바람에 쓸려 있군요. 그리고 낙엽 뭉치 저편으로 검은 차도(찻길)가 보이나요? 경계가 명확하지요.
하지만 sg님은 속으셨습니다. 위의 짤은 사흘 전 새벽 여기서 님과 대화를 나눌 때 올린 짤입니다. 그 때 찍은 사진이죠. 아직 그 글이 남아있으니까 확인해 보시죠. 예, 사흘 전 새벽 대구는 까만 공창으로 간간이 싸라기눈이 흩날렸으나 저렇게 쌓일 정도로 눈이 내린 적 없습니다. 눈이 쌓인 하얀 저 인도는 사실 이어지는(연장된) 술집 앞마당입니다. 제가 서 있는 장소와 바닥의 재질(콘크리트)과 색상(회색) 모두가 동일합니다. 못 믿겠다구요?(언제 시간내서 대구에 놀러 한번 오세요. 저 술집이 나만 아는 제법 맛집인데 한잔하면서 확인해 봅시다.)
그런데 언젠가 sg님과 함께 목도할 저 장소는 우리에게 사흘 전의 저 짤과 꼭같은 형상과 질감을 보여주고 느끼도록 할까요? 더군다나 저 장소에 처음 가보는 sg님은 저 장소에 익숙한 나와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짤을 다시 한 번 보시죠. 지금도 술집 마당과 인도와 차도의 경계가 명확해 보입니까? 세 공간을 나누는 빛의 경계선은 여전히 명확하지만 조금 전보단 구분이 모호하죠? 억지로 유도하는 말이 아니니까 천천히 살펴보세요. 경계란 건 그러니까 그 자체로는 좌표가 없지만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나누어지는 데서 생겨난 급조된 공간, 즉 관찰자의 마주함으로부터 나타는 인위적 장소이지요. 숫자 0의 상태. y축도 x축도 아닌 둘의 접합점에서 생겨나는 0,0의 상태. 숫자 0은 자연수인가요? 셈할 수도 가리킬 수도 없는 그것을 우리는 함부로 자연수라 말할 수 없죠. 하지만 존재하니까 정수는 맞죠. 빼기(음-)도 더하기(+)도 아니지만 둘의 사이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유일한 다리로서의 장소 혹은 대상.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사물이 아닙니다. 사물은 적어도 직관할 수 있고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상태의 것입니다. 칸트는 사물이란 말 자체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자체ding an sich(누메논)이거나 대상만 있을 뿐이죠.
우선 위의 짤을 유심히 봐주세요.
사흘 전 대구에도 눈이 와서 찍어본 사진입니다. 사진을 찍는 내가 서 있는 술집 앞마당으로부터 시선이 뻗은 앞쪽으로 하얗게 눈이 내려앉은 인도(사람길)의 모습과 그 하양을 경계로 가로수 아래의 인도 블록길이 선명히 대비되죠? 잎이 넓은 활엽 가로수 아래라서 거긴 하얀 눈이 쌓인 대신 갈색의 낙엽만 바람에 쓸려 있군요. 그리고 낙엽 뭉치 저편으로 검은 차도(찻길)가 보이나요? 경계가 명확하지요.
하지만 sg님은 속으셨습니다. 위의 짤은 사흘 전 새벽 여기서 님과 대화를 나눌 때 올린 짤입니다. 그 때 찍은 사진이죠. 아직 그 글이 남아있으니까 확인해 보시죠. 예, 사흘 전 새벽 대구는 까만 공창으로 간간이 싸라기눈이 흩날렸으나 저렇게 쌓일 정도로 눈이 내린 적 없습니다. 눈이 쌓인 하얀 저 인도는 사실 이어지는(연장된) 술집 앞마당입니다. 제가 서 있는 장소와 바닥의 재질(콘크리트)과 색상(회색) 모두가 동일합니다. 못 믿겠다구요?(언제 시간내서 대구에 놀러 한번 오세요. 저 술집이 나만 아는 제법 맛집인데 한잔하면서 확인해 봅시다.)
그런데 언젠가 sg님과 함께 목도할 저 장소는 우리에게 사흘 전의 저 짤과 꼭같은 형상과 질감을 보여주고 느끼도록 할까요? 더군다나 저 장소에 처음 가보는 sg님은 저 장소에 익숙한 나와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짤을 다시 한 번 보시죠. 지금도 술집 마당과 인도와 차도의 경계가 명확해 보입니까? 세 공간을 나누는 빛의 경계선은 여전히 명확하지만 조금 전보단 구분이 모호하죠? 억지로 유도하는 말이 아니니까 천천히 살펴보세요. 경계란 건 그러니까 그 자체로는 좌표가 없지만 이것과 저것을 나누는, 나누어지는 데서 생겨난 급조된 공간, 즉 관찰자의 마주함으로부터 나타는 인위적 장소이지요. 숫자 0의 상태. y축도 x축도 아닌 둘의 접합점에서 생겨나는 0,0의 상태. 숫자 0은 자연수인가요? 셈할 수도 가리킬 수도 없는 그것을 우리는 함부로 자연수라 말할 수 없죠. 하지만 존재하니까 정수는 맞죠. 빼기(음-)도 더하기(+)도 아니지만 둘의 사이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유일한 다리로서의 장소 혹은 대상.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사물이 아닙니다. 사물은 적어도 직관할 수 있고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상태의 것입니다. 칸트는 사물이란 말 자체를 함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물자체ding an sich(누메논)이거나 대상만 있을 뿐이죠.
디시는 밤 12시, 자정 때 글쓰기의 공백 시간이 존재해서 쓰는 와중에 급히 멈추었습니다.
한 대 피고 할까요? 실은 제가 지금 술 마시기와 글쓰기를 동시에 하고 있어서 잠시 한모금 마실게요. https://youtube.com/watch?v=UaVnMhqjHqw&si=LCpJdbYLMGknAoJl
해당 댓글은 삭제되었습니다.
제가 감사하죠. 님과의 약속이 없었다면 오늘도 맨날하던 헛소리(세상을 향한 불평불만과)를 하면서 자해하고 있을 테니. 님 덕분에, 그러니까 무언가를 예민하게 생각하면서 마시는 소주는 달군요. 때마침 잘 오셨습니다 내사랑!
어차피 우리 사이는 형식이 없는 관계이니까 이제 남은 글은 댓글로서 이어가죠 뭐. 계속하세요. 진지하게 보고 있습니다. 그런 후에 위 본문글과 이어지는 댓글을 써보겠습니다.
너무 거창합니다. 우선은 저 짤을 보면서 '경계'라는 낱말의 진의만에 집중해 봅시다.
저도 철저하게 버려졌다는 공황상태를 넘어서 온세계가 무너지는 듯한 경험을 했었지요. 님은 잘 모르겠지만, 여기 들리는 옛날 미스터리 갤러리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제가 조업 중에 바다에 빠져서 정말로 죽다가 살아난 일을 아는 분이 있을 거예요. 그 트라우마로 저는 지금도 바다 근처도 안 갑니다.
그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이제 제 말을 계속할까요?
경계란 건, 그러니까 어떤 빛(형상=색깔)을 보고 느끼는 차이점이 님 말씀대로 내 마음(그것이 내 뇌내의 감각질 때문이라고 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의 문제이며 그건 오히려 무의식적일 수도 있다거나 말거나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전에 관찰자로서 우리 인간의 선천적(선험적=보편적) 조건을 먼저 따져야 합니다.
자, 다시 저 짤로(대상으로) 돌아갑시다. 저 짤에서 제가 서 있는 곳은 우레탄 재질의 갈색 발판으로부터 조금 비켜선, 그러니까 저 옅은 갈색의 금간 바닥입니다. 그런데 저게 흰색이거나 회색으로 보이는 "눈쌓인 인도"와 같은 질료(콘크리트)와 빛깔(회색)로 이루어져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는요. 그렇다면 여기서 님이 다시 물어야 할 건 "무엇이 실제로라는
겁니까!" 이죠. 즉 저 대상(물자체)으로서 저 장소는 갑작스러운 재개발 공사나 지진 등의 급변사태가 없는 한 대충의 형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거란 것. 적어도 님과 내가 만나서 술을 마시는 날까지는(왜냐하면, 님과 나는 서로가 거부하지 않는 이상ㅡ내가 당장 서울 대구 간의 택시비를 부치면ㅡ오늘도 만날 수 있으니까: 여기서 한 개인의 독특한 인간심리에
관한 투정은 다음 기회에 얘기합시다). 문제는 심리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거죠. 심리보다 더 적극적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는 물리가 알쏭달쏭하다는 겁니다. 그것도 선험적으로서(보편적인 상태로서). 즉 님 말씀대로 짤의 저 술집 앞 사태는 하나의 대상(공간)으로서 '이러이러한 상태'다 라고 하기엔 너무나 모호해요. 실제로 과연 인도와 차도의 구분이 있냐는 거죠.
그러니까 사람이 걸어다니면 인도이고, 차가 주행 중인 곳은 차도인데 sg님과 제가 만나는 저곳에 차도 다니지 않고 사람도 다니지 않는다면? 아까 말했지요? 0,0은 y축도 아니고 x축도 아니라고. 그러면 뭔가요? 원점입니다. 예, 숫자로서 0은 항상 원점의 의미로서 출발합니다. 더하기나 빼기, 모든 경우에 똑같습니다. 원점 아니면 정확한 중간이지요. 즉
상관없습니다. 나는 지금 칸트를 말하고 있으니까 현대의 정신병증에 관해서는ㅡ잘 알지도 못하고ㅡ침묵할게요. 계속할게요.)
경계입니다. 누메논noumenon과 페노메논phenomenon의 경계. 대상(형상)과 현상. 현상이 우리의 감성(감각세계)에 촉발되는 것은 그 현상체와 내가 조우하였기 때문입니다. 곧 저 짤을 통해서 님이 제게 보여준 댓글은 현상의 단편(현상적 측면)이라는 거지요. 반대로 저 짤의 장소 그 자체(대상 자체)는 님의 말씀대로 영원한 회색지대일 뿐입니다. 직접
가 보아도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회색도시의 회색지대일 뿐. 색의 농도와 색깔(빛)의 명암은 심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물리에서도 각 관찰자 간의 미세한 차이, 나아가 허당이 존재한다는 거죠. 제가 알기로 심리학은 바로 이러한 물리학적, 칸트적 인식론의 폭발로서 생겨난 줄로 압니다. 님 때문에 자꾸 곁길로 빠지네요. 좋습니다. 저는 이런 우연의(경험론
적 촉발의) 사유를 좋아하고 즐깁니다. 후, 노래 한 곡 들읍시다.(한잔할게요.)
예, 얼마든지 가능하죠. 칸트가 그 세계를 가보았는지 아닌지를 저는 알 수 없지만, 칸트의 선험적 세계와 대상에 관한 이론은 정말로 무시무시한 겁니다. 제게 그 회색지대에 다녀온 거냐고 묻는다면 "예, 아니오"로 대답할게요. 얘기해봤자 님조차도 못 믿을 겁니다. 무엇보다 먼저 그런 나의 독특한 경험은 님의 이해와 '인정함'으로부터 정확한 사실성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아니아니, 나의 독특한 경험세계가 사실일 리 없죠.
예, 일단은 그러합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처음부터 플라톤의 이데아니 사랑이니 하는 것들, 교부들의 신과 영성, 심지어 현상 일체를 망상이나 곡해(오해)로 여깁니다. 흄david hume과 마찬가지로 전부 가짜 앎(지식)으로 여기고 출발하죠.
아뇨. 저는 어쩌면 정반대인데요? 다만 나의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순수이성비판이 필요해요. 왜냐하면 나는ㅡ한때 마주한ㅡ내 세계의 붕괴를 설명하기 위해서 의지한 수많은 것들 중에 오직 칸트에게서 위안을 찾아거든요.
님마저 뛰어내리면 앞으로 나는 누구와 함께 삶을 이야기할까요? 노래, 잘 듣겠습니다.
https://youtube.com/watch?v=5fAitXweo9A&si=Opl4kQ4iZ-mY_bKa
제가 이런 정도, 여기까지입니다. 하지만 님은 나의 느린 생각과 타자 실력에 비해 너무 성급해요. 덕분에 사티를 다시 만났어요. 오늘은 사티의 곡을 안주삼아 마시고, 자장가삼아 잠들 수 있겠네요. 예, 여기까지만 합시다.
아뇨. 저야말로 저의 느린 생각과 타자 실력을 망각한 채 나를 과신했습니다. 주무세요.
이 글은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는 방식, 즉 경계를 설정하고 의미화하는 방식이 우리의 인식 틀과 직관적 경험에 깊이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본질적으로 주관적이고 관계적이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시킵니다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