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부짖을 때만 정직하다. 이때의 정직함은 우물 안 개구리의 존재론적 사태다.
그런데 우물 밖을 왕래하는 청개구리는 우물 안 개구리에게 너의 울음은 "우물 안에서도 옳고 우물 바깥에서도 옳다" 고 한다. 우물 안 개구리는 저 다른 종족, 존재자의 속삭임에 귀기울여야 할까? 울어야 할 운명과 습관을 멈춘 채로 낯선 세계를 동경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까?
그런데 우물 밖을 왕래하는 청개구리는 우물 안 개구리에게 너의 울음은 "우물 안에서도 옳고 우물 바깥에서도 옳다" 고 한다. 우물 안 개구리는 저 다른 종족, 존재자의 속삭임에 귀기울여야 할까? 울어야 할 운명과 습관을 멈춘 채로 낯선 세계를 동경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까?
세상 우물은 사라져 가고 덩달아 우물 안 개구리도 씨말라 간다. 세상엔 청개구리만 넘쳐난다. 청개구리는 우물 안 개구리가 아니며 개구리도 아니다. 그는 아름답지만 우물과 논밭 어디에도 끼이지 못하는 존재다. 어느 틈에도 끼일 수 없는 존재자를 들뢰즈는 칭찬하지만, 어느 틈에도 끼일 수 없는 존재자는ㅡ들뢰즈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어ㅡ무존재이다. 비존재가 아닌
무존재nothing. 그런데 이 무존재는 존재자의 이름으로 쓰일 수 없다. 그건 항상 존재 바깥의 사태이다. 들뢰즈가 의지하는 베르그손의 생성(생명)이론은 존재자onto:io(u)nian들의 창발성에 관한 것일 뿐, 존재 자체에 관해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https://youtube.com/watch?v=_yJFS3luQ-Q&si=UuF_PXqtJDpGCVNX
https://youtube.com/watch?v=7Br6-BrETzw&si=2XLAwY38YeyAPFb2
우리는 항상 그의 언어보다 그의 행동에서 부도덕을 발견한다: 우리의 언어는 확실이 오염되었다. 그러나그의 개과천선을 발견하는 것도 그의 언어로부터가 아닌가. 그의 도덕 역시도 그의 언어에서 출발한다면 이제 우리가 그를 판단할 근거는 무엇인가.
김재인 씨들 자칭ㅡ철학자는 항상 언어가 철학의 본질임을 말한다. 자신의 언어 속에 자신의 행위나 삶이 고이 간직되어 있음을 확신한다. 그렇다면 철학자 말 말고는 그 행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우리는 그의 언행일치적 삶과 철학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까?
=> 그렇다면 "철학자의v 말 말고는 그들(철학자) 행위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우리는 언행일치라는 그들(철학자)의 말을 증명할 수 있을까?
우물 안 개구리가 자신의 울음 속에서 정직함을 찾는다면, 그것은 자기 존재의 고유함을 충실히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청개구리의 말은 타자의 목소리로, 그 정직함에 균열을 일으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울음을 멈추고 낯선 세계를 동경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존재를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할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 글은 자기 정체성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어떤 균형을 찾아야 하는지 묻고 있는 것 같네요.
글쎄요. 님 말씀대로 청개구리는 우물 안 개구리에게 타자일 뿐이에요. 타자는 항상 영원히 타자라는ㅡ존재자의ㅡ자기 존재 외의 사태(내게 항상 이질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타자는 엄밀히 말해서 사물도 아님: 사물은 나의 감성계에 수용된 고정불변의 형상임)를 가리키는 겁니다. 즉 타자는 애시당초 나의 세계가 아니고 내 인식의 확장으로서 실체를 파악할 수 있고 말고
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타자라는 말을 느슨하게(성글게) 사용하는 사회과학(? 사회과학이란 말은 성립할 수 있는가!)의 경우에서도 타자의 의미를 점차 "나의 에고(정체성)를 포기함으로써 마주할 수 있는 '절대적 당신'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해서 타자를 마주할 수단은 맹목적인(오직 나의 희생으로서 마주하는) 사랑 뿐이죠.
"타자는 항상 영원히 타자라는 존재자의 자기 존재 외의 사태"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타자는 나에게 결코 온전히 동일화되지 않으며, 나의 세계와 분리된 이질적 존재로 남아있다는 것은 특히 레비나스(E. Levinas)의 철학에서 핵심적으로 다뤄진 주제입니다. 그러나 레비나스조차도 타자를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전제 속에서 타자와의 관계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
고 봅니다. 오히려 타자와의 관계는 나의 동일성을 넘어선 초월적 경험을 통해 성립한다고 보았죠.
따라서 "타자는 애초에 나의 세계가 아니며, 나의 인식으로 실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입장은 과도한 결론으로 보입니다. 타자는 나의 감성적·지성적 범주로 완전히 파악될 수 없지만, 이는 관계 맺음의 불가능성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레비나스는 타자와의 만남을 '얼굴'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며, 이 얼굴은 나에게 다가오는 타자의 윤리적 요구를 드러낸다고
봤습니다. 타자가 나의 감성계에 포착되지 않는다고 해서 완전히 닫힌 존재로 남는 것은 아닙니다.
더불어, "타자를 마주할 수단은 맹목적인 사랑"뿐이라는 주장 역시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사랑은 타자와의 관계를 여는 중요한 방식이지만, 그것이 유일한 수단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가다머(H.-G. Gadamer)의 해석학은 언어적 소통을 통해 타자와 이해와 관계를 맺는 방식을 탐구합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대화, 상호 이해, 혹은 감정적 공감
등 다양한 방식으로 타자와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사회과학에서 타자의 개념을 느슨하게 사용한다는 비판은 그 자체로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철학은 보편적 원리와 개념적 엄밀성을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둔다면, 사회과학은 타자와의 구체적 관계와 맥락적 실천을 다룹니다. 타자 개념의 다양성을 이해하려면 철학적 전통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적 탐구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사회과학이 제안하는 "나의
에고를 포기함으로써 절대적 당신을 마주한다"는 관점은 사르트르(J.-P. Sartre)나 레비나스의 철학적 논의와 상통하며, 철학적 논의와 단절된 접근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결론적으로, 타자를 인식할 수 없다는 주장은 철학적 논의에서 과도한 회의로 보이며, 사랑만을 타자와의 유일한 관계로 설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제한적인 관점입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나의 동일성을 넘어서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으며, 이와 같은 열린 논의는 철학적 대화의 본질적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 이 사람 참ㅠ) 제가 마지막으로 필사하다가 멈춘 책이 레비나스의 '시간과 타자'입니다. 하신 말씀, 많은 부분 동의합니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의지하는 타자라는 개념어는 애시당초 하이데거의 타자die anderen를 의지하는 것인데, 하이데거의 이 타자는 다시 칸트의 물자체(대상)를 거쳐 맹목적 형상으로 거슬러오르는 것이죠. 이미 님의 말씀에 그런 앎의
도정이 새겨져 있군요. 하지만ㅡ잘 아시디시피ㅡ레비나스의 타자에는 항상 칸트가ㅡ놓치거나ㅡ포기해 버린 '가능성'이란 말이 전제돼요. 무슨 말이냐면, 레비나스의 타자는 기왕의(칸트ᆢ하이데거 정도) 타자적(타자론이 아님: 칸트도 하이데거도 타자론을 구체적으로 전개한 적이 없음) 의미를 개선 확장(?)시키는 데서 멈추고 맙니다. 거듭, 그건 레비나스의 희랍철학(형이
상학)에 대한 오해로부터 촉발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긴 술집인데 오줌누고 올게요.
흥미롭고 깊이 있는 말씀 잘 읽었습니다. 레비나스의 타자 개념이 하이데거와 칸트의 전통 속에서 발전된 것으로 보면서도, 형이상학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부분이 있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특히 칸트의 물자체가 지닌 맹목성과 하이데거의 '타자(die anderen)' 개념이 레비나스의 철학에 어떤 방식으로 재구성되었는지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만, 저는 레비나스가 기왕의 형이상학을 단순히 확장하거나 개선하려 한 것이라기보다는, 그 형이상학의 틀을 넘어 타자와의 윤리적 관계를 강조하려 했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형이상학의 흔적이 완전히 탈피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비판의 여지가 남았다는 점은 인정해야겠지요.
선생님의 지적처럼, 레비나스의 타자가 결국 형이상학적 전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저는 그의 철학이 타자와의 관계를 새로운 가능성의 차원에서 열어보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고 싶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이 문제를 더 깊이 고민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긴장하면 소피가 마렵습니다. 좋아 아주 좋아!) 많은 철학자들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말하는 '가능성'의 중요성을 자주 간과해요. 예컨대 앞서 제가 어떤 술집 앞(지금도 그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음)의 풍경 사진을 짤로 옮기면서 사물의 경계 어떻고 했을 때 님은 나이 말을 적확하게 이해주시기를ㅡ칸트의 말을 곧이곧대로 빌려ㅡ이건 우리의 경험세계가 이미
아, 다들 왜 그리 성급해요! 정말로 오줌 누고, 담배 한 대 폈을 뿐입니다.
네 계속 말씀 적어주세요 선생님 새벽부터 억지로 움직인 몸뚱이가 술기운에 비명을 지르고 있습니다 좀전의 답글에 마지막 기력을 쏟아부었어요. 선생님의 글은 언제나 가슴을 뛰게 만듭니다.
아아, 최고!
마치 이런 겁니다. 유명한 정신과학의 오은영 씨가 말하는 핵심 전언은 한결같아요.(그래서 전문가인가?) "우리는 서로를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존재여요." 핮ㆍ만 그 아껴야 하고 사랑할 대상을 구체적으로 탐구하다 보면, 그 말씀에 회의를 느껴 세상 사람 모두를 혐오하는 지경에 이르죠. 레비나스의 나치(전체주의) 비판은 정확히 이 지점과 양극대의 자(잣대)질과
빗대어 출발합니다. "도대체 무엇이며 착gut한 것이며 도대체 무엇이 진리episteme라는 거냐?"
결국 우물밖을 왕래하는 개구리도 우물 안에 있는 것 과 다름은 없다. 그저 우물이 조금 더 넓었을 뿐 - dc App
예, 그런 셈이죠. 존재자(한 개인)의ㅡ자기ㅡ세계확장이란 말만큼 우스운 게 없어요. 무엇을 확장하고 무슨 확장된 세계를 산다는 건가요? 그건 고작 '이미-그러함으로써' 가능한 경험(계)의 확장일 뿐입니다. 한때 나의 여사친이 인스타그램을 통해서 그리스 일주 사진을 올리면서 별천지 사람처럼 행동하여도 그녀는 여전히 당신이 알던 여사친과 동일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