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번 글과 이번 글은 내가 적어내려가는 철학에세이의 여흥 같은 느낌이 좀 든다. 내가 알고 있는 중요한 것들은 이미 앞 글들에서 서술하였고 그 다음의 글들은 내가 가진 생각의 전체적 지형에서 바라볼 때 하나로써 모든 것을 꿰뚫는 그런 스케일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면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서술이 나온다. 희랍어 he tou agathou idea 를 좋음의 이데아로 옮길지 선善의 이데아로 옮길지 고대 희랍철학의 역자들이 고민하는 날들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선善자를 대대로 착할 선 자로 많이 새겼다. 요즘에 들어와서 선 자를 좋을 선이라고 새기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철학에세이의 앞선 글에서 동일성과 차이 유사함의 셋이 최상의 유類들 중에 속한다고 적었다. 여러 개념의 지형도를 그려볼 때 최상의 유들을 각각 하나의 산봉우리와 같이 여길 수 있다. '좋음'이라는 개념 또한 최상의 유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참된 것과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이 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참된 것은 좋은 것"이지만 "좋은 것이 참된 것"은 아니라고. 우리는 종종 '하얀 거짓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화재가 난 건물에 있는 중생들을 구하기 위해 부처님이 말씀하신 방편법문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지만 좋은 것이라고 하여 반드시 아름답지 않다."는 말도 타당해 보인다. 목사님의 설교 말씀은 분명히 좋은 것이지만 아름다움의 덕목까지 갖추고 있지는 않을 때도 있기 때문이다.


좋다는 술어는 영어로 good이라고 표현된다. good의 반대말은 두 가지가 있으니 그 하나가 bad이고 다른 하나가 evil이다. bad의 반대말로서의 good을 natural good이라 할 수 있고 evil의 반대말로서의 good을 moral good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대 희랍 세계의 출발은 natural good의 시대였다. 신체적 아름다움 부유함 일하지 않을 자유 힘과 권력 등이 좋은 것들로 인정받았고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귀족의 도덕이 그 세상을 지배했다. 희랍세계는 신화의 시대 서사시의 시대 서정시의 시대 극의 시대를 거쳐 철학의 시대에 접어든다. 희랍철학에서 움튼 윤리학에서는 arete의 개념이 기능적 탁월성에서 더 나아가 성격적 탁월성까지 포함하는 개념이 된다. 성격적 탁월성은 숙고를 하는 능력 같은 것이다. 이윽고 기독교 윤리가 서구 고대 세계를 모조리 삼키고 good은 evil에 대비되는 이웃에 대한 사랑과 같은 종류의 도덕적으로 선한가 그렇지 않은가의 구도를 정하는 개념이 된다.


우리말로 좋다는 말이 있고 좋아한다는 말이 있다. 이 두 개념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 여기에는 좋을 호好 자가 어떻게 활용되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좋을 호好 자는 계집녀 변에 아들 자 자가 서로 붙어 있다. 어학 선생님께서는 좋을 호 자가 어머니가 자식에게 젖을 먹이는 형상이라고 가르치신다. 흔하오很好 라는 중국어는 너무 좋다 라는 뜻으로 어떤 사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때 쓰인다. 가부可不의 판단이 그 말에는 들어 있다. 한편 보통의 우리들이 호색한好色漢이라 말하면 그 사람은 남녀간의 성관계를 무엇보다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된다. 영문의 경우 좋아하다는 like라고 표현한다. like는 한편으로는 ~같은 의 뜻으로도 쓰인다. like 라는 말은 서로 비슷한 대상 사이에 놓인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하여 같은 유에 속하는 것들끼리 서로 좋아하지 않던가. 그리하여 서로 code가 맞는 것 끼리 한 종種으로 분류되지 않던가? 성관계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좋을 호 자를 좋아함의 의미로 쓸 때가 잦고 머리를 많이 쓰는 사람의 경우에 좋음을 가부의 판단으로 사용하는 때가 많은 것 같다.


여하튼 간에 좋음의 이데아가 최상의 유에 속한다는 것은 그것이 술어로서 마지막에 위치한다는 말과도 같다. 그렇다면 이득利得과 좋음은 둘 중에 어느 것이 궁극의 술어에 속할까? 이득은 좋은 것이지만 좋은 것이 반드시 이득인 것은 아니다. 맹자가 『하필왈리? 역유인의이이의』라 했던 것이다. 인과 의는 덕德에 속한다. 덕의 세계는 가능성의 세계이다. 실현되지 아니한 가능성으로서 덕은 중간의 과정을 거쳐서 결국 이익利益으로 실현된다. 利는 함께 씨뿌리고 키워 익은 벼를 나누어 갖는다는 뜻이다. 맹자의 입장에서는 단순 이익을 위한 이익도 좋지만 인과 의는 그보다 더 좋은 것이라고나 할까.


누군가는 모든 것이 개인의 행복을 위해 존재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개인의 좋음을 말하는 것이 윤리학이고 윤리학의 궁극 목적이 행복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공동체의 좋음을 추구하는 것이 정치이고 그것을 탐구한 학문이 정치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좋으면 행복하고 행복한 것은 좋다. 좋음과 행복에 대한 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이 잘 탐구한 것 같다. 나는 여기서 그 이야기를 전개시킬 능력은 없다.


세상을 좋고 나쁨의 이분법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좋은 것이 아닌 것은 반드시 나쁜 것일까? 아니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이 있을까? 나는 내게 희랍철학을 가르쳐주신 스승님께서 '결혼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들었다. 만약 존재하는 것이 좋은 것이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 나쁜 것이라면 만약 좋음의 세계에는 빛이 비추고 있고 나쁨의 세계는 빛이 들지 않는 어둠의 세계인 것이라면 세계는 좋은 세계와 나쁨의 세계로 혹은 선과 악의 세계로 나뉘는 것이 아닐까?


클라인의 심리학을 소개한 홍준기 선생님의 책을 옮겨적는 것으로 이번 글을 마무리짓겠다.


《라캉, 클라인, 자아심리학》 중...

"클라인에 따르면 억압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불안, 달리 말하면 자아의 방어 매커니즘이 무용해질 정도로 (또는 자아가 성숙하지 못해 결코 방어할 수 없는) 강력한 불안은 무엇보다도 정신병(정신분열증, 망상증)을 발생시킨다. 바로 이것이 망상- 분열적 위치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인 것이다."

"클라인에 따르면 생후 초기에 아이들은 망상-분열적 위치와 우울적 위치를 거친다."

"생후 최초의 시기에 아이들은 엄마를 전체대상whole object이 아니라 부분대상으로 인지한다. 아이는 엄마 젖을 먹고 있을 때 엄마의 가슴을 완전한 대상으로 느끼고, 젖을 떼고 시간이 지나면 엄마 젖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느끼고 엄청난 불안(멸절, 죽음의 불안)에 빠진다. 이 시기의 어린아이는 엄마를 부분대상으로 지각하며, 엄마의 가슴을 (젖을 제공하는) 좋은 대상과 (젖을 주지 않는) 나쁜 대상으로 분열시킨다."

"망상-분열적 위치에 있는 아이는 엄마 젖을 먹고 있을 때는 그것을 좋은 대상으로 이상화하지만 엄마가 사라지면 곧 엄청난 불안에 빠진다. 아직 엄마가 곧 돌아와 자신에게 젖을 줄 거라는 인식과 확신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엄마의 부재가 길어지면 아이는 박해망상과 죽음의 공포, 그리고 불안에 시달리며 엄마의 가슴을 나쁜 가슴으로 느끼고 자각하게 된다."

"클라인에 따르면 '정상적 주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망상-분열적 위치에서 우울적 위치로 옮겨가야 하고, 이 우울적 위치를 성공적으로 통과해야 한다.

"우울적 위치란 엄마를 부분대상으로 지각하던 아이가 엄마를 전체 대상, 안전감을 제공하는 인격적 대상으로 지각하게 되는 시기이다. 클라인에 따르면 이는 생후 4~6개월에 시작된다. 반대로 망상-분열적 위치에서 아이는 엄마라는 대상을 자신을 사랑하는 하나의 전체적인 인격이 아니라 하나의 사물, 부분대상으로 지각한다. 그리하여 자신에게 젖을 먹이는 가슴은 좋은 대상, 그렇지 않은 가슴은 나쁜 대상으로 지각하고 치명적인 불안에 빠진다. 망상-분열적 위치에서 아이는 좋은 가슴과 나쁜 가슴이 사실은 같은 엄마에게 속하는 대상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반면 우울적 위치에서는 그러한 분열과 투사 매커니즘의 작동이 완화된다."


신생아의 구강기에서 좋음과 나쁨의 개념이 분화됨을 알 수 있다. 好 자가 어미가 자식에게 젖을 물리는 형상이라는 어학 선생님의 설명을 상기하여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