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각은  조선 불상 파괴는  유럽  종교개혁과 비슷한 것이었다 생각함

 

 

그리고 그 숭유억불이  조선 말기에

 

조선 불교가  일본 불교의 침투에 맞서는것을  힘들게 했다는 것도  인정함..

 

 

심지어 유생들은 공자상 파괴도 했음

 

 

이유는  선한것은 정신적으로  기념해야지  우상으로 만들면 안된다는 것이었음..

 

 

 

 

 

아래는 글임

 

 

저자는 송나라의 신유교 주자학으로 무장한 조선의 지배층이 마치 서구 종교개혁을 이끈 프로테스탄트처럼 유교화라는 강력한 종교개혁을 밀어붙였다고 말한다.



조선 후기 서양인들의 눈에 조선은 종교가 없는 나라처럼 보였다.


유교 사당에 그 흔한 성화나 성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려 중기 한 승려가 불상을 깡그리 부숴버린 일이 있었다. 헛된 귀신이 깃든다는 이유에서다.


비슷한 사례는 중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긴 하다.



조선이 건국되고 유자들은 기존 산신뿐만 아니라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빚은 성상을 위패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개성과 평양의 오랜 유교 사당에서도 결국 성당은 제거되고 위패로 변했다.





조선 말기에 이르면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1831-1904)이 "한국은 주변국과는 달리 불교의 역사나 교의에 대해서, 불교의식의 취지에 대해서는 무지한 채로 대부분 승려들이 그저 '몇 마디 음절들'[14]만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할 지경이었다. 구한말 가톨릭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에서도 '종교적 토론을 해보고자 승려들에게 접근해도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때문에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면 일본 불교계가 조선 불교계를 사실상 장악했다.


이 당시는 종교들조차 뿌리 깊게 왜곡된 자연 선택설이 침투하면서[15] 서양을 시작으로 각 국가의 종교가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너 죽고 나 살자 식의 소프트파워 경쟁을 하던 시기였는데, 오랜 억불로 승려의 질이 너무 낮아져 염불조차 제대로 못 외우게 된 한국 불교가 일본 불교를 이길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중국 산둥(山東)성 취푸(曲阜)의 공자(孔子) 묘에는 면류관을 쓰고 용포를 입은, 화려한 제왕의 모습을 한 공자의 신상이 있다. 일본 도쿄(東京) 유시마성당(湯島聖堂) 등 공자를 모신 사당도 신사처럼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그러나 한국 곳곳에 퍼져 있는 공자와 유학자들을 모시는 사당에는 그들의 이름을 새긴 위패만 놓여 있을 뿐이다. 500년 역사 유교의 나라 조선왕조를 거친 한국에서 공자와 유자들이 이렇게 ‘푸대접’받는 것은 어찌 된 일인가.

 

 

   비교종교학자 한승훈의 새 책 ‘무당과 유생의 대결’은 이 같은 물음에 대한 답이다. 저자는 송나라의 신유교로 무장한 조선의 지배층이 마치 서구 종교개혁을 이끈 프로테스탄트처럼 유교화라는 강력한 종교개혁을 밀어붙였다고 말한다. 이전의 유교가 국가 제도와 의례 체계에 머물렀다면 신유교는 불교와 도교의 영역이었던 우주론과 수양론까지 모두 대체하려는 시도로 나타났다. 조선의 설계자 격인 정도전의 ‘불씨잡변’이 신호탄이었다.

   문화 전반을 유교화하려는 조선의 종교개혁은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보다도 더 급진적인 양상을 띠는데,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아이코노클래즘(iconoclasm), 즉 ‘형상에 대한 파괴’다. 16세기 들어 유생들은 불상을 파괴하고, 신당을 불태우고, 신상을 부숴 내다 버렸다. 성상 파괴는 공자상 철거에까지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