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붕이들아 너넨 폭식의 대죄주교가 뭔지는 아냐? 

오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과 연계하여서

폭식의 대죄주교, 로이 알파르드를 분석해보려고 함.


폭식의 대죄 주교는 반복적으로 "좋다, 좋다, 좋다고, 좋을지도, 좋겠지, 좋다고 말해, 좋겠지 그럼, 좋으니까, 좋다고 가슴이 떨리니까아아! 폭음!! 폭식!!"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단순한 감정의 반복이 아니라 그가 생각하는 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음.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에서 말하는 선은 이성적인 추구를 통해 실현되는 것인데, 최고선 은 이성적 덕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인데, 주교의 "좋다"는 그의 선의 추구를 감각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과연 그럴까? 이를 한번 탐구해보자.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에서 선은 이성적 활동을 통해 추구되는 것인데, 선을 향한 이성적 추구가 바로 행복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말하는데, 폭식의 대죄 주교는 "좋다"를 반복하면서 자신이 추구하는 '좋음'이 곧 선이라고 믿고 있음. 그는 음식을 폭식하는 행위를 통해 행복을 찾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행동은 이성적이지 않으며감각적인 쾌락에 기반한 추구일 뿐임.

주교가 "좋다, 좋다"를 반복할 때, 이는 그가 자기 감각을 통해 행복을 추구한다고 느끼는 표현인데,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에서 말하는 선은 이성적 판단에 따른 덕을 실천하는 것이므로, 주교의 방식은 선의 추구로 보기엔 왜곡된 방식임. 그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선으로 오해하고 있는 거임 ㅇㅇ.


니코마코스는 “덕”을 “중용(메소테스)“으로 정의하는데, 즉 덕은 극단적인 행동을 피하고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임. 그러나 주교는 "좋다"를 반복하면서, 과도한 폭식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실현하려 하고 있는데, 이 행동은 중용의 원칙에 맞지 않으며, 오히려 과잉의 추구인 셈임. 주교는 쾌락을 추구하면서도 그것을 덕의 실천으로 착각하고 있는거고.

"좋다, 좋다"는 반복은 그가 중용을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과도한 폭식을 통해 '행복'을 찾으려고 하는 왜곡된 시도인데, 이와 같은 행동은 니코마코스의 덕의 개념을 잘못 이해한 결과임.


대죄주교가 "폭음! 폭식!"을 외칠 때, 그는 자신의 행복을 감각적 쾌락을 통해 실현하려 한다고 생각하는데,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에서 진정한 행복은 덕을 실천하고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것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데, 대죄주교는 자기 감각을 따르는 쾌락적 삶을 통해 행복을 찾고 있다고 믿는 것임. 그러나 이성적 판단과 덕을 실천하는 삶이 아닌 과도한 쾌락 추구는 결국 진정한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한데, 이게 바로 주교의 왜곡된 선 추구인건데.


대죄주교 로이 알파르드는 자기 만족을 추구하며,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착각하는데, 그러나 니코마코스의 행복은 이성적이고 덕 있는 삶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대죄주교 로이 알파르드의 '좋다'는 쾌락의 왜곡된 추구에 불과한 셈임.


아니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론에 따르면 최고선은 좋음 그자체인데 왜 이것이 왜곡되었냐는 의문이 들수도 있음. 폭식의 대죄 주교가 반복하는 "좋다"는 ”선“의 추구로 1차원적으로는 해석될 수 있지만, 그의 방식은 니코마코스의 윤리학에서 말하는 이성적 선 추구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거임. 그는 자기 감각과 쾌락을 선으로 착각하고 있으며, 진정한 덕의 실천과 행복 추구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거고, 결국 그의 "좋다"는 쾌락주의적인 왜곡된 선 추구이며, 이성적이고 균형 잡힌 행복을 추구하는 길과는 거리가 먼 여정인 셈임.


따라서, 폭식의 대죄 주교는 을 추구한다고 믿지만, 그가 추구하는 '좋다'는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자기 만족과 과잉의 길인거임. 이 점에서 대죄주교의 행동은 니코마코스가 제시한 진정한 선을 향한 여정과는 모순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셈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