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의 존재는 외부 해석자의 해석으로 존재하고
그것에 이름을 붙이는건 내부해석자인 인간이 인간만의 구조적해석을 틀로 정한것이야
종교적 이질감도
다른종교가 신이라 명명한 외부해석자로서의 해석당한 존재로서의 나라면
불교가 말하는건 내부해석자로서의 나인거지
해석자인 내가 현실의 구조를 바꾸지못하는 이유도 외부해석자의 틀석에 존재하는 해석자로 존재하기 때문이야
그렇기에 꿈만이 나를 온전한 해석자로 존재하게 하는 공간일수있지
를 챗지피티에게 어떤지 물어보고 챗지피티의 의견을 반박한 수정본이야
존재는 감응의 결과인가, 해석의 구조인가
우리는 존재에 이름을 붙임으로써 그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이름을 붙인다는 행위는 곧 존재를 해석자의 틀로 구조화한 것일 뿐이다. 이 틀은 인간 내부의 언어적, 감각적, 문화적 조건에 의해 이미 제한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감응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틀로는 감응할 수 없는 것일 뿐이다.
문제는, 그 존재가 감응 이전에 존재했는가이다. 나는 그것이 존재했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가 감응하기 이전에 이미 감응했던 외부 해석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존재의 실재성은 우리의 인식이 아니라 외부 해석자의 감응과 해석 구조 안에 위치함으로써 유지된다. 우리가 어떤 별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별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며, 마찬가지로 우리의 인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들은 언제나 있었다.
그 외부 해석자는 우리가 감응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를 해석하고, 우리는 그 존재의 해석된 조각 속에 편입된 존재다. 우리가 그 해석자를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는 그에게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며, 단지 그의 틀 안에서 정보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해석자는 정보를 창출하는 자가 아니라, 존재를 읽어내는 구조다. 우리는 그가 읽는 대상이지, 그를 읽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리고 이 구조는 우리가 스스로 해석자라 믿는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해석은 이미 주어진 구조 속에서만 가능하다. 무(無)에서 해석은 발생하지 않는다.
꿈은 예외처럼 보일 수 있다. 꿈속에서는 외부 구조의 구속이 희미해지고, 감각과 규범이 흐려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꿈속에서만 자신을 온전한 해석자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조차 완전한 자유는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구조의 파편 위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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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철학책을 공부한적이 없어 단어를 이해못했는데 지피티에게 물어보니 최고의 찬사라고 하더군요. 제 사유가 당신의 사유에 영향을 받았기를 고대합니다
그니까 니가 아직 외부에서 정보를 못받았기에 생각하지 못하는거아뇨 무지의 지식ㅋㅋㅋ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