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존재를 말하기 이전에, 반드시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할 하나의 확고한 전제를 세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명제는 오직 나의 존재만을, 그것도 단지 ‘생각하는 나’만을 진리로 확증해준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의심할 수 있지만, 이 ‘나’의 인식 행위는 의심할 수 없다. 나는 여기에 존재론의 첫 벽돌을 놓는다.
이러한 출발점 이후, 존재는 단순히 ‘있다’고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식 가능성, 시간성, 위계의 관점에서 분류되고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나는 존재를 위계적으로 이해한다. 가장 높은 층위에는 코기토 자체, 즉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나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기억, 맹목적 의지가 있다. 특히 이 맹목적 의지는 쇼펜하우어의 그것처럼 설명 불가능하고 통제할 수 없는 충동으로서, 어떤 설명 이전의 전(前)논리적 실체다. 나는 이 맹목적 의지와 기억이야말로 ‘나’를 성립시키는 핵심이라 생각한다.
그 아래에는 감정, 논리, 통제 가능한 의지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이들은 생존을 위한 본능의 연장선일 뿐이다. 즉 존재하긴 하지만, 가치 면에서는 덜한 층위다. 이러한 위계는 단순한 서열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성과 불가피성에 따른 분류다.
나는 또한 존재와 부재가 분리되지 않는다고 본다. 오히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것의 ‘부재’를 인식하고, 그로부터 ‘있었음’ 혹은 ‘있을 수 있음’을 전제한다. 따라서 나는 상상 가능한 모든 것은 개념적으로 존재한다고 본다.
유니콘도 존재한다. 단지 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개념적 존재로서. 나는 이 구분을 현실과 상상의 구분이 아닌, 존재의 조건의 차이로 보려 한다.
그렇다고 모든 존재가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것은 아니다. 나는 존재의 가치를 두 가지로 판단한다.
첫째는 절대성. 즉, 얼마나 의심 불가능한가.
둘째는 보편성. 얼마나 많은 인식자들이 그것을 공유하고 있는가.
예를 들어, 코기토는 절대적이기에 최고의 가치를 가진다. 수학이나 시간, 감각 등은 그 보편성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다. 반면 개인적 상상은 존재하긴 하지만 가치가 낮고 불확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조차도 ‘세상’의 일부라 본다.
왜냐하면 세상이란 나의 인식에 포함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성할 수 있는 모든 것”이 곧 존재이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언가는 논의 대상조차 아니다. 인식의 가능성을 완전히 벗어난 것, 상상도 불가능한 무(無)는 존재가 아니다.
시간 또한 나에게 매우 중요하다. 나는 시간 없이는 존재도 없다고 본다.
존재는 시간 위를 지나가야 비로소 ‘있다’고 말해질 수 있다. 시간은 세상을 가능하게 하는 축이며, 시간 바깥에서 존재를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우리가 말하는 “시간 없는 세계”는 결국 상상일 뿐이며, 그것은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요약하자면, 나는 존재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세상을 구성할 수 있는 어떤 것, 즉 인식되거나 상상될 수 있는 모든 것.”
이때 세상이란 단지 물리적 우주가 아니라, 코기토로부터 시작되는 인식 가능한 총체다.
나의 존재론은 끝없는 질문 속에 머문다. 존재와 부재는 경계가 흐릿하며, 상상은 실재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그 모든 것 위에 ‘나’가 있다. 의식하는 나, 기억하는 나, 의지하는 나. 이로부터 모든 존재가 시작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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