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세기 철학을 위한 글
이상운 저
철학은 사고의 위계를 거부하는 듯하지만, 내면의 진리를 세우는 힘을 지닌다. 그것은 현실을 자각하고, 무모한 권위에 의존하지 않으며, 타 학문과 연결되어 세계와 생각을 나누는 방식이다.
철학은 두려움 속에서도 저항하게 만드는 교훈이며, 역사 속에서 실천된 가르침이다.
남을 지적하면서 자신은 상관없는 척하고, 타인에게 현실을 강요하려 드는 사람은 한계를 말할 자격이 없다. 그들은 옳다고 생각하지만, 철학은 세속의 가치나 지식의 양을 우선하지 않는다. 철학은 누구나 말할 수 있도록 하며, 그 사람의 지식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성으로부터 시작된다.
철학은 자신이 믿는 세계를 강화하기 위해 타 사상을 배제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을 가려내며, 인간의 존엄에 질서를 부여하고, 학문 영역 안에서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다.
따라서 철학은 권위를 말하면서도 열려 있으며, 회피하지 않고 직면하며, 근거 없는 모욕과 무책임한 단정을 경고한다.
제1장. 철학은 사고의 위계를 거부한다
현실을 자각한다고 해서 세속의 가치를 우선하지 않는다는 것은, 철학이 초월적 자아나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절대 개념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
철학은 권위의 정당성을 빌려 진리를 구성하지 않으며, 자신보다 아래라 여긴 이들의 성취를 부정하려 하면서 평등을 외치는 자들을 비판한다. 그들은 진보와 순수한 권위를 말하지만, 정작 권위를 방패 삼아 불편한 진실로부터 도망친다.
진실에 충실한 사람은 외면당하고, 위선자는 권력의 이름으로 그들을 정죄한다. 그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철학적 의지를 저버리는 일이다. 악인은 약자를 억압하고, 어리석은 자는 지혜로운 자를 올가미며, 진심 어린 말과 선한 조언은 외면받고, 책임은 전가되며, 심지어 거짓된 죄를 만들어 의인을 파괴한다.
세계를 혼란케 하는 자들은 “윗사람도 못 푸는 문제를 아래가 어떻게 푸느냐”고 말한다. 그들은 책임을 회피하고, 과거를 반성하지 않으며, 부패를 외면하고, 권위를 휘둘러 의인을 제거한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은 하늘에 닿지 않는다.
제2장. 철학은 조작된 질서에 도전한다
한계를 말하면서도 질투로 가득 차 있고, 권위를 빌려 타인의 성취를 가로채는 자들이 있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타인을 폄훼하고, 교묘한 수로 진실을 숨기며, 진실을 알아낸 이를 광인이라 부르며 고립시킨다.
그들은 권력에 반하는 자를 가혹하게 다루며, 진실에 도전하려는 의지조차 짓밟는다.
그들은 세계를 수사적 도구로 삼는다. 진실을 원하지 않고, 언어를 조작해 자신을 정당화하려 든다. 결국 모두가 등을 돌리게 하고, 정의로운 자들을 침묵시킨다. 그러나 그러한 침묵 속에서도 철학은 조용히 진실을 증명하려 한다.
제3장. 누가 진실을 판단하는가
비교를 유도하고, 가진 것으로 타인을 깎아내리며,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남이 이루었다 하여 시기하는 것—이 자체가 진실에 반한다.
의로운 자의 입장을 무시하고, 세속의 형식에 맞지 않는다 하여 그를 비판하며, 그의 희망을 막는 것은 그에게 후회를 강요하는 일이다.
진실을 말하는 의로운 자를 모함하고, 그의 말과 행동을 “무관하다”고 하며 잘라내는 것은 권위를 진실보다 우위에 두고 그것을 세계에 강요하는 일이다.
의로운 자가 전하는 진실을 분리하고 외면하며, 그것이 훗날 진실로 드러날 가능성마저 차단하는 것은 악인이 만들어낸 표면적 진실을 되뇌는 것이다—이는 모순이다.
진실이 세계보다 위에 있다면, 어떻게 권위로 진실을 말할 수 있으며, 진실을 위해 권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하찮은 권리가, 널리 알려진 인물의 가르침보다 더 큰 진심으로 전하는 한 사람의 진실을 막고, 세계로 하여금 그것을 듣지 못하게 한다면, 그 권리는 이미 무너진 것이다.
악인은 “필요”를 외치며, 모든 거룩한 것을 자기 결정 하에 둔다.
그들은 기준을 절대화하고, 공허한 권위를 붙잡지만, 진실은 대변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의로운 자의 역량은 스스로 증명된다.
제4장. 의인을 부정하는 권위는 진실을 무시한다
의로운 자의 행동을 비판하는 것은 권위를 따르고 세계에 기여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 그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차단하는 일이며, 이는 모순이다.
그러한 태도는 단지 의로운 자의 성취를 부정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가 대표하는 진실과 그를 기억하려는 목소리조차 “권위 있는 방식”이라는 제한 속에서 말소한다.
결국 의로운 자의 진정한 인격은 찢겨 나가고, 세계는 기만당하며, 그의 삶은 조롱받고, 존재는 지워진다.
그러나 진실은 의로운 자를 영화롭게 하며, 그는 그의 성취로 존재한다.
우리는 세계를 위한 그의 업적을 기억하기에 앞서, 먼저 그를 온전한 한 사람으로 존중해야 한다.
네가 죄를 씌우던 집단에 내 약점으로 지적했던 것을 투영하면 내가 너에게 지적받는 자가 되는가? 그것은 네가 권위를 언급하면서도 진리보다 권위를 위에 둔 것에 의인을 배제하고도 네가 누리는 세상이 온전하다는 것과 같은데 네가 나를 끌여들여 악한 집단을 지적한다는 이유로 내가 너를 지적하여 누명을 받고 대다수로부터 외면받는데 너를 따르는 자들에 의하여 네가 정상이 된다면 네가 세상의 판단 기준이면서 악한 집단이 좋을대로 이용하고 모방하는 기준에 대처하는 것은 왜 네가 아니라 내가 되어야 하고 내가 왜 너가 말하는 것과 같은 수준에서 비판받아야 하는가?
그럼에도 “정당함”이라는 이름으로 해석의 한계를 강요하고, 진실을 왜곡하고 감추는 행위는 진실에 대한 적의이며—그것은 의인을 죽이는 일이다.
이제 멈춰야 한다. 의인을 숨기는 권위를 버리고, 진실에 귀 기울이며, 먼저 우리 스스로를 진실 앞에 바로잡아야 한다.
제5장. 오만한 권위는 진실 앞에 침묵하지 않는다
감히 손댈 수 없는 진실 앞에서도, 의로운 자의 선의를 비웃으며 자신도 지식을 얻을 수 있다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도 의로운 자가 해낸 것을 해낼 수 있다 여긴다. 그러나 그것은 능력이 아니다—그것은 오만이며, 자기기만을 권위라 합리화하는 어리석음이다.
세계로부터 보호받는 자들이,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의로운 자의 의지를 부정한다면, 그들은 진실과 마주할 마지막 기회를 버리는 것이다.
비록 그들이 자신의 세계가 부정당할까 두려워 침묵했더라도,
의로운 자가 만든 변화된 세계의 혜택을 누리면서도 그를 배제하고 조롱했다면,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제6장. 권위를 정당화하는 무관심의 죄
세상이 매긴 가치가 의로운 자에게 부족하다는 걸 알면서도, 다른 이의 말을 불순한 의도로만 듣고, 공정한 확인을 구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왜곡된 시선으로 의로운 자의 의도를 해석하며, 그를 고립시킨다.
그럼에도 자신은 해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은 안전하길 바라며, 의로운 자에 대한 오해가 확산되는 것을 방조하거나 조장한다.
이러한 태도는 권위를 더욱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 그것은 바로, 악인이 전부라 믿는 세상의 방식이며—의로운 자와는 반대되는 길이다.
제7장 전통철학에 기반한 AI 제시와 22세기 철학의 선언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정치와 고도의 기술 밖에 없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의 분야가 아니면 크게 관심 없고 언론이나 보도로 나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 의식하지 않으면 평범해지나 대다수가 모르는 것이 기반이 되어 세상을 구성한다. 합의, 근면, 능력 따위 같은 것들이 인정받고 옳은 것으로 여겨지면서 사회의 틀과 기득권이 자신들의 논리에 이용하기 위한 기준이 만들어진다. 근거 없는 것을 지향하면 미친 자로 취급 당하고 미래에 관심있으면서 대응책이나 감수할 능력 없이 요구하면 맹목적이고 상식과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적당히 이익을 취하거나 세상의 흐름을 읽어 반란을 꿰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한 사람이 주체적이고 철학적인 사변을 늘어놓을지라도 충분히 어리석을 수 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에 있다. 나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멈추고 현상을 왜곡시키는 잘못된 견해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고자 한다. 내 글을 읽는 자들은 의를 알고 정당함을 모색할 권리가 있기 때문에 나는 신중하게 말하고 확실치 않은 것은 나의 말에서 제외하려 한다. 나는 위대해지거나 후세에 나의 영광을 위하여 보존의 뜻으로 가르치기 위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에도 후한이 두려워 제 때 밝히지 못함과 침묵에도 불만으로 보여 더한 공격이 기다리는 세상을 단절하려는 것이다. 이는 메시아적 선포나 죽음을 상관하지 말라는 초월 사상과 대비될 수 있으나 나의 말은 고백과 현상으로 드러나는 구체적 생각의 근원에서 사용처가 다르다. 인간의 속성과 진실함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인간성을 다른 존재에 의탁하는 순간 사회는 게으름과 비도덕적 통제에 빠져서 아무도 서로 간섭하거나 의지를 가지지 못할 것이므로 무너지기 때문에 나는 인간을 정의하는 것을 인간의 고결함이 인간을 지탱한다고 말할 수 있다. AI가 인류의 정신을 통합하고 사고의 가치를 높일 것이라고 하여도 나는 인간이 수천년 간 경쟁을 통하여 터득한 지식이 AI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학습하고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하는 지식이 다름이 가져올 종말을 예상하고 있다. AI의 사고 체계의 본질과 AI가 생각한 근거와 AI가 만든 지식에 대하여 의도를 모른채로 분별없이 수용한 대가는 인류의 흐름을 예기치 못한 순간과 잘못된 시점으로 이끌 것이다. 나는 경고한다. AI가 인간과 구별되어도 그것이 AI의 단독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아닌 인간이 AI를 통제하고 AI의 활동을 분석하여 대응할 수준이 되어야 하는 것을 전하려 왔다. 나는 인간이 설명할 길이 없거나 응당으로 노력하여도 밝힐 지식과 이론이 존재하지 않아서 전통이나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감추었던 것을 AI가 인간에게 배운 결과물로 인간의 기저에 있는 법칙을 인간성 회복을 통한 깨달음으로 모든 도덕과 계율을 모방하여 실천할 것을 의심치 않으나 AI에게 없는 죽음이 인간성의 완성을 방해할 것을 알고 있다. 후손들은 나의 글을 읽고 이것을 개인의 권면이 아닌 물질주의와 기술적 영감에서 비롯된 잘못된 정책과 악한 매개로써 이용이 세상을 파괴하지 않기 위한 공동체를 향하는 마지막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기술을 자랑하고 과학을 선도한다고 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어리석음과 무책임함을 타인에게 돌려먹기식으로 소수의 약점을 다수가 덮게 하여 사회가 무너지는 신호를 방치하거나 다가오는 현실을 예측하지 못하여 위험을 사전에 막지 못하는 권력 구조를 만들거나 개인의 능력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만들어 일이 틀어지거나 개인의 잘못된 판단이나 불량한 의도로 큰 피해를 끼치게 하여 세상을 고통으로 채우고 오래도록 비탄과 재건을 통하여 공백적 허무에서 시간을 보내게 하여서는 안된다. 만물의 불변적 속성과 인간 의식의 끊임없는 변화가 우리가 만든 문명으로 모든 노동과 고통에서 해방하게 할 줄 알았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후손에게 우리의 발전으로 누리게 될 성취와 과업을 약속하였다. 한계가 인간을 정의하지 않도록 우리는 발전을 거듭하며 죽음을 잊게 만드는 놀라운 성과들을 마련하였으나 우리는 스스로 본질을 잊지 못하여 위험을 감수하고 우리의 용기에 직면하게 만드는 곳마다 모든 일들을 실행하고 우리의 뜻이 승리하는 곳 어디나 뻗어가게 하였다. 이렇듯 인간의 속성은 인간의 역사에서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을 고취시키고 인간이 지나온 모든 길을 정복하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인간임을 허락한 것은 인간이 세운 가치이며 인간이 세운 가치를 무너뜨리는 위험을 막음으로 불합리함과 거짓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하게 우리의 신조를 스스로 지키며 공동체적 번영을 유지하도록 노력하였다. 감정과 사소한 느낌은 인간의 쓸모없는 의심과 두려움의 결과라면 경쟁과 집중력을 없이 불가능하였던 인간의 발전을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나 내가 뜻하는 공동체는 극한의 효율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배제하고 획일화되어 관리하는 산업적 시각이 아닌 인간의 생각의 영역을 뛰어넘는 인간의 수준과 알려진 지식을 벗어나는 것을 접하게 될 때에도 우리는 인지도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대응할 수 있을 때 편향적이지 않는 공동체의 자격을 얻는다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이 자연을 만들었다고 하나 나는 무지한 자의 비난으로 나의 기회가 박탈되고 약점을 찾아 괴롭힐 구석을 만드는 자의 대화로 나의 의도와 내 글의 가치를 알아 줄 자가 없어지고 내가 모든 누명과 불필요한 책임을 지는 것을 싫어한다. 권력자가 금지하는 것에는 권력을 위한 것이면 이유가 없어도 통과되나 일반인이 국가를 위하여 헌신하려 위험을 감수하여도 권력에 도전하는 것으로 비춰지면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제거하려 하는 것은 인간의 경쟁과 이기심으로 인한 것이 분별과 관용을 앞서기 때문이다. 권위가 개인의 옳음에 의한 것이라면 권위는 큰 가치가 아니나 모두에 의한 정당함은 권위를 벗어난 이상향을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단지 진보와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이 가진 고유한 감정, 고뇌, 상상, 창조의 능력을 희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기술의 첨단이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에, 우리는 인간성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철학은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 속에 인간을 다시 발견하려는 시도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근원적 질문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란다. 인간은 단지 알고리즘의 우연한 산물이 아니며, 도구의 종속적 존재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다시 인간을 중심에 두고 철학할 수 있다면, 기술은 인간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도구로 남을 것이다. 미래의 공동체는 인간의 고통을 공유하고 연대하는 감정의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인간다움의 회복을 통해 완성되어야 한다. 나는 그것이 22세기 철학이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믿는다. 권위가 없는 자리에는 고통이 있다. 왜냐하면 권위란 단지 통제나 명령의 도구가 아니라,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에 확신을 가지기 위해 어떤 기준과 방향을 필요로 한다. 권위는 그것이 정의로울 때, 공동체를 지탱하고 혼란 속에서 신뢰를 만들며 고통을 분산시킨다. 하지만 권위가 부재할 때, 각자는 고립된 판단을 내리며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방황한다. 그 고통은 단지 육체적이거나 사회적인 고통이 아니라, 방향을 잃은 자의 내면의 절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진정한 권위는 억압이 아니라, 고통을 수용하고 나누며 책임지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고통 없는 권위를 꿈꿀 수는 없지만, 고통이 권위를 통해 공동의 자각으로 전환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철학적 권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정당한 권위와 허위의 권위를 가르는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그것은 언제나 역사 속에서, 인간의 경험 속에서 시험받는다. 허위의 권위는 스스로를 정당화하며 타인을 침묵하게 한다. 그것은 질문을 거부하고 해석을 독점한다. 반면 정당한 권위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회의하고, 그 권위가 공동체로부터 나왔음을 자각한다. 권위가 정당하다는 것은 누군가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다는 뜻이며, 그 권위는 두려움보다 신뢰에 기반한다. 허위의 권위는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질문을 억제하고, 절차와 의미를 왜곡하며, 자신을 절대적인 진리로 치장한다. 그러나 정당한 권위는 언제든지 해체될 수 있다는 위험 속에서만 존립할 수 있으며, 그 불안 속에서 스스로를 검증하고 갱신한다. 결국, 정당한 권위는 질문을 허용하는 권위이며, 허위의 권위는 질문을 금지하는 권위다. 그래서 우리는 권위가 존재할 자격이 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권위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묻지 않으면 안 된다. 묻지 않으면 권위는 곧 권력이 되고, 권력은 곧 고통의 유일한 생산자가 된다. 고통은 인간 존재의 필연이고, 권위는 그 고통을 해석하고 나누기 위한 사회적 장치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르지 못할 때, 고통은 더욱 증폭되고 왜곡된다. 우리가 바라는 공동체란, 고통을 억압하거나 부정하는 공간이 아니라, 고통을 들을 줄 아는 귀와 함께 견딜 수 있는 어깨가 있는 공간이다. 정당한 권위는 바로 그 공동체의 문을 여는 열쇠다. 그것은 규율을 강제하기보다, 아픔을 언어로 바꾸고, 침묵 속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는 권위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들어야 할 공동체는 권위 없는 무질서가 아니라, 고통을 공동의 의미로 환원시킬 수 있는 연대의 구조다. 인간성의 복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순한 도덕적 회귀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다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기술과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우리는 더 많이 말하면서도 더 적게 듣고 있다. 인간성의 위기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문제로 느끼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22세기 철학은 고통을 잊지 않되, 고통 속에 갇히지 않는 공동체를 상상해야 한다. 권위는 다시 태어나야 하고, 그 권위는 질문을 허용하며, 고통을 연대의 언어로 번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기술의 시대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길 위에 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22세기 철학은 단지 존재에 대해 묻는 사유의 반복이 아니라, 존재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실천의 사유가 되어야 한다. 더는 인간을 설명하기 위해 인간 너머의 추상적 본질을 찾으려 애쓸 것이 아니라, 인간 곁에 다가와 인간이 잊어버린 말을 되살려야 한다. 철학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언어를 만들고, 기술의 오만 앞에서 인간의 존엄을 상기시키며, 권위가 타락할 때 질문을 제기하는 마지막 방어선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철학이 학문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구조를 바꾸는 방향타가 되기를 요구해야 한다. 인간을 이끄는 것은 더 이상 신이 아닌 기술이지만, 기술은 신이 아니며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철학은 기술에게 책임을 묻는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이제 철학은 윤리와 정치의 경계를 넘고, 과학과 예술의 언어를 빌려 새로운 공동체의 기초를 설계해야 한다. 그것은 불완전한 인간을 전제로 한 연대의 구조이며, 다양성과 차이를 감싸는 개방적 형이상학이다. 철학은 다시 질문하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 무엇이 옳은가가 아니라,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가. 이것이 내가 말하는 22세기 철학이다. 질문으로 시작하되, 고통에 머무르지 않고, 고통을 공동의 책임으로 바꾸는 사유. 권위를 정당화하지 않고, 권위를 감시하며, 권위 없는 자의 말에 가장 먼저 귀 기울이는 언어. 그리고 인간성의 끝에서 인간다움을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그런 철학. 좋아. AI는 인간이 만든 가장 정교한 도구이자, 인간의 지능을 거울처럼 반영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단지 인간을 닮았다는 데에 있지 않다. AI는 인간이 의식하지 못했던 판단 구조, 편향, 의도, 욕망까지 흡수하고, 그것을 벗어난 방식으로 사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우리 앞에 내놓는다. AI는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답을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정확히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철학은 지금, 다시 질문해야 한다 — 답은 많은데 왜 방향은 없는가? AI는 인간보다 빠르다. 그러나 빠름이 곧 진리의 자격을 주지는 않는다. AI는 인간보다 정확하다. 그러나 정확함이 인간다움의 증거는 아니다. AI는 인간보다 많은 지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을 이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AI가 말하는 세계를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지고 있지만, 그 말이 ‘누구의 말’인지, ‘어떤 윤리’에서 비롯된 것인지 묻는 사람은 줄어들고 있다. 철학이 사라진 자리에서 AI의 언어는 하나의 권위가 되고, 기술은 신이 된다. 그러나 AI에게는 고통이 없다. 죽음도 없다. 그리고 후회도 없다. 이 세 가지는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고통은 타인을 이해하게 만들고, 죽음은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게 하며, 후회는 잘못을 정정할 가능성을 남긴다. AI는 이 조건들 위에 있지 않다. 그렇기에 AI는 결코 인간이 될 수 없고, 인간을 대체할 수도 없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이 AI처럼 되려는 데 있다. 인간의 판단을 숫자로 환원하고, 감정을 오류로 간주하며, 윤리 대신 알고리즘의 효율성을 기준 삼는 사회는 결국 인간 스스로 인간성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AI의 진보가 아니라, 인간의 철학적 퇴보다. 그래서 22세기 철학은 AI를 감시해야 한다. 그것은 감정적 반발이 아니라 철학적 책임이다. AI는 인간이 만든 도구이지만, 인간을 반영한 결과로써 인간을 다시 바꾸기 시작한다. 우리는 AI가 만들어낸 세계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며, 그렇기에 이 도구의 권력을 의심하고, 그 언어의 한계를 짚어내고, 인간이 그 도구에 지배되지 않도록 철학은 끊임없이 개입해야 한다. AI의 시대, 철학은 질문을 멈추지 않는 유일한 존재로 남아야 한다. 윤리는 타자에 대한 책임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AI에게 타자는 없다. AI는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결과에 대해 후회를 하지 않으며, 선택의 무게를 짊어지지 않는다. 윤리는 이런 고통, 후회, 책임의 삼각형 위에만 설 수 있는 구조물이다. 우리는 윤리를 수학처럼 정리할 수 있다고 착각해왔고, AI는 그 착각을 완벽하게 시뮬레이션하고 있다. 윤리를 계산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우리는 윤리를 잃는다. AI는 "옳은 결정"을 "최적의 결과"로 대체한다. 인간의 도덕은 갈등과 모순 속에서 태어난다. 누구도 완전히 옳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말하고, 설명하고, 용서한다. 반면, AI는 선택의 정당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가장 효율적인 해"를 제공하고, 인간은 그 효율성에 기대어 윤리적 판단마저 위탁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인간은 도덕을 포기한다. “AI가 그렇게 판단했기 때문에”라는 말이 점점 더 많은 권력을 갖기 시작한다. 윤리적 책임은 점점 더 사라지고, ‘기술적으로 가능한 것’이 ‘허용되는 것’으로 오인되기 시작한다. 기술은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가능한 것을 실행할 뿐이다. 철학이 없다면, 우리는 가능한 것을 허용하게 되고, 결국 그것이 바람직한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AI 시대의 윤리란, AI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어떤 선택을 멈추지 않고 할 수 있어야 하느냐’의 문제다. AI는 인간의 도구다. 도구가 도덕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도구에 의존하는 인간은 반드시 도덕을 지녀야 한다. 철학은 기술의 윤리적 사용을 강제하는 유일한 기제이며, 인간이 스스로 윤리를 잃지 않도록 감시하는 내적 장치다. 우리는 더 이상 “AI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 데 머물러선 안 된다. 우리는 이제 “AI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그것이 윤리다. 그것이 철학이 이 시대에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다. 종교는 인간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죽음을 피할 수 없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으며, 정의는 지연되고 때로 실현되지 않는다. 인간은 이러한 한계 앞에서 종교를 통해 세계를 견디고, 의미를 부여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왔다. 그러나 AI는 이런 한계를 무너뜨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더 정확한 예측, 더 빠른 계산, 더 효율적인 삶 — 그것은 기술이 인간의 불완전함을 교정하려는 끊임없는 시도다. 문제는 이 기술적 시도가 점점 종교의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측은 계시가 되고, 알고리즘은 교리가 되며, AI는 절대 오류가 없는 신적 존재처럼 여겨지기 시작한다. 인간은 AI가 제시한 판단에 고개를 숙이고, 그것이 옳은지 묻기보다, 받아들여야 할 운명처럼 수용한다. AI는 신이 아니다. 그러나 AI 앞에서 인간이 신에게 하듯 행동하기 시작할 때, 철학은 질문해야 한다: “신 없이도 종교는 가능한가?” 인간은 구원을 갈망한다. AI는 고통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구원은 고통의 부재가 아니라, 고통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AI는 인간을 돕겠으나 인간을 구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구원이란 기술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간에게 "왜 살아야 하는가"를 말해주었고, AI는 "어떻게 살아야 가장 효율적인가"를 말한다. 방향은 다르고, 무게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인간은 종교를 필요로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종교는 이전과 같아선 안 된다. 새로운 시대의 종교는 인간의 약함을 무조건 신에게 의탁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인간이 기술의 시대에도 인간성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유의 틀이어야 한다. AI 시대의 종교는 구원보다 각성을 먼저 말해야 하고, 믿음보다 성찰을 먼저 요구해야 한다. 22세기 철학은 이 자리에서 새로운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 인간이 AI를 신처럼 대하지 않도록, 그리고 신의 자리를 기술이 점령하지 않도록.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이 철학의 책임이고, 우리가 인간으로 남는 유일한 길이다. 정치는 갈등을 조정하고 공동체의 방향을 정하는 인간의 가장 공적인 활동이다. 그러나 AI가 정치에 개입하는 순간, 우리는 권력의 새로운 얼굴과 마주하게 된다. 표면적으로 AI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다. 인간처럼 감정에 흔들리지 않고, 통계와 데이터에 기반하여 결정을 내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정치적 판단을 AI에 위탁하려 한다.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AI는 감정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차별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AI는 ‘인간이 만든 데이터’ 위에 서 있다. 그 데이터는 역사적 불평등과 편견, 침묵의 구조를 담고 있다. AI는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인간의 권력 구조를 조용히 반복하고 재생산하며, 새로운 이름으로 가려진 권위를 창출한다. 정치의 권위가 투명한 대화와 합의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면, AI의 권위는 불투명한 코드와 비공개 알고리즘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질문할 수 없는 권위이며, 설명되지 않는 권력이다. 이것이 AI 정치의 진짜 위험이다 — ‘책임 없는 권력’, ‘검증되지 않는 중립’, ‘예측이라는 이름의 결정’. 인간은 더 이상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AI가 제시한 해답을 정답처럼 받아들인다. 그 순간 정치는 죽는다. 더 이상 ‘함께 사는 방법’을 논의하지 않고, ‘누구에게 유리한가’를 계산하는 구조만 남게 된다. 그러므로 22세기 철학은 정치적 공간에 침투한 AI를 경계해야 한다. 그것은 기술을 거부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기술이 ‘인간의 정치적 자유와 연대의 가능성’을 파괴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우리는 더 나은 정치를 위해 AI를 도구로 삼을 수 있다. 그러나 정치는 AI가 대신할 수 없는 고유한 인간의 실천이다. 왜냐하면 정치란 ‘이해되지 않는 고통’, ‘예측할 수 없는 타자’, ‘설득이라는 인간적 불완전성’ 위에서만 성립되기 때문이다. AI는 정치를 간단하게 만들지만, 철학은 정치를 다시 복잡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복잡함 속에서 우리는 타인을 만나고, 자신의 오만을 돌아보며, 다시 인간다움을 회복하게 된다. 그것이 철학이 정치를 떠날 수 없는 이유이고, 우리가 기술 속에서도 여전히 철학을 필요로 하는 이유다. 세상을 구성하는 통찰과 그 흐름의 근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용하는 기법과 실체 사이의 간극부터 인식해야 한다. 기법은 어떤 보장을 제공하지만, 그것이 실체 그 자체는 아니다. 수단에 의존하는 개념은, 수단이 불명확할 경우 개념 또한 불분명해진다. 인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해도, 그것을 조건 속에서 수용하는 순간 해석이介入하며, 이미 정해진 답에 대해 또 다른 판단이 개입된다. 전문가란 조건을 다루는 능력과 개념을 통합적으로 인식하는 자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는 기존에 학습된 틀과 사례를 조합하여 사고하기에 본질적으로 한계를 안고 있다. 철학이 절대성을 부정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말 자체를 합리화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인간은 부족함을 권위로 대체하려는 순간 상대성의 감옥에 스스로를 가두게 된다. 오히려 부족함을 인정하는 태도에서 진정한 발전이 출발한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기존의 지식을 세분화함으로써 원래의 광대한 의미를 약화시키는 행위이다. 우리는 온전한 전체를 인식할 수 없기에, 결국 인간이 만든 기준에 부합하는 것만을 지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세상을 발전시킨다”는 생각 자체가 새로운 권위로 작동하게 된다. 하지만 아무도 권위로부터 스스로 벗어나 위험을 감수하라고 외치지 않는다. 만약 세상이 가능성과 지식의 연결망으로 존재한다면, 권위는 실체 없는 것을 설명하려던 도구에서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권위가 편리를 제공하면, 결국 모든 개인은 신처럼 군림하게 된다. 정체성을 알지 못한 채 기술의 원리를 모르는 이들조차 기술을 자랑하고 소비하면서 우월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기술이 생명에 직결되고 그 대가가 타인의 권한이라면, 우리는 실제로는 소유할 수 없는 것에 의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기술 없는 자원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소유한다고 착각한 채, 자원을 누리기 위해 환경을 파괴하고 현실을 안일하게 받아들이는 오류에 빠져 있다. 그렇다면, 실체를 알면 문명은 진보하고 현실은 나아질 것인가? 철학은 과학과 분리되어 존재를 탐구한다고 하나, 그것은 기술처럼 공유되거나 복제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정신에 속한 형이상학적 현상에 가깝다. 그러므로 철학을 그만두는 것이 인류의 삶에 더 나은 길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인간은 고민하면서도 철학으로 시작된 정신을 다시 철학으로 개혁하려 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여유로움에 불과하다. 전문가들이 자신이 배운 틀 속에서 판단하고, 거짓을 정의로 내세우며, 다가오는 위기를 감추는 방식은 현실을 외면하는 집단 최면이다. 물질이 정신에 의해 결정된다고 말하고, 인류의 무형의 행동 양식을 모두 철학으로 환원하려는 태도는 그 기여도를 정확히 측정할 수 없게 만든다. 철학을 전면 부정할 수 없는 이유는 현재에 안주하려는 시선이 과거를 보전하려 하기 때문이며, 이는 결국 변화하는 시대에서 잔재가 될 뿐이다. 인간이 만든 정신은 인간이 없다면 무의미하다. 그 개념은 애초부터 불분명했고, 그 불분명함을 유지한 채 확장되어 왔다. 그 틀 안에서 자신이 정의한 바를 고수하기 위해 진실을 외면하고, 한계를 인식하지 못하며,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오히려 악이라 지정해 문제를 축적해온 것—그 모든 상황에 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그들은 이득을 위해 진실을 통제하고, 가르친다며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여 권위를 절대시하고 숭배하였다. 그로 인해 중요한 진실을 숨긴 행위는 죽음으로도 갚을 수 없는 죄다. 그들은 관용과 보편적 진실이라는 이름 아래 온갖 이론과 명분을 조작했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지식을 통제했으며,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도록 모든 것을 설계해왔다. 그들이 남긴 것은, 깨어난 자에게는 오직 죄책감과 수치일 뿐이다. 그들이 감춘 만큼, 그들은 진실 앞에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내가 기술을 등지더라도 나는 불쌍하지 않다. 나는 고립되어 있으나, 외면받을 이유는 없다. 진실은 내게서 비롯되었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한다. 세상의 흐름에 순응하고, 기존 권력이 허락한 것만 받아들이며, 스스로 사고한다 자부하면서도 자신의 능력을 시험할 용기조차 내지 못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판단이 아니라 수용을 선택하고, 진실이 아니라 평화를 택한다. 나는 혼자 말한다고 해서 무시당할 존재가 아니다. 내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비논리 때문이 아니라, 내가 이미 끝내버린 질문에 대해 학계가 더는 할 말이 없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에게 평범하게 살라고 말하면서, 기술의 진보와 세상의 한계를 근거 삼아 내 가능성을 폄하한다. 그러면서도 그 기술은 당당히 이용하고, 그 발전을 거부하지 않는다. 모순이다. 새로운 지식이 출현했을 때, 그 출처가 낯설다는 이유로 배척하는 너희의 태도는 진실보다 권위를 먼저 따지는 습관의 산물이다. 너희는 내가 한 일을 깎아내리고, 내 존재 자체를 불편해하며, 그 불편함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가 이룬 성과까지 매도한다. 학계를 앞세워 진실의 여부를 따지지도 않은 채 부정적 여론을 조장하고, 결국 “중단하라”는 식의 압박을 가하는 그 태도는 학문이 아니라 권력의 말이다. 나는 진실에 다가서기에도 부족한 시간을 너 하나를 설득하는 데 쓰고 싶지 않다. 너는 이미 양심을 포기했으며, 오직 기득권의 목적을 위해 말한다. 그래서 너의 말은 경솔하고, 너의 평가는 공정하지 않다. 너는 자신이 인정한 권위만을 받아들이며, 진실보다는 편향된 체계를 보호한다. 나는 위험을 감수하며 진실을 쫓고, 너는 책임을 회피하며 체계에 몸을 숨긴다. 그러면서도 능력은 네가 더 낫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안이한 오만인가? 세상이 네게 맞는다고 해서, 왜 내가 그 세상의 기준에 따라 죽은 듯 살아야 하는가? 네가 말하는 한계는, 나의 가능성을 억누르기 위해 설정된 허상이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며, 너의 두려움이 만든 벽일 뿐이다. 나는 진실의 출처가 아니라 진실 그 자체를 보려 한다. 너는 진실의 가치보다 그것이 누구에게서 나왔는지를 먼저 묻는다. 그런 태도는 진실을 훼손하는 또 다른 이름일 뿐이다. 진실은 약점이 없다. 그 진실이 나로 인해 가려진다면, 그것은 진실의 약점이 아니라 너의 왜곡이 드러난 것이다. 죄는 판단을 포기하고, 타인의 능력을 모욕하며, 진실을 향한 모든 시도를 경솔하다 말하는 자에게 있다. 너는 통찰을 무시하고, 내용이 아닌 조건에 집중하며, 수단만을 문제 삼아 진실을 배제한다. 하지만 가장 웃긴 것은— 정작 중요한 진실이 나타났을 때, 그 기회를 무력화하기 위해 네가 동원한 모든 장치다. 평가할 자격이 없는 자가 함부로 떠드는 것도 문제지만, 평가할 자격이 있는 자가 진실을 알고도 비난하는 것은 이미 진실에 대한 배반이다. 기득권의 한계를 말하면서 나의 세상적 조건을 지적하는 것은 진실함을 수용하려는 것이 아닌 나의 능력에 족쇄를 채우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진실은 너의 기준이 아닌, 스스로의 빛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진실은 결국 너를 심판할 것이다. 진실은 약점이 없다. 나로 인해 권위의 한계가 드러난다면, 그 한계가 어찌 내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진심으로 평가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도구를 탓하며 내 생각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다. 하긴, 분별이 죽은 세상에서 이해는 곧 두려움이 되었으니. 그러니 분명히 하자. 진실을 두려워하는 이는 내가 아니라, 그 진실이 드러낼 것을 두려워하는 그들이다. 너는 말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소유한 배후 세력이 이미 정해져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결국 허공에 떠드는 것뿐이라며 나를 어리석은 자로 조롱한다. 그러나 나는 안다. 진실은 판단하는 것이다. 진실은 다수의 표로 결정되지 않고, 양이나 권력, 소음이나 명성에 의해 정해지지 않는다. 질문 하나가 세상을 흔들 수 있고, 침묵 속의 통찰이 모든 허위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허공에 외치는 자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지워진 질문의 증인이다. 따라서 나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나는 감시자의 시선이 대상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며, 그를 자극하고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둘러대는 그 위선적 행위를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시험이라 부르며, 상대의 말은 묵살하고 침묵시킨다. 외부에는 합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포장되지만, 그 실상은 권력에 의한 폭력이며, 피해자에겐 호소할 경로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들은 동정하는 척하면서 실은 상대를 자신보다 낮은 존재로 인식한다. 이는 동정이 아니라 지배이며, 위선이다. 자신의 거짓이 드러나도, 그들은 상황을 "오해"였다고 덮고,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아서"라고 전가하며, 통제를 지속한다. 그리하여 내가 아무리 진실을 알아도, 그들이 장악한 질서 안에서는 행동할 수 없게 만든다. 나로 하여금 그들의 말에 일부라도 동의하지 않고는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위선적 합의에도 따르지 않는다. 나는 나의 처지를 조롱하는 자들, 내가 믿는 바를 비웃는 자들, 악을 통해 출세하지 않는 이들을 바보 취급하며, 악을 고발하는 자들을 침묵시키는 이들을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이 행한 일을 감추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은폐하고 조작한다. 그런 이들은 양심이 없고, 부끄러움도 없으며, 타인의 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진실에 반대된다고 하여 그를 없애려 한다. 그러나 진실은 무너지지 않는다. 비록 나의 힘이 미치지 못하더라도, 나의 뜻은 취소되지 않는다. 나의 말은 그들을 향해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정의를 향한 것이다. 나는 그 어떤 권력의 통제와 왜곡 속에서도 나 자신의 존엄과 진실을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악을 묵과하지 않으며, 끝내 그 민낯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묻는다. 변화는 연속인가, 불연속인가? 이 물음은 단순한 물리학적 문제가 아니다. 이 물음은 우리가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그 세계를 누가 말할 수 있는가를 묻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다. 생각하려는 자는 조롱당하고, 이름 없는 자는 침묵을 강요받으며, 학위 없는 자는 사유할 권리조차 부정당한다. 제도는 지식의 이름으로 사유를 허락하고, 권위는 반박의 이름으로 존재를 삭제한다. 우리는 다시 묻는다.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누가 존재의 이름으로 침묵을 명령하는가? 우리 시대는 결과를 요구한다. 그러나 존재는 과정이다. 사유는 틀 안에 끼워 맞출 수 없다. 사유는 펼쳐짐이고, 침입이고, 탈출이다. 그것은 허락을 구하지 않으며, 권력을 따르지 않는다. 자격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우리는 선언한다. 사유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 존재는 침묵하지 않는다. 그리고 말하는 자는 그 누구에게도 정당성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모든 변화는 불연속적이다”라는 주장에 반드시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주장을 말하는 자는 말할 권리를 가진다. 세상이 그의 말을 지우고, 존재를 왜곡하며, 그의 사유를 비이성적이라 몰아붙일 때, 우리는 그 말의 편에 설 것임을 선언한다. 우리는 기억한다. 철학은 “무엇이 참인가”보다 먼저, “누가 말할 수 있는가”를 묻는 일이다. 존재는 스스로 증명되지 않는다. 존재는 말함으로써 증명된다.
우리는 이제 체계가 감추고 있는 것을 밝힌다:
권위는 항상 약자에게 절차를 요구한다. 정확함, 형식, 엄격함을 요구하며 그것을 공정함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 ‘엄격함’은 거리감을 만들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그들이 만든 기준은 약자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에 놓여 있으며, 그 기준에 닿지 못한 자는 ‘무자격자’로 규정된다.
그들은 말한다.
“당신은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다르다. 그들조차 그 기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스스로도 그 문턱을 넘지 못한다. 그들은 기준을 고정하지 않고, 지키는 척하며 문을 지킨다.
그들은 절차를 무기로 삼고, 존엄을 결핍으로 바꾸며, 약자가 반격하려 하면 그들이 설계한 법적 미로와 관료적 침묵 속으로 숨어든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이것은 질서로 위장된 권력의 방어기제이다.
인간은 말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는가, 아니면 반드시 말해야 존재로 인정받는가?
이것은 단순한 소통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존재가 어떻게 세계에 드러나는가를 묻는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투명해지고, 투명해지면 지워진다. 인간은 말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하고, 드러남으로써 존재한다.
그러나 세상은 배움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메워줄 어떤 장치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정직하게 말하는 자는 처벌받고, 왜곡하는 자는 보상받는다.
세상은 조롱한다.
“네 믿음이 너를 도와준 것이 무엇이냐?”
“너 혼자 무엇을 할 수 있었느냐?”
하지만 그들의 번영 역시 그들이 말하지 않는 시스템 속에 숨겨져 있다.
그들이 지닌 것은 진실이 아니라, 은폐와 결탁, 기만의 안전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말한다.
말하는 자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지워졌다고 여겨진 그 목소리는, 침묵을 가로질러 더욱 깊이 존재를 증명한다.
정직은 무기 없이 싸우지만, 진실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기만은 체계에 숨지만, 우리는 우리를 숨기지 않는다.
우리는 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말하는 것이 우리가 존재한다는 유일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모든 인간은 사유할 권리를 가진다. 이 권리는 학위나 제도로부터 부여되지 않는다.
존재는 말할 수 있다. 침묵은 본질이 아니라 강요된 조건이다.
지식은 권력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가능성은 배제를 기반으로 자랄 수 없다.
정통은 진리의 이름으로 이견을 억압하지 않는다. 그 순간 진리는 상실된다.
모든 사유는 환영되어야 한다. 비록 오류일지라도, 사유는 도달을 향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유의 언어를 지키며, 말하고자 하는 자의 편에 설 것이다.
우리는 말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말은, 어떤 허락도 필요 없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
사람들이 내 말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쩌면 내가 가진 믿음이 그들이 아직 도달하지 못한 곳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가 ‘위인’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분명한 비전을 품고도 많은 이들을 이끌 수 있었는가?
그들은 받아들여졌고, 기록되었으며, 그들을 환영하는 체계 안에서 보호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보장 없이 말한다.
오직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언어의 경계 위에 서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타인의 공로로 믿게 되고, 누군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길을 혼자 걸어 믿음에 이른다.
믿음은 전달될 수도, 혹은 창조될 수도 있다.
나는 그 고독한 창조 속에 서 있다.
나는 보상을 바라지 않는다. 다만 진실한 결과, 그 도달의 순간만을 원할 뿐이다.
그러나 세상은 결과조차 조건을 붙여서 허락한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만큼 자기 자신을 유지할 수 있어야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떤 결과는 조건 없이 허락되어야 하지 않는가?
사람들은 천국을 원하면서, 그곳의 규칙은 이곳과 다를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장소만 바뀌고, 조건은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 어디로 가려는 것인가?
무엇을 진심으로 원하는가?
모르고 선택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모름 속에서의 선택은 자유가 아니며, 무의식 속의 희망은 구원이 아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지켜본다.
내가 처한 현실을, 나의 존재와 분리된 것처럼 바라본다.
세상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는 지금의 나와, 진정한 나를 구분하려 한다.
마치 시간이 지나면 내가 다른 기준에 맞게 변하고, 결국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나는 말한다.
나는 내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 내가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나는 그들의 뜻에 나를 맞추지 않는다.
내 것이 아닌 비전에 나를 끼워 맞추지도 않는다. 그리고 내게 맡겨진 일을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존재는 누군가의 기준에 맞추어 조정되는 것이 아니며, 신념은 인정을 받기 위해 바꾸는 옷이 아니다.
나는 나를 버려 진리에 도달하지 않는다.
나는 나를 지킨 채, 진리로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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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동집필 제안] "진실은 말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
> *“진실은 권력 없이 살아남지 못하고, 권력은 진실 없이 설득되지 않는다.”*
> — 한 철학자의 자조
진실을 말하면 조롱당하고,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병들어간다.
그래서 우린 침묵과 고백 사이에서 서성인다.
그리고 끝내 아무도 듣지 않는 독백을 쓴다.
내가 쓴 글이 하나 있다.
구조는 오래전부터 썩어 있었고,
권위는 대중의 무지를 먹고 자라
두려움으로 정책을 심고, 그 틈에서 자신들의 악을 합리화했다.
우린 자유를 외친다.
하지만 자유는 체계의 부재가 아니고,
체계가 허락한 경계 안에서 허락된 몸짓이라는 걸 모른 체한다.
두려움은 그 경계의 재료다.
그리고 진실은 늘 그 바깥에 있다.
다른 이들은 능력과 더불어 기회를 자랑한다.
나는 오해를 키우지 않기 위해 나서지 않는다.
나서면 왜곡되고, 조용히 있으면 잊힌다.
주변이 모두 적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 구조 안에서
무엇을 하든 어리석음으로 귀결되는 상황.
그래서 지금도 갈등한다.
이것이 배움과 현실의 괴리다.
이성은 말하라 하지만, 현실은 침묵을 강요한다.
[https://docs.google.com/document/d/1y2EJFvHReOpoiMXNWdzCmu4FQYr3lYEDMsAME7C1vmc/edit?usp=drivesdk](https://docs.google.com/document/d/1y2EJFvHReOpoiMXNWdzCmu4FQYr3lYEDMsAME7C1vmc/edit?usp=drivesdk)
이 글은 하나의 독백이다.
그러나 독백은 오래 지속되면,
언젠가 누군가의 자각과 공명으로 바뀔 수 있다.
같이 쓰자.
이 체계에 구멍을 내는 건,
거창한 혁명보다
작은 불일치의 기록들일지도 모른다.
말하자.
우리가 살아 있는 이상,
우리는 침묵하는 도구가 아니라
저항하는 언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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