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할 거 없으니 블로그에 글이나 다시 써보는 것이다. ‘글의 풍채’—어정쩡한 단어부터 시작해보자. 글의 분위기, 문체적 외형? 글을 쓰는 방식, 목적, 문법과 배치에서 드러나는 흔적. 나는 이 얘기를 하면서도 나의 문체를 지킬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나의 문체’인가?

‘나의 문체’는 소유물이 아니라 일종의 상태다. 표현 중 ‘나의 병(disease)’이라고 할 수 있듯이, ‘나의 문체’도 그러하다. 만약의 나는 중학교 시절 2년간 사서를 했고, 논술 학원을 다니며 수천 권의 책을 읽었다. 덕분에 문체에 대해 나름의 일가견이 있다. 사실 보여주고자 하는 나는 의도적인 미숙함에 취해, 타인이 그것을 발견하게 만드는 방식을 싫어한다. 내 생각은 더럽고 난장판 같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이 문체는 그런 의도를 담는다.

전달의 목적이 있는 글은 구조를 갖춘다. ‘어떻게’, ‘무엇을’—서두와 배치가 필요하다. 한국어는 고유한 문법을 가진다. 그 문법은 한국어의 특징이다. 일본어와도 유사하다. 하지만 나는 그 이름을 굳이 외우지 않는다. 진리를 탐구하는 내 목적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독자 또한 이미 들어봤을 터이므로 굳이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가 곧 나의 문체다.

나는 다중 목적을 추구한다. 습관이면서 동시에 글의 목적을 이룬다. 그래서 때로는 효율적이고, 아름다운 문체를 만든다. 글을 다듬는 과정도 그렇다. 예컨대, 네 번째 줄의 ‘나의 병’은 뜬금없게 보여 ‘나의 병(disease)’로 고쳐 시선의 분산을 막았다. “…”은 내가 실제로 말한 뒤 일부를 생략했음을 나타낸다. 작위적인가?

그렇다면 안심해도 된다. 작위적으로 느껴진다는 건 최소한 ‘의도’를 감지했다는 뜻이니까. 부정적인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올 기준이 된다. 나는 이를 증명해 보이려 한다.

진실과 진심

“진심을 전달하는 방법이 있는가?” 다소 이상한 질문이다. 왜냐하면 **진실(truth)**과 **진심(sincerity)**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 진실을 전달하려면, 그저 사실을 말하면 된다.

  • 그러나 상대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게 하려면, 일이 간단하지 않다.

지금 내가 이 글을 쓰는 상황도 그렇다. 화려한 말과 볼드체를 섞어 강조하지만, 쉽게 주장을 드러내진 않는다. 그래서 자칫하면 설득력을 잃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의 이 노력이 ‘진심’으로 여겨지는가? 혹여나 ChatGPT를 쓰는 것은 아닌가? 혹은 타인의 문장을 표절한 것은 아닌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곧 나의 진심이 전달된 것이다.

다만 여기서 **“진심 = 숨겨진 사실 + 팩트폭격”**이라는 착각을 주려는 의도는 없다. 오히려 반대다. 진심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신뢰와 의심

사람은 진심이 전해지면 설득되곤 한다. 이는 타인을 ‘믿음’으로 대하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믿음에는 영속성이 없다. 과거에 종속될 뿐이다. 그래서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판단이다. 흔히 쓰는 “신뢰감”이라는 표현은 직설적이지 않고, 오해의 소지가 있다.

  • 의심 = 두려움, 막연함에 근거한 판단

  • 신뢰 = 따뜻함, 친밀감에 근거한 판단

결국 의심도, 신뢰도 감정이라기보다 태도와 해석이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 대칭적이다. 신뢰감을 주려는 감정과 의심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같은 기준 위에 놓인다. 나는 이를 [나쁜 감정]이라 부르겠다. [나쁜 감정]에 오래 머물면, 오히려 작위적인 방식조차 채택하기 힘들어진다.

설득과 문체의 길

진실을 전달하는 길과, 진심을 전달하는 길은 다르다. 진심은 상대가 초집중 상태, ‘순수한 상태’에 있을 때 드러난다. 그것은 때로 유혹에 가깝다. 그래서 현실의 방법론에 적용하기엔 위험하다.

사람은 결국 두 부류로 나뉜다. 진심을 전달하는 자, 진실을 전달하는 자. 혹은 그 사이 어딘가의 제3자. 그러나 나는 이렇게 본다.

작위적인 것이 반드시 나쁘진 않다. 오히려 진실을 가리는 복잡함 속에서도, 효율적으로 배치한다면 ‘진심’은 부가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생각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노출하는 것이 오히려 비언어적 사고를 교란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일정 정도의 작위적 노력은 오히려 더 순수한 상태를 보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