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유튜브 숏츠나 커뮤니티 등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명 ‘사이다’ 일화들이 있다.
등장인물과 배경은 제각각이지만, 대부분의 구조는 단순한 권선징악 이야기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다.

예시 1) 값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니며 남을 무시하던 사람이, 알고 보니 낡은 차를 타고 다니던 자산가에게 망신을 당한다.
예시 2) 지식을 자랑하던 사람이, 사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 앞에서 무지를 드러낸다.
예시 3) 권력을 휘두르며 군림하던 사람이, 더 높은 권력자에게 굴욕을 당한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상대를 무시하고 깔보던 사람에게 교훈을 주는 방식이 논리적 반박이나 윤리적 깨달음이 아니라
더 큰 부, 지식, 권력을 지닌 사람을 통해 망신을 주는 구조라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런 ‘사이다’ 스토리를 접할 때마다 통쾌함보다는 답답함을 느낀다.

왜 누군가가 오만한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게 하려면, 꼭 그 사람보다 더 가진 사람의 존재가 필요하단 말인가?
부가 적든 많든,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아야 하며, 남을 깔보는 태도는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은가?

비슷한 구조는 한국 사회의 차별 문제에서도 드러난다. 예전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에서 인종차별 이슈가 발생할 때 한국인들의 댓글을 보면 이런 말을 자주 본다.
“미국, 독일 같은 선진국도 아닌 후진국 남미 국가 출신이 인종차별을 한다니 어이가 없다.”

하지만 이런 발언은 또 다른 차별일 뿐이다. 인종차별은 그 자체로 잘못된 행동이지, 그 행위자의 국적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미국인이 인종차별을 하든, 남미인이 하든, 똑같이 비판받아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자신도 모르게 힘의 위계를 기준 삼아, 마치 누가 그 말을 했느냐에 따라 말의 ‘가치’가 달라지는 듯한 사고방식에 빠져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는 아무리 논리적으로 올바른 말을 해도, 그 말을 누가 하느냐가 더 중요해진다.
더 큰 부와 권력이 없다면, 올바른 말도 쉽게 무시당하고 만다.
‘네 주제에 그런 말을 해?’라는 태도는 결국 사람들의 자율적 사고를 억누르게 된다.

자신의 판단보다 강한 자의 생각에 기대게 되고, 그 결과로 사회는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줄어든다.
이런 흐름은 점점 더 큰 권력을 추구하는 사회를 만들고, 결국 모든 판단과 정의가 ‘가장 강한 사람’에 의해 좌우되게 된다.

이 흐름의 끝은 종종 독재다. 억울함을 논리와 정의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는, 절대적인 권력자에게 ‘대리 응징’을 해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절대 권력은 언제나 타락하기 마련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에서도, 대중이 이성보다 카리스마와 권위에 의존할 때 사회는 위험해진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솝 우화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개구리들은 무정부 상태가 싫어 제우스에게 임금을 달라고 요청한다.

제우스는 통나무를 던져주었고, 개구리들은 처음엔 그것을 두려워했지만 곧 얕잡아보고 무시한다.
그러자 제우스는 이번엔 황새를 보냈고, 황새는 개구리들을 잡아먹어 버렸다.

지금의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들이 불의에 대한 ‘사이다 판결’을 내려줄 절대 권력을 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절대자가 황새가 될까 두렵다.

정의는 더 큰 힘으로 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