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자연과학(경험 과학)은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고 이론을 구축하며, 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철학은 그러한 목적을 가진 경험 과학의 하나가 아니다. 경험 과학들과는 달리, 철학의 목적은 어떤 새로운 진리를 발견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논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하여 철학적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철학사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전통적인 철학의 개념 은, 모종의 진리에 대한 일반적 추구로 규정되는 인지적 작업이 다. 물리학이나 수학, 그리고 철학은 모두 모종의 앎, 즉 지식을 추구하는 작업이었고, 이들은 단지 그 탐구의 주제에 의하여 구분될 뿐이었다. 해커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26비트겐슈타인『철학적 탐구』 27 플라톤주의자들에 따르면 철학의 목적은 모든 사물의 본질적인 성격 을 드러내는 추상적인 대상을 […] 탐구하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철학이 분과 학문과 연속선상에 있으며, 다만 얼마나 보편적인가에 따라서 구분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철학이 토대를 놓는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철학이 할 일은 모든 앎을 확실하 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반위에 정초하는 것이었다. […]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관념들의 근원을 추적하고 앎의 본성과 범위를 탐구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생각했다. […] [칸트]에 따르면, 철학은 어떤 주어진 영역에 관한 앎이 가능하기 위한 전제 조건들을 밝히는 일이며, 철학이 내놓 은 결과는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알 수 있으면서도 경험 영역에 관한 필연적인 참을 진술한 일련의 명제들이어야 했다. 이와 같은 긴 전통 속에 서 공유된 믿음은 철학이 앎을 위한 노력이라는 것이다
.(P.M.S. 해커, 전대호 역,『비트겐슈타인』, pp.15-16)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이 자연과학의 한 분과가 아니며 자연과학과 경쟁하는 학문이 아니라는 주장을 통하여, 철학의 목적을 모종의 앎이나 지식의 추구로 파악해 온 철학사의 유구한 전통과 결별을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철학적 문제의 원천과 그 성격, 그 리고 철학과 경험 과학의 차이에 대한『논고』의 이러한 규정은 『탐구』에서도 여전히 동일하게 유지된다. 즉,『탐구』에서도 철 학적인 난제들은 여전히 언어의 오용이나 그 본성에 대한 오해에 서 비롯된다고 주장되고 있다.(§38, 122, 132) 철학은 바로 언어에 의해서 야기된 지성의 현혹에 맞선 투쟁인 것이다.(§109) 철학적 문제가 문법적 유사성에 의하여 논리적 차이가 가려짐으로써 발생한 지성의 현혹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철학에서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별로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우리가 과거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한, 우리는 언어가 가지고 있는 기존의 경향성에 끊임없이 현혹될 것이며, 그 결과 동일한 문제가 반복적으로 제기될 것이기 때문이다.(§11. §664)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혼란을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성에 대한 열망과 언어의 작동 방식에 대한 오도된 그림 등을 들고 있다. 일반성에 대한 열망이라 함은 다양성에서 통일을, 차이에서 동일성을, 다수에서 하나를 추구하려는 경
향이다. 그리고 우리는 언어가 작동하는 방식에 관해서도 특정한
그림에 사로잡혀 있다.(§115) 여기서 그림이란 우리가 사고하는
어떤 특정한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즉 어떤 낱말의 의미를 생각
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보다 친숙한 어떤 모형이나 패턴을 따라
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이러한 원인들이 야기한 철학적 문제
와 이론의 대표적인 예가 플라톤의 철학이다. 가령 우리는 수많은 빨간대상들을 접하면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일반성의 열을 통하여, 이들에게 공통적인 본질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본질을 나타내는 것으로 빨강이란 보편자를 생각 고, 그 보편자를 이미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개별적인 대상들의
그림에 맞추어 생각한다. 그리하여 ‘빨강’은 비공간적, 비시간적
이지만 여전히 유사 물리적 대상으로 존재하는 추상체를 가리킨
다는 주장이 따라 나오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따르면,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우리의 언어적 경향성에 기인한 오도된 형이상학 외에 다름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적 혼란에 뿌리를 두고 있는 철학적 질문
들을 일종의 질병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철학자들은 일종의 지성의 병에 걸린 환자들이며, 비트겐슈타인
자신의 철학적 작업은 이러한 질병을 치료하는 치유적 작업이라
는것이다. 그가 치료의 수단으로 채택하고 있는 방법은 문법적
탐구이다. 여기서 문법은 우리 언어의 사용 및 그와 관련된 모든
언어적, 비언어적인 실천적 관행을 지배하는 규칙들을 통칭하는
28비트겐슈타인『철학적 탐구』 29
표현이다. 문법적 탐구는 기본적으로 철학적 혼란을 일으키는 여
러 낱말들이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로 쓰이고 있는 다양한 양상
들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서 그러한 표현들이 가
지고 있는 심층적 문법들이 드러난다.
한편으로, 문법적 탐구는
기술(description)의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지며, 그런 점에서 가설적인 이론 구축을 통해 현상의 설명을 목표로 하는 경험과학
의 방법과 대비된다. 앞서도 언급되었듯이 철학은 경험 과학과
달리 새로운 정보나 진리의 발견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철학적
이론의 구성을 통하여 문제의 해결을 꾀하지도 않는다. 철학적
문제는 그 성격상 언어의 오해로부터 기인하는 것인 만큼, 그 오해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해소된다. 따라서 철학은 곡해된 낱말
이나 개념들에게 원래의 쓰임새를 복원시켜 줌으로써, 철학적 문제를 해소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에서의 언어관이 가진 문제점을 비판한다. 『논고』에서는 언어가 본질적으로 단일한 논리 구조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며, 언어의 기능은 사태를 기술(describe)하는 것이라고 전제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언어의 본질은 깊숙이 숨겨져 있으며, 분석적 방법을 통해 발견해야 하는 어떤 ‘숨은 구조’로 이해된다. 이는 ‘경외심이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을 통해 개별적 사물의 공통 본질, 즉 이데아를 탐구하려 했던 플라톤의 태도와 유사하다.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많은 철학적 문제는 우리가 보편적 본질을 찾으려는 일반성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은 모든 아름다운 개체가 공유하는 공통의 본질을 전제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다. 『논고』의 비트겐슈타인도 이와 비슷하게, 명제의 논리적 분석을 통해 모든 명제를 관통하는 일반 형식을 발견함으로써 ‘언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 했다.
반면, 『탐구』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의 단일한 본질이나 논리 모형을 찾으려는 시도를 포기한다. 대신, 그는 언어의 실제 사용 맥락과 다양한 기능에 주목한다. 언어는 단일한 논리 구조가 아니라 다양한 실천적 활동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표현의 의미는 그것이 사용되는 구체적 맥락 속에서 결정된다. 따라서 언어의 작동 방식은 이미 드러나 있으며, 분석을 통해 숨겨진 본질을 찾아낼 필요가 없고, 단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필요만 있다(§126, §129).
『논고』적 언어관의 대표적 예로 비트겐슈타인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언급하며 비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언어의 기능을 기술적(descriptive) 측면으로만 이해하고, 언어의 의미를 단순히 낱말과 대상의 지시적 관계로 파악한다. 예를 들어, 대상을 가리키며 “이것은 사과이다”라고 말하는 **지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를 통해 언어를 학습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비트겐슈타인은 지시적 정의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학습자가 자신이 수행하는 행위가 대상을 명명하는 특정 언어 놀이임을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예컨대, 빨간 사과를 가리키며 ‘사과’라고 배울 때, 그 행위가 단순한 지시인지, 색깔을 나타내는 것인지, 아니면 기능이나 용도를 나타내는 것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다른 낱말의 도움을 빌려 정의를 명확히 할 수 있지만, 결국 이러한 낱말 역시 이미 언어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알고 있어야만 한다.
결국, 지시적 정의는 의미의 단일한 기초가 될 수 없으며, 이름-대상 관계 자체도 단순한 지시적 대응만으로 확립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26-30). 이는 『논고』식 언어관, 즉 언어의 숨은 본질과 단일한 논리를 전제로 한 접근의 한계를 드러낸다.
언어가 어느날 없어진 세계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옴 그럼에도 신은 다시 등장한다는거임 그게 어떤형태든 초월적관점에 대한 원시적 수렴자리로써 등장함 인간이 손이 있고 혀가 있고 전두엽이 발달했고 지성을 획득하고 언어를 만들면 필연적으로 수렴함 그리고 그게 지금의 기독교적 유일신의 개념이 아닐지라도 신학적 서사가 다를지라도 인류가 문명의 형태를 갖춘다면 나타남
하늘 = 엄밀히 따지면 빛의 산란과 구름이주는 공간감으로인해 천장이 있다고 느껴짐 하지만 한편으론 무한히 커보임 => 초월적인 관점으로 추상화되어 수렴함 문명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부분: 하늘에계신 아버지... 옥황상제, 태양신, 하느님, 천지신명등
그리고 그건 인간이 지성을 획득함과 동시에 생기는 부분임 이건 선험적으로 알수있다는 개념과는 다르고 표상의 개념도 아니며 무의식도 아님 난 이 신의 개념이 등장하는걸 문명의 필연적 수렴이라고 부르고 그 발생기원을 개인의 전언어적 흐름층이라고 부르기로 함
어느문명이든 문명을 이루면 국가의 형태가 되고 신의 개념이 생기며 결혼제도나 성인식따위가 생기고 근친이 터부시되는 한편 왕족은 근친혼을 하기도 하고 다시 유전흐름이 열화되어 근친혼이 사라지기도 하며 왕조가 바뀌기도 함 이 흐름들은 모든 문명 대부분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남 이게 역사의 필연적 수렴에 의한 흐름임 인간에게 주어진 환경이 발산의 해공간을 좁힘
여기까지만 봐도 내 관점에서 보면 언어가 진리를 갖지 못한다느니 지시적 대응이니 이데아니 하는것들이 내 체계에서 전혀 다른방식으로 설명될거란걸 유추 할 수 있을거임 각자가 다른층에서 설명할 뿐 임
레이어가 나뉘어 보임 ㅇㅇ
갑자기 저러니까 인공지능 이용한 거 같다 싶네 그러므로 안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