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놀이와 사용으로서의 의미 개념을 통해 비트겐슈타인이 의도하는 바는, 그가 반대하는 주장과 대비하여 살펴볼 때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언어를 구성하는 낱말이나 문장이 어떻게 의미를 갖는가는 여전히 중요한 탐구 과제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답변은, 언어 이해를 우리의 언어 활동에 수반되는 심리적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말을 하거나 듣고 읽을 때, 마음속에서 사용된 낱말의 의미를 ‘뜻하거나 포착하는’ 어떤 심적 과정이 진행되며, 언어 이해는 이러한 내적 과정의 문제라는 것이다. 경험론자 로크의 경우, 낱말의 의미는 화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심상(image)이나 관념과 같다고 보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낱말을 듣고 이해할 때 특정한 심적 이미지를 떠올리는 등 심적 상태에 처하게 되고, 이러한 심리적 과정이 우리의 이해를 구성하게 된다. 의사소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화자가 청자에게 낱말이나 문장을 발화한다는 것은, 마음속의 관념이나 생각을 외부로 표현하여 청자가 동일한 관념이나 심상을 갖도록 유도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따라서 어떤 낱말이나 문장을 뜻하거나 이해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내적 심적 상태와 관련된 문제가 된다.
비트겐슈타인은 의미 이해에 대한 이러한 심성주의적(mentalistic) 입장에 반대한다. 그는, 어떤 낱말이나 문장을 통해 의미를 뜻하거나 이해하는 것이 내적 심리적 상태나 과정과 관련되지 않으며, 의사소통의 목적 또한 청자의 마음속에서 의미를 포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의미 이해는 결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심적 과정이 아니다(§154).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안다”, “이해하다”와 같은 개념은 의식적 심리 상태를 기술하는 개념과 문법적 역할이 전혀 다르다. 어떤 낱말이나 문장을 이해했다고 말할 때, 이해라는 개념의 문법적 역할은 마음속에서 발생한 내적 과정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해당 낱말이나 문장이 속한 다양한 언어 놀이 속에서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획득했음을 나타낸다(§199).
물론, 우리가 어떤 낱말을 듣거나 사용할 때 특정한 심상이나 경험이 동반될 수는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러한 심상이나 경험으로부터 언어 표현의 의미를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그것들이 의미나 이해를 구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어 놀이는 규칙에 의해 지배되는 활동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표현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다양한 언어 놀이 속에서 그 표현의 사용과 관련된 규칙을 터득했음을 의미한다. 즉, 언어 이해는 내밀한 심리적 과정이 아니라, 기술의 습득이나 실천적 능력으로서 이루어진다. 표현의 의미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용과 관련된 규칙을 따르는 능력으로 나타난다.
규칙은 본질적으로 공적인 성격을 갖는다. 누군가가 규칙을 이해했다고 할 때, 그러한 이해는 외부로 드러난 규범에 의해 평가되고 인정받아야 한다. 다시 말해, 언어 이해 능력은 우리가 어떤 낱말을 사용하는 방식, 타인이 그 말을 사용할 때 우리가 반응하는 방식, 그리고 누군가 그 낱말의 의미를 물었을 때 우리가 대답하는 방식과 같은 행위들을 통해 드러나고 평가된다.
동시에, 규칙 따르기는 공동체의 확립된 관행을 전제로 한다. 규칙은 그것을 따르는 우리의 실천적 관행, 적용, 사용과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관습 내에서 규칙적인 사용이 없으면 규칙도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도로 표지판이 방향을 알려주는 기능을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그 표지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회적 관행이 잘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사적인 규칙 따르기는 불가능하다. 즉, 오직 한 사람만 따르는 규칙, 혹은 단 한 번만 따르는 규칙은 존재할 수 없다. 의미 이해가 규칙의 파악에 달려 있다면, 규칙 이해는 화자의 내밀한 심리 상태나 심적 과정에 의존할 수 없다.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올바른 규칙 따르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할 수 있는, 본질적으로 규범적인 행위이다. 규칙의 파악을 단순한 심리적 과정으로 본다면, ‘규칙을 따른다고 믿는 것’과 ‘규칙을 따르는 것’을 구분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202).
그렇다면 규칙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이며, 올바른 규칙 따르기는 어떻게 분간될 수 있는가? 언어는 우리의 삶의 활동과 분리되어 추상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영역이 아니라, 삶 속의 행위와 활동과 얽혀 있으며, 오직 그러한 맥락 속에서만 의미와 내용이 주어진다. 하나의 낱말은 언어 놀이의 일부로서 사용 맥락 속에서 의미를 획득한다. 따라서 언어는 단순히 문자나 소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결부된 활동이다. ‘어떤 하나의 언어를 상상한다는 것은 어떤 하나의 삶의 양식을 상상하는 것이다.’(§19) 즉, 언어는 우리의 삶의 양식(form of life) 일부를 구성하며, 그 언어 세계에 속한 사람들의 삶의 양식을 표현한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에서 언어는 더 이상 세계를 그리는 도구가 아니라, 언어와 삶의 양식 간의 관계를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삶의 양식은 우리가 공유하는 언어적·비언어적 행동, 관행, 전통, 자연적·생물학적 성향 등을 포괄하며, 이러한 일치는 언어 사용과 의사소통의 전제 조건이다. 우리는 이러한 삶의 양식의 기초적 일치와 조화를 바탕으로 언어를 습득하고 사용할 수 있으며, 동시에 삶의 양식은 언어 사용과 이해의 가능성과 정당화를 제공한다. 그러나 삶의 양식 자체는 주어진 현상으로서, 설명이나 정당화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규칙 따르기는 특정 삶의 양식에 입각한 언어 놀이를 배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올바른 규칙 따르기란, 삶의 양식에 기반한 언어 놀이의 일상적 관행에 따라 반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2’ 수열과 관련된 관행이 있을 때, 누군가가 “1000 다음에 무슨 수가 와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관행에 따라 ‘1002’라고 답할 것이다. 이런 일상적 사실이 바로 규칙 따르기의 본질이다. 따라서 왜 이런 언어 놀이를 수행하는가에 대한 설명이나 정당화는 필요하지 않다.
언어의 오해에 기초한 잘못된 철학적 문제는 특히 우리의 심리적 개념과 관련된 영역에서 가장 광범위하고 뿌리 깊게 나타난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 1부 후반부와 2부에서 심리적 개념의 해명과 분석에 가장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그의 철학적 심리학은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구분에 입각한 정신의 본성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으려는 시도이다.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이원론적 전통에 따르면, 인간은 마음과 육체가 결합된 존재이다. 인간을 마음과 육체의 합성물로 보는 사고는 고대와 중세를 거쳐 종교적·철학적 전통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지만, 이를 철학적 체계로 가장 세련되게 정리한 것은 데카르트였다.
데카르트의 이원론에서 마음과 육체는 상호 독립적이지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별개의 실체로 간주된다. 이러한 이원론은 수많은 철학적 비판을 받았다. 예를 들어, 심적 실체를 어떻게 개별화할 수 있는지, 서로 다른 두 실체가 어떻게 인과적으로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 등이 문제로 제기되었다. 오늘날 데카르트의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거의 없지만, 그가 제시한 마음과 몸의 개념적 이원성 구조가 완전히 극복되었는지는 여전히 논의의 여지가 있다. 많은 심리철학자, 심리학자, 신경과학자들은 데카르트적 이원론을 거부하면서도, 논의 과정에서 여전히 그의 개념적 구성을 일부 수용하는 듯 보인다. Hacker는 이 점을 지적하며, 비록 정신/육체 이분법은 거부되었지만, 그 핵심 구조는 뇌/육체라는 구분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고 진단한다. 개념적 이원성에 대한 본격적 심리철학적 논의는 J. Searle의 『The Rediscovery of the Mind』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데카르트적 개념적 이원성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철학자로 평가된다. 먼저 마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지배하는 듯 보이는 이원론적 사고의 전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마음은 오직 반성(introspection)을 통해서만 들여다볼 수 있는 내면적이고 은밀한 사적 공간이다. 외부 세계가 3인칭적 관점에서 접근 가능한 공적 세계라면, 내면적 정신 세계는 철저히 주관적 경험의 세계이다. 예를 들어 ‘내가 아픔을 느낀다’고 할 때, 그 아픔은 오직 경험의 주체인 자신만이 느낄 수 있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반성은 이러한 사적 경험을 인식하는 원천으로 여겨지며, 자신이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지식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문제는 타인의 심리적 상태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타인의 내면을 직접 들여다볼 수 없으므로, 오직 그들의 행동을 3인칭적 관점에서 관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심적 상태를 추론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추론은 단순한 연역이나 귀납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타인의 행동을 유비적으로 연결하는 가설적 과정일 뿐이다. 데카르트적 관점에서 심리적 세계는 외부 관찰과 철저히 분리되어 있으므로, 타인의 내밀한 심리 상태는 겉으로 드러난 말과 행동으로부터 완전히 위장될 수 있다. 결국 심리 상태와 행동 사이의 관계는 우연적이며, 타인의 행동으로 심리 상태를 추측하는 것은 불확실한 가설적 유비 추론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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