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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 인권은,
과연 어디까지 실재하는 권리인가?

당신의 인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80년이 채 안 된 개념에권리라는 절대적 지위를 부여해왔다.

그런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신의 인권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인권이란 모든 사람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권리라고 명시되어 있다.

자유, 사회, 평등, 생명권이라고 명명된 네 가지의 권리 등등 하품 나오는 소리는 갖다 치우고, 툭 터놓고 말해보자

 

일단, 여기서 나는 감정을 건드리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 사고를 대체해버린 구조를 문제 삼고 싶다.

 

인권이란 것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구상에 뿅! 하고 나타난 것처럼 자연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1948년 유엔에서 나온 세계인권선언을 기점으로

인류가 발명한 개념이다.


결국 역사적 합의가 만들어낸 허구적 상징에 불과하단 소리다.

그렇다고 이게 잘 지켜지느냐?

그렇게 생각한다면 머릿속에 잔뜩 피어 있는 꽃밭을 예초기로 싹 다 밀어버려라

우리가 한강의 처절한 문장으로 점철된 인권 신장 찬양 글을 보고, 침대에서 포근한 이불을 덮으며 눈물 콧물을 훔칠 때,

바로 그 시간에도 아프리카의 코발트광산에서는 아직도 아동노동착취가 일어나고 있다.

결국 인권이란 국가, 시장, 제도안에서만 임시로주어지는 알량한 면피에 불과하다.

 

그런데 이 개념이 등장하자마자 인간들은 인권을 어디에나 적용해보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하다.
마치 갓 산 스마트폰을 손에 쥐고, 별 쓸모도 없는 기능까지 죄다 눌러보며새로운 가능성에 취해 있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어디에 내려놓아도 기스라도 날까 노심초사하고, 사소한 충격에도 호들갑을 떠는 태도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인류가 제국을 건설하고 오늘날불가사의라 불리는 문명적 성취를 쌓아 올리던 시대에는 인권이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인류는 발전했고, 역사에는 수많은황금기가 존재했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부재한 상태에서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의 인권은 더 이상 제도도 규범도 아니다.
신앙에 가깝다.


인권의 종교화  


아까 언급한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이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물론 문학에 대한 어휘력은 찬양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녀의 문장은 처절하고, 참혹하며, 독자의 감정을 정확히 찌른다. 문제는 그 감정이 사고로 이어지지 않고 집단적 도덕 도취로 변환된다는 데 있다.

사람들은 가슴이 아파졌다는 이유만으로 인권신장열사에 빙의 한다.
그 결과 인권은 성역이 되었고, 누군가이건 좀 과한 것 아닌가?”라고 묻는 순간, 그는 토론의 상대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못난 인간 쓰레기가 된다.


인권이라는 카드를 꺼내는 순간 대화는 끝난다.
상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아니그런 뜻은 아니고…”라며 말을 흐릴 수밖에 없다.
이 구조에서 무슨 토론이 가능하며, 무슨 사고가 확장될 수 있겠나?


감정에 점령된 인권은 더 이상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그저 사고를 정지시키는 무기로 기능할 뿐이다.

인권은 역사적으로 착취당하던 약자들이 만들어낸 자기보호적 정당성이다.


약자는 대체적으로 수적 다수를 이루고, 그 다수는 서로를 선동함으로써 하나의 규범을 발명했다.
우리는 이런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선언 말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지배층은 이 에너지를 정확히 포착했다.
약자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인권이라는 무기를, 지배를 정당화하고 투표를 확보하는 데 사용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 결과 인권은 더 공고해졌고, 동시에 비판 불가능한 영역으로 승격되었다.

이제 인권은 약자의 방패이자, 기득권의 면죄부가 되었다.

 

인권의 한계와 위선은 이미 너무 명확하다.
앞 전에 꺼낸 아프리카 코발트 광산의 아동 착취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곳은 인권유린의 최전선이지만, 비밀도 아니다.
이미 수차례 보도되었고, 국제사회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


코발트는 배터리의 핵심 소재이고, 선진국들의 산업 기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돌아오는 대답은 뻔하다.
그럼 네가 돈 들여서 정상화해라.”

하지만 그정상화에는 교육, 산업, 치안, 행정, 고용, 그리고 군사적 개입까지 포함된다.
막대한 비용, 정치적 리스크, 국제적 비난, 군사 개입이라는 최소 네 가지 악몽을 동시에 떠안으라는 말이다. 간단히 생각해서 이 정도이고, 꼬투리를 잡으려면 지옥 끝까지 물고 늘어질 수도 있다.


결국 경제가 윤리를 이긴다.
그리고 인권은 침묵한다.

 

값싼 동정심과 감정의 호소로 소비된 인권은,
약자들이 스스로를 선동하여 급조된 방어기제가 지닌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권을 가장 크게 울부짖는 인간일수록
그 방어기제를 가장 과도하게 펼쳐 보이는 약자임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인권은 이제 힘이 아니다.
면책용 언어이자 감정적 협박으로 전락했다.

 

내가 생각한 해답은 이것이다.
인권을 폐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우자는 멍청한 소리나 하려고 여기까지 늘어놓은 것이 아니다.


바로 인권을 다시 도구로 돌려놓아야 한다.

인권은 공감의 언어가 아니라, 비용·책임·결과가 명시된 계약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

모든 인권을 동일 선상에 올려놓는 사고를 폐기해야 한다. 충돌하는 권리에는 우선순위가 필요하다.


실질적 개입 의지 없는 인권 발언은 정치적 선동으로 분류되어야 한다.


인권을 말하는 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비용과 책임을 강제해야 한다.


인권은 신앙이 될 때 가장 위험 해진다.


올바른 사고의 대상이 될 때에만, 비로소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이런 사고 없이 그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내놓으라는 인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권리를 당당하게 내놓으라고 말할 수 있도록, 책임을 갖고 존재하게 만들어야 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게 만드는 것,
그게 바로 우리가 인간으로서 권리를 요구할 수 있게 만드는 최소한의 철학이다.



출처 - 내 뇌

승환의 ㅂㄹㅊ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