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에서 인간관계는 종종 지배와 복종의 논리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상대보다 우위에 설 수 있을지를 본능적으로 가늠한다. 나이, 직급, 성격, 실세 여부, 신체 조건, 그 순간의 분위기 등 다양한 요소들이 계산의 재료가 되고, 상대가 만만하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공격에 들어간다. 하지만 그 공격은 결코 노골적이지 않다. 거의 대부분이 ‘명분’이라는 포장을 두르고 다가온다. 정당한 충고, 조언, 지도, 전통, 관행 등의 형식을 띠기에 겉으로는 저항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상대를 노리는 방식은 ‘조인다’, ‘말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집요하고 간접적이다. 표면적으로는 선의를 가장하지만 실제로는 상대의 자존감과 주체성을 서서히 침식시키는 전술이다.
이러한 명분은 대부분 애매하고 모호한 상황에서 더욱 힘을 발휘한다. 일이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있거나, 정답이 없는 업무나 인간관계에서, 혹은 곡선이 많은 정서적 흐름 속에서 명분은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그런 명분조차 만들기 어려운 경우엔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코칭이나 충고의 형태로 위장된다. 겉으로는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대를 길들이고 통제하려는 전략이다.
상대가 약할 경우, 이러한 의도는 상대적으로 노골적으로 드러나지만, 상대가 대등하거나 만만치 않을 경우에는 전략이 훨씬 교묘해진다. 말 한마디, 표정 하나, 뉘앙스 하나에 치밀한 계산이 깃들고, 상대가 알아차릴 듯 말 듯한 방식으로 지구전을 펼친다. 반응을 보이면 ‘예민하다’, ‘쪼잔하다’는 프레임에 갇히고, 침묵하면 점점 더 갉아먹힌다. 이때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식의 공격이 항상 상대적인 상황 속에서 이뤄지기에, 피해자에게는 절대적인 선택이 강요된다는 점이다. 대부분은 피로와 혼란을 피하기 위해 침묵하거나 순응하고, 가해자는 그 침묵을 근거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결국, 권력의 작동은 드러나지 않게, 그러나 견고하게 완성된다.
이러한 구조는 단지 인간관계의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조직 내 위계 구조, 상하 관계에서도 똑같이 반복된다. 선배나 상사는 하급자에게 집요하게 고통을 가한다. 명분은 언제나 존재한다. 관행이라는 이름, 문화라는 이름, 혹은 ‘일을 위한 일’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 폭력이 계속된다. 하급자는 처음엔 반발심을 품지만, 고통이 지속되면 생존을 위해 서서히 저항을 멈춘다. 인간의 뇌는 일정 수준 이상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한 전략으로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견디며 순응한 하급자는 언젠가 상급자에게서 느닷없는 따뜻함을 받게 된다. 술자리에서 건네는 위로, 작은 배려, 말 한마디의 관심. 이것이 바로 ‘쏘주의 어루만짐’이다. 이전의 억압은 잊히고, 마치 상급자가 ‘그래도 나쁜 사람만은 아니었다’는 환상을 품게 된다. 폭력과 착취로 시작된 관계는 이렇게 ‘정’과 ‘정당화’라는 이름으로 완성된다. 원칙이 구렁이 담넘어가듯 깨지는 것이다. 불법이 시간이 흐르며 합법처럼 느껴지고, 지배는 무상으로 정당화된다. 이런 식으로 한국 사회는 폭력과 모순을 삶의 일부로 통합해 버린다.
이러한 기술은 학습된 것이 아니라 마치 본능처럼 작동한다. 사람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사회화된 결과,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채 상황과 분위기, 관계와 감정을 교묘히 읽고 계산하며 움직인다. 대상에게 수많은 상대적인 조건들을 깔아놓고, 그 위에서 하나의 절대적인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방식. 그 선택은 곧 상대의 승인을 의미하고, 그것을 근거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며 모순을 공짜로 성립시킨다. 미국의 싸이코패스들이 보이는 조작의 전형이라 말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그것이 일상의 문화로 뿌리내려 있다.
이 기술은 상황을 교묘히 설정하거나 흐름을 잘 읽어내어 작동한다. 예컨대, 자식이 엄마 지갑에서 돈을 몰래 가져갔다가, 명절날 친척들 앞에서 “아, 나 저번에 옷 살 때 엄마 지갑에서 좀 썼어”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말하는 순간은 부드럽고 자연스럽지만, 듣는 이는 순간적으로 수많은 조건들을 고려해야 한다. 분위기, 체면, 관계, 감정의 흐름 등 상대적인 요소들 속에서 절대적인 판단을 내려야 하며, 대부분의 경우 그 상황에 떠밀려 그냥 넘어가게 된다. 그렇게 절도로 시작된 일이 분위기에 의해 은근슬쩍 넘어가고, 자식은 정당성을 얻는다.
한국 사회의 많은 인간관계는 바로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집요하게 계산된 관계 설정, 알 듯 말 듯한 애매한 공격, 그리고 상대가 반응할 수 없도록 만드는 분위기 연출. 그 모든 것은 일상 속에 스며든 비가시적 폭력이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지쳐가고, 자신의 시간을 잃어버리며, 언젠가 자신도 그런 구조의 일부가 되어 누군가를 조용히 지배한다.
결국, 그 구조 안에서 인간은 점점 더 감정을 잃고, 판단을 잃고, 자신을 잃는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마치 정당한 듯, 정상인 듯 작동하기 때문에 더욱 무섭다. 겉보기엔 평범하고, 심지어 따뜻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잠식당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 침묵 속의 명분이, 지배의 부드러운 말투가 결국은 사람의 내면을 파괴한다. 한국 사회가 그렇게 사람을 삼키고 있다.
어느정도의 깨달음에 이르게 되면 인간 사회와 동떨어진 곳에서 유유자적 하면서 사는 이유가 있죠. 구조 자체가 폭력이고 억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