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상징계가 형해화된 경험이 없기 때문임.
인간의 의식은 어린 시절부터
누적되어가는 세계와의 작용, 반작용을 통해
상징계라는 막을 형성함.
이 막은 세계의 본질도, 자신의 본질도 아니지만
그 사이에서 순수한 자아를 인식하지 못하고
오로지 매개물을 통해서만 발현하는 자아가
정념에 따라 형성한 인식의 생산물임.
즉, 자아가 발현하고 형성한
매개물(표상)들 사이의 관계,
의미부여 등이 의식이 도달할 수 있는 인식천장이
되어 버리는 셈임.
예를 들면 부모와의 애착이나 기억,
사회에서의 자신의 지위나 경험한 사건,
특정 성향이나 기호 등에 대하여
자신만이 형성한 고유성을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재료로 삼는 것임.
(흔히 이 부분에 대해서 개인이
자신의 의지가 투영된 비율보다
운명 및 환경의 구조적 필연성이 더 강하다고
느끼기에, 현대인들이 기존까지의 인생패턴과
전혀 다른 자아를 찾겠다는 반항적 현상이 일어남.
이 부분은 상징계에 잠식되어 자아가 주체적으로 상징계를 인지, 활용하는 것이 아닌 비인식에 따른 상징계의 구조적 강압에 대한 자아의 실체적 저항이라고 보여짐.
즉 현실자아에 대한 반항으로 추구하는 대안자아의 실체라는 것은 결국, 현존하는 표상(저항적 의지의 매개물이자 도착(到着)대상)과 호도되기 매우 쉽다는 의미임)
이 과정에서 자아는
지능발달이 완성되지 않은 유아시절부터
무의식적으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이미지(표상)를 구축해나가기 시작함.
그 표상의 총체적 깊이와 구체성에 발맞춰
세계에 대한 인식 역시 자아의 정념에 합목적적인
이미지 층으로서 구축되며 이 층위가 하나의
계(네트워크)를 형성함.
이것이 바로 상징계임.
개인적 추측으로는
정신해리 증상(정신분열, 다중인격) 의 경우
자아의 무의식적인 도착(到着)의
범위와 통일성과, 도착대상인 상징계 내에서의
내부정합성이 파괴되며
다양한 인격으로 도착동력이 폭주한다고 보여짐.
단, 일반인들의 경우는 이러한 도착행위가
어려서부터 견고하게 형성된 상징계가 허용하는
정합성과 통일성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고,
상징계가 죽을때까지 주체의 정신활동의
전제로서 기능하게 됨.
상징계라는 것은 하나의 장막임.
그 장막이 대상화되기는 커녕
대부분의 경우 정신활동이 일어나는
의식무대의 끝이자 인식되지 않는 기저로서 작용함.
이러한 상징계라는 장막 뒤에서
상징계를 구축하는 개인의 정념 조차도
일상적인 정신활동 과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인식되기 어려움.
그런데 자아(관찰자)라는 것은
그런 정념이나 정신이 배열하고 배열되는
동력이나 패턴 조차도 대상화하는 실체임.
(심지어 이 층위조차 자아의 온전한
본질이라고 동일시할수는 없음)
그렇기에 상징계라는 장막이 무너지는
경험이 없는 이상,
자아의 존재는 오로지 매개물 만을 통해
어렴풋이 그 그림자를 느끼고 추측하거나
그냥 환상이라던지, 없다고 치부할 수밖에 없음
자아는 세계를 입을수밖에 없음.
세계를 전부 벗어버리고 나라고 불리는 의지의 존재가
결국 무엇이 남느냐, 그 테두리를 보지 못하는 이상
자아의 존재는 어렴풋한 존재의 그림자로서만
흐릿하게 일렁일 뿐임.
본질적으로 우리가 믿는 자아라는 것은 결국 인연과 인연이 모인 현상일뿐
이보시오 말이 너무 어렵소
제대로 하려면 그림이나 영상으로 도식화해서 설명해야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