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사고와 행동의 과정의 선후험적 논변에 대한 의견은, 과정은 후험적 논제로 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 이유는, 과정을 통한 결과는 후험성을 내포하나, 어떠한 과정 자체의 후험성은 인정하기 어렵다. 그렇기에 ‘과정‘이라는 것은 선험적 종합명제로서 설명 가능하다. 단순한 예시로서 행복해지기 위한 과정은 경험을 한 상태(후험적)이라고 형용할 수 없다. 극단적인 예시로서는, 인간의 삶이란 죽음을 향한 과정이다. 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과정의 시작이므로 후험적 명제라고 칭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내가 생각하는 행복의 추구란 선험적 종합 명제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에서 볼 수 있는 언어게임이론을 예시로서 어떠한 것에 대한 가치를 논할 수 있다. 가치는 게임이론에서 다뤄지는 상황과 맥락에 의해 변화하는 성질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예시로서 ‘다이아몬드‘와 ’금’은 현대 문명이 통하는 장소에서 ‘가치’있는 것으로서 통용되지만, 문명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나 외계의 장소에서는 그저 하나의 ‘물체’로서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리‘의 가치는 어떻게 형용 되는 것인가? 진리란 특수성이 통용될 수 없는 것이지만, ‘가치’라는 고정될 수 없는 값을 가지는 명제는 어떻게 형용해야 맞는 것인가? ’진리’란 ’진리’일 수 있는가?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이루어 진 바가 있다. 인간의 이성으로 신의 존재나 물자체 등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은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 그는 이 책을 통해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 주목하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는데, 물자체와 신, 그리고 대상의 내면(진짜 생각)의 생각은 알 수 없는 혹은 없다는 것. 이는 다시 말해, 우리가 ‘침묵’해야할 주제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변적 주제와 존재에 대해서 무엇을 알 수 있는지 논할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이들에 대한 숭배와 기도, 찬양은 미신과 오인으로 부터 발생하는 ‘착각’에서 비롯한 행위를 뜻한다. 이러한 사변적 주제들 중 하나라도 ‘진리‘라면 나는 모든 ‘진리‘를 다시금 의심할 수 밖에 없다.
- dc official App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