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에 기반한 인식론은, ‘대상’에 대한 논의를 함축시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형이상학적 인식론과 실재 대상에 대한 논의는 다른 차원의 논의입니다. 예시로서 선험적 종합명제의 경우 형이상학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간을 다시금 예시로서 말 하자면, 이는 선험적으로 분류한 칸트였지만, 지금 이 시간속에서 살아가는 ‘나’는 선험적 존재인가? 라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험적 존재의 한계를 논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존재론적 한계를 논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 전에 이성의 선험성을 논한 바 있습니다. 제가 바라보는 이성은 선험적이며 후험적입니다. 선험성을 전제로 후험적인 ‘경험’을 토대로 무언가를 판별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 글의 논지는 이러한 철학적 요소가 아닌 존재론적 선험성에 대한 얘기입니다. 

존재의 한계는 세상의 한계이며,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가치중립적입니다. 이 법칙은 ‘나‘의 존재의 기원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나‘의 존재는 세상과 같습니다. 세상은 선험적이지만, 선험적 존재와 후험적인 존재들의 집합입니다. 

시간과 인과율 그리고 존재의 집합.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는 즉, ‘나’는 세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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