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두쫀쿠’, ‘MBTI’에 대한 스몰톡을 다룬 글에 이어서,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스몰톡 관행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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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유행하는 주제로 가볍게 대화를 시작하는 것을 넘어서, 타인의 외모·조건·위치에 대한 평가를 스몰톡의 형태로 아무렇지 않게 꺼내는 문화가 광범위하게 존재한다. 더 나아가, 그러한 평가를 인사치레로 포장하며 상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말들까지 자연스럽게 오간다. 서구권에서는 명백한 결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말들이 한국에서는 ‘정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악의는 없잖아’라는 이유로 쉽게 정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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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가까운 친척을 오랜만에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듣는 말이 이런 경우는 드물지 않다. “어휴, 이제 염색 좀 해야겠다. 흰머리가 다 보이네.” “살이 좀 찐 것 같다?” 혹은 “너 예전보다 얼굴이 피곤해 보인다.” 이런 말들은 안부가 아니라 상태 점검과 평가에 가깝다. 어린 시절에는 “이리 와 봐라. 누구랑 키 좀 비교해 보자.”, “쟤는 너보다 훨씬 크네.” 같은 말들이 자연스럽게 오간다. 이때 아이의 의사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비교 자체가 놀이이자 대화의 소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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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 질문의 형태만 바뀔 뿐 구조는 같다. “대학은 어디 갔냐?”, “취업은 했냐?”, “아직 결혼 안 했어?”, “너 동기 누구는 벌써 집 샀다던데?” 같은 말들은 관심을 가장한 사회적 위치 확인이다. 상대가 불편함을 느끼더라도, 이를 문제 삼으면 “그냥 하는 말인데 왜 그렇게 받아들이냐”는 반응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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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화가 특정 세대나 일부 무례한 개인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여러 사례에서 확인된다. 아래에 언급된 우원재 씨의 영상은 이를 매우 극적으로 보여 준다. 외국인 취재자인 찰스 맨슨이 ‘한국인들이 왜 불행한가’를 주제로 인터뷰를 진행하는데, 한국의 정신과 전문의라는 사람은 만남의 첫마디로 “외모가 바람둥이 소리를 들을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실물을 보니 납득이 된다”고 말한다. 카메라 앞이라는 점, 상대가 초면의 외국인이라는 점, 그리고 직업이 정신건강 전문가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놀라운 장면이다. 이를 들은 찰스 맨슨이 난감해하는 반응은 과민함이 아니라, 문화적 예절 기준의 충돌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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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면이 중요한 이유는, 이 발언이 ‘특이한 개인의 실수’로 소비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과거 이재명 대통령이 외국 정상에게 외모 평가를 했다가 논란이 되었던 사례를 떠올려 보면, 한국 사회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외모를 언급하는 행위는 특정 직업군이나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상당히 보편화된 대화 관행에 가깝다. 문제는 이러한 관행이 반복될수록, 외모를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아예 대화의 출발점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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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일상적 외모 언급은 한국 사회의 외모지상주의와 성형수술 강박을 강화하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다. 외모가 늘 첫마디의 소재가 되는 사회에서는, 외모 관리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적 의무가 된다. ‘관리하지 않으면 무례한 사람’, ‘자기 자신에게 신경 안 쓰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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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에 대한 스몰톡도 구조는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에서는 어색함을 깨기 위한 첫마디로 유행하는 드라마, 예능, 밈, 앱, 음식이 자주 호출된다. 문제는 여기서 “나는 관심 없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이 자연스럽게 사회성 없는 사람, 분위기를 깨는 사람으로 분류된다는 점이다. 유행을 좇을 자유는 존중되면서도, 유행을 무시할 자유는 거의 허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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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다양성에 대한 존중 부족으로 이어진다. 모두가 같은 화제를 공유해야만 ‘정상적인 대화’가 성립하는 사회에서는, 관심사의 차이나 무관심 자체가 결함처럼 취급된다. 결국 스몰톡은 관계를 부드럽게 만드는 장치가 아니라, 개인을 빠르게 분류하고 평가하며 줄 세우는 기능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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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스몰톡은 겉으로는 가볍고 친근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타인의 외모와 삶의 조건을 아무렇지 않게 평가할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러한 대화 방식이 일상화될수록, 개인은 쉬지 않고 비교당하고 점검받으며, 그 피로는 사회 전체의 불행으로 축적된다.
굿굿
에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