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누구나 돈이 많으면 강남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한다."라는 명제가 어느덧 우리 사회를 의식에서부터 무의식까지 지배하게 된 듯하다. 이와 다른 욕망은 일종의 '정신승리'나 '자기합리화'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된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실은 강남을 욕망하며, 이 욕망은 어떤 식으로든 부정되어서는 안된다. 만약 여기에 '약간의 이의'라도 제기하면, 그는 '긁혀서' 자기 변명만 늘어놓는 인간으로 취급된다.
당신이 누구든,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강남에 살고 싶어하고, 에르메스와 포르쉐를 갈망하며, 자녀를 의대에 보내고 싶어해야 한다. 만약 이러한 욕망에 딴지를 건다면, 당신은 그냥 돈이 없어서 그러는 거라고 여겨질 뿐이다. 당신이 결혼해서 강남에 살며 자녀를 의대에 보내기 위해 유치원 입학 전부터 기획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그러길 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러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삶에는 일종의 위계가 존재하는데, 우월한 삶을 사람이라면, 응당 청담동에서 오마카세를 즐기며 적어도 온 몸에 몇 백만원대의 옷과 아이템들을 걸치고 다니면서 고급 문화를 누리고, 갤러리아 백화점에 오픈런으로 달려가고, 자녀를 사립학교나 국제학교에 보내야 한다. 그러지 못한 삶은 다 돈이 없어서 타협한 한 단계 '낮은' 삶일 뿐이다. 이 위계에는 '바깥'이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 더 우월한 삶과 열등한 삶만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이 관념 안에서 우리 사회란 일종의 '설국열차'와 같다. 설국열차 바깥은 죽음의 땅일 뿐이다. 설국열차 안에서는 꼬리칸과 머리칸 사이의 우열만이 존재해서, 머리칸의 사람은 명백히 행복한 삶을 살고, 꼬리칸의 사람은 바퀴벌레를 먹으며 머리칸을 욕망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다. 그 안에서 삶은 명백히 위계지어져 있어서, 그 위계 외의 다른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우리 사회는 점점 더 그런 '설국열차'식 관념을 강박적으로 강화하고자 하는 것 같다. 사실, 삶은 그러한 방식으로 위계지어지는 것이 아니고, 삶에는 다채로운 가능성들이 있으며, 더군다나 삶의 행복이나 만족이나 가치는 더 복잡하고 개별적일 수도 있다는 여지 자체를 '지우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삶이 '열려 있는' 것이라는 관념 자체를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삶이 획일화된 욕망과 순위에 따라 반드시 '결정'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강박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 강박 바깥에 더 나은 삶 같은 게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의 삶이 희생된 방식과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삶은 있어서는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어릴 때부터 줄에서 오직 더 높은 순위만을 얻기 위해 강박적으로 희생해온 내 삶이 억울해서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삶에는 반드시 위계가 있어야 하고, 희생은 우월함으로 보상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삶이 있다는 걸 인정해버린 순간, 내 삶 전체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내가 살아온 삶을 긍정하고 지키기 위해서 이 획일화된 '닫힌 위계'에 몰두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나는 살면서 하나 고민해봐야 하는 게 있다면, 과연 나의 현실이 '단 하나'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우리 인간은 정말 단 하나의 획일화된 현실의 포로가 되어 살 수밖에 없도록 뼛속까지 만들어져 있을까? 아니면 혹시 나의 현실이라는 건 그저 내가 필요로 해서 '믿는 현실'에 불과한 건 아닐까?
어쩌면 나의 그 현실이라는 것은 그것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살아야할지 몰라서, 어디에서 만족을 느끼고, 무엇을 추구해야 할지 몰라서, 나라는 존재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할지 몰라 말 그대로 절박하게 '믿는 것'에 불과한 현실일지도 모른다. 그저 내 삶의 시간이 모두 그 현실에 희생되어서, 사실은 설국열차 바깥에서 삶이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없을 뿐일지도 모른다. 바깥을 믿어버린 순간, 나의 삶, 나의 시간,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우리가 믿는 현실에 스스로 포로가 되어 살기를 자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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