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철학이라거나 사회철학도 있는 것은 물론 알지.
그런데 철학으로 보기 이전에, 그 밑에 깔린 사회나 사회 인프라가 어떻게 유지되는가.
어떻게 우리사회가 또는 다른 사회들이 유지 발전되었는가
이런 것들을 <개괄>적으로라도 먼저 봐야함.
그 부분만 보아도 해결되는 지점은 있고, 다양성은 기본적인 것들이 먼저 세워진 이후에야 그에 기생하여 펼쳐짐
Ⅰ 배경 및 문제의식
우리사회는 2020년 인구 고점을 찍은 이래 앞으로는 인구가 줄어들 일만 남았다. 합계 출산율 0.7대에 진입했고 현재 인구를 유지하기 위하여는 이민인구를 받지 않는 이상 합계출산율이 4가 되어도 부족하다. 이러한 인구 급감과 나아가 급격한 고령화를 의식한 정부는 노무현 정부부터 공개적 발언으로도 출산을 언급하여왔다. 2024년까지 300~400조를 투입함과 동시에 근래부터는 한 해 80~100조 사이를 오로지 출산과 고령화 대응에만 사용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산율이 일관적으로 반등할 것이라는 흐름은 보이지 않고 외국의 유명 인사와 세계인구학자들은 한국이 망했고, 북한이 남침을 위해 걸어서 들어오기만 해도 통일되겠다고 하는 마당이다.
출산 장려와 고령화 대응의 목적은 사회유지 및 종국적으로는 국민의 생존이다. 고령화 대응은 그렇다치고 사회유지를 위한 출산의 장려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이는 철학으로 해결이 가능한가. 약 5,200만의 국민에게 너희들은 철학이 없어서 그렇다며 철학을 배우라고 권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행정부에 모지리들이 근무하지 않고, 정치인도 모지리 같아 보이지만 모지리가 아니다. 다시 말해, 철학의 영역이 아니라 실제 국민복리에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공무원들 또한 할 수 있는 온갖 것을 다했지만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근본적인 문제가 어디길래 해결이 되지 않는지. 어떤 부분에 집중해야하는지. 그것이 문제이다.
Ⅱ 출산율 개괄과 불안
일단 출산율에 변동이 온 시기를 본다. 합계 출산율은 <1984년 처음으로 2.xx에서 1.xx대로 진입>하였고, <1984년에서 30여년이 지난 2017년까지 1.xx대를 유지>하다가 2018년부터 0.xx대로 진입한다. 주목해야할 지점은 <2002년부터 2017년까지의 합계 출산율은 15년간 1.0~1.2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유지>되었지만, <2015년부터 2023년까지는 그 오르락 내리락이 없고 출산율 감소 일변도>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15년 그 즈음부터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를 개인적으로 생각해봤다. 2015년에 생각나는 것은 정형돈의 무한도전 하차이다. 정형돈은 무한도전에서 줄곧 '우리에게만 너무 가혹하다'면서 호소하기 시작하였고, 곧 불안증세를 보이며 외적으로는 어떤 사고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2016년에 정식으로 하차하였다. 무한도전마저도 2018년 종영을 알린다. 여기서 쉽게 추출할 수 있는 포인트는 <불안>이다.
Ⅲ 원인의 추적
이러한 불안이 언제부터 어떤 원인으로 발생하였는지를 본다. 정형돈은 무한도전 시청자 게시판과 <온라인 등지>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당시 무한도전만큼 모든 국민이 시청하는 예능은 없었다. 1박 2일이 있었지만, 이미 강호동의 탈세의혹으로 4년만인 2011년 나락 가기 시작했고, 1박 2일 시즌2는 시청률이 시즌 1의 전성기에 비하면 반의 반토막도 나오지 않았다.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도 보는 전국구급 예능은 무한도전이었다. 그러한 예능이 과거에는 없었는가? 있었다. 지금도 하고 있는 6시 내 고향, 아침마당, 열린음악회, 연예가 중계, 종영된 가족오락관 등 예능의 분류에 들어가는 프로그램들은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예능 프로그램과 달리 대본 없이 날 것을 추구하는 버라이어티 예능은 2000년대 초중반이 시작이었다. 그 즈음 무한도전과 1박 2일이 시작하였다.
버라이어티 예능은 시청자에게 꾸밈 없는 방송인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호응을 얻었다. 무한도전과 1박 2일은 그러한 버라이어티 예능 중에서도 장수한 편이다. 무한도전은 13년여, 1박 2일은 전성기는 비록 4년으로 짧았지만 아직까지도 방영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무한도전의 정형돈을 보고 있었다는 점을 환기한다. 대중의 시선이 주목된 그 무한도전 프로그램의 맴버들이 마주하는 상황 중 무한도전 시청자 게시판은 온라인 공간인데, 이를 주로 이용하는 사람이 어떤 연령인가. 80대 할머니가 효도폰으로 온라인 공간을 들어서나. 당시 60대 아저씨가? 쉽게 알 수 있듯 <비교적 젊은 연령층>이다. 따라서 pc와 스마트폰 사용에 쉽게 적응한 연령층이 우리의 주된 생각 대상이고 이들의 행위가 정형돈 불안의 원인이다. 이러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철학적으로 생각할 여지는 별로 없다. 구분하고 영역을 특정하는 작업은 시간이 들뿐이지 할 수 있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영역인가? 아니다.
Ⅳ 그들의 특징
그렇다면 이러한 연령층 내에서 발생한 사건의 특징은 무엇인가. 쉽게 알 수 있듯, 온라인과 관련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온라인 문화는 pc 통신부터 시작이라고 하면 얼추 맞을 것이다. 그런데 <온라인이 본격적으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때는 2010년대 중반이다> 그러한 온라인에서 주목할 부분이 어디인가. 다소 정확히 특정하자. <온라인에서의 상호작용>이다. 그렇다면 2010년대 전후로 그 온라인에서의 상호작용 내용이 달라졌다는 말이다. 어떻게 달라졌을까. 흔적이 있다. 바로 <웃긴 대학>이다. 이 웃긴 대학을 가보면,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디시인사이드나 여타 온라인 집단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구수한 냄새가 난다. 거기는 자신의 얼굴도 커뮤니티에 올려버린다. 서로 자학개그를 하면서 지내는 게 이들의 일상이다. 왜 이러지. 이러한 특징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나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겠다. 옛날에는 연예인들의 주민등록번호나 자신의 집주소가 방송에 공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주민등록번호는 박정희때 나온 것으로 배웠고, 우리는 익숙해도 이렇게까지 번호를 발급하는 나라도 흔치 않다. 주민등록번호는 일종의 번호 부여이지 이것을 공개하는 것이 뭐 그렇게 대수냐하는 인식이 있었다. 거슬러 올라와보니 특징이 보인다. <공유성>이 그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조망을 통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장이 바뀌면서, 특히 온라인에서도 바뀐 젊은 층의 <상호작용 특징>을 대략 뽑아봤다. <해학의 삭제> 및 <진지>, <내면성의 점증>, <피해의식의 확장> 즉 피해의 범위가 외부에 국한되다가 내면까지 확장된 것. 이들은 이제 바람만 맞아도 아픈 정신질환의 영역에 들어섯다. 나는 이를 보면서 무언가가 생각난다.
Ⅴ 철학
철학한다는 자들은 무엇을 하는가. 나는 원인이나 어떤 근원에 대한 끊임없는 회고 혹은 그런 태도로 본다. 내적 정합성, 일관성, 명료함, 타당성 등은 논리의 영역에 가깝다. 그러나 논리는 철학과 동의어인가. 그렇게 볼 수 없다. 근래 철학 갤러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도 와봤으나 어떤 이들은 상대방에게 논리를 원한다. 그런데 이들이 정말 논리를 원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보기 좋게 글을 정리해줌을 원하는 것인지 모르겠고 짐작하기로는 후자같아 보인다. 즉 이들은 생각하지 않고 글의 논지를 따라가면 이해가 즉시 되도록 자신의 관점에서 보아도 이쁘게 글을 쓰라는 것이지, 논리? 있을까. 비형식적 논리오류를 꼬집는 것은 논리 소꿉놀이를 하는 것에 가깝거나 문법나치정도이다.
그러나 이들은 차라리 낫다. 사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생각해보았을 때 우리 사회에서 타격을 크게 입는 사람들은 <느끼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전술한 바대로, 진지하고 내면적이며 피해의식이 많을 수 있다. 정형돈처럼 사회적 민감성이 세질 수도 있다. 또한 이들이 본 글에서 논하는 문제의 원인일 수 있다. 나는 이하와 같은 생각을 해보았다.
Ⅵ 내면적인 게 좋은 것일까
사회에서 발생하는 온갖 형태의 정치와 법률문제는 일정부분 <피해자 중심주의>이다.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하여 피해를 받은 사람이 배려나 보호를 받아야 하고, 그들이 피해 받는 방식을 이해하여 행위를 규제하며, 피해자에게 국가가 보상해주거나 집단에서 그들의 규칙으로 피해자측에게 피해전보를 해준다. 이렇게 피해를 줄여 사회를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바가 있다. <바람만 맞아도 아프다> 이제 말을 바꾸어 보자. <시선만 받아도 손발이 떨리고 내면이 부수어진다> 다소 극단적인 표현이긴하다. 이렇게 해두는 까닭은 글이 개괄적이기 때문이다. 이제 대부분의 집단정치와 법률의 관심은 내면의 피해나 피해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더욱 쏠릴 것이다. 그들의 피해호소를 통하여 무엇을 해도 되고, 무엇을 하면 안되는지 파악하고 정치와 법률을 모양짓는 부분이 더욱 발생할 것으로 생각한다. 내면적 피해범위는 확산될 것이므로 여기에 주목한다.
그들의 내면적 피해범위는 어디까지 들어갈까. 나는 가치에 주목했다. 서로의 가치관이 맞아야 함께할 수 있거나, 가치관을 건들지 말아야 함께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의 가치관이 무엇인가. 그들은 자신의 가치관 내용을 포스트잇에 써놓고 이마에 붙여서 전시라도 하는가. 그들이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이러한 가치관이 있습니다. 침범하지 마세요." 라면서 명함 대신 자신의 가치관이 기재된 책자라도 건내주는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아무리 이해해 보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접근조차 불가능한 그들의 가치 범위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는 내면으로 확장된 피해의식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중요하다. 무언가는 피해주는 행위라는 생각만 있으면, 무언가를 감각하는 즉시 그 상상력으로 정신적 피해를 받아버리는 점을 주목하자. 인생을 조지고 싶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어떻게든 상호작용은 해야한다. 그 또는 그녀가 기분만 나쁘면 조져질 수 있기 때문에 펜스 범위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사람들은 이제 더욱 경거망동하기 힘들다. 가치는 의미부여와 관련있다. 사람이 무언가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했다. 의미부여의 내용은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다. 대상은 생물일 수도 무생물일 수도 있다. 여기에 그 사람의 기분이 붙는다. 결국 기분상해죄 범위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기분상해죄의 단점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지금 당장은 연민의 발휘로 설명하는 것이 전달하기 용이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가 길을 걷는데 전봇대 밑에 비 맞으며 떨어대는 새끼 고양이가 있다. 그대로 놔두면 얼마 안가 죽을 것 같다. 이러한 새끼 고양이에게 연민이 갈 수 있다. 당장 고양이를 들어서 최소한 비는 맞지 않게 조치를 할 수 있고, 불쌍하면 임보까지도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고통스러워 보이는 생명체에 마음이 간다.
그렇다면 사람은. 어떤 사람이 피해를 호소하면서, 저 사람이 나를 괴롭혔다고 외친다. 사려깊지 못하고 배려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 구도에서 가해자는 누구이고 피해자는 누구인가. 표현을 다듬어 볼까. 피해를 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누구이고, 피해를 받을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누구인가. 일단 피해자는 피해호소자일 것이다. 우리가 경거망동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사람들은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그런 것이 정의롭다고 여긴다. 그런 정황을 참작하여 바람만 맞아도 아프든 어쨋든지간에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런 정의에 반하는 행위를 하지 않으려고 한다. 잘못하다가는 그들의 정의에 따라 누군가가 악인으로 치부될 수 있고 그 악인이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이 누군가가 자신의 가치를 침해했다고 주장한다면 어떨 것인가. 여러분들은 이제 되도록 스윗한 사람이 될 것이다. 최소한 개입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피해를 호소하는 사람은 아무런 물적피해가 없다. 다만 마음을 다쳤다고 한다. 자신의 소중한 무언가가 침해되었고, 침범되어 정신적으로 아프다고 한다. 손발을 떨다가도 갑자기 진정을 하는가 싶더니, 피해를 벼슬로 삼아 역전재판을 시도한다. 이런 모습을 보다보면 이들을 건드렸을 때 우리는 감당 가능한가? 또한 피해를 줄 가능성이 있는 자에게 피해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이러한 피해 또는 피해 예상은 기분이 나쁘다거나 장래 나쁠 여지가 크다는 점이 거의 다이고, 물리침이나 예방의 효과는 정의 또는 승리의 기분. 피해자 중심주의에 입각한 집단의 뭉침이다.
한편 추가적인 의문이 따라붙는다. 위와같이 의미부여에 따른 기분상해죄로 인하여 사람들은 단체로 무형의 기싸움판에 놓여있는 것같다. 그만의 의미부여의 세계인 가치의 영역이 현실과 관련이 없는 경우는 흔하다. 여기에는 추론도 논리도 없다. 상상이 주요하게 들어가고, 판타지세계일 수 있다. 무생물인 인형이나 돌덩이에 애정을 쏟고 의미를 부여해서 소중하게 여길 수도 있다. 특정 온라인 공간도 특정 사람에게는 그럴 수 있다. 그들의 판타지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잘못 건드리면 멍석말이를 당할텐데. 그렇다면 가치의 범위가 넓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들은 그 범위가 넓고 깊을 수록 내면이 깊다고 말하기도 한다.
Ⅶ 결론
요즘 사람들이 각기 다른 이유를 들어 철학이나 가치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급작스럽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점차 내면적이게 되는 한국사회 젊은 연령층의 특징에 따라 그들이 찾게 되는 것은 철학이고 가치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접근을 주저하게 만들고, 사람들이 거리를 벌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이제는 상호작용도 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다. 내면에 침잠하여 고독을 씹고, 고독을 즐기는 자만이 참된 인간이다. 나 또한 그런 부분이 있다. 하지만 고독을 즐기는 것과 상호작용을 하는 것은 양립 가능하다. 혼자서도 즐겁고, 사람을 만나서도 즐겁다. 그러나 본 논의의 말미에 나온 내용에 따르면, 사람 간 상호작용은 이제 부단한 과정으로 바뀌고 있다. 그러한 과정은 상호작용의 귀찮음을 유발한다. 따라서 고독으로 기울여진다. 점점 사람들이 내면적이게 된 이유로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도 그렇게 바뀐다.
철학의 쓸모가 어떤 이에게는 가치 생산에 쏠려 있는가? 그러면 좋지 않은 것 같다. 정부의 출산정책이 먹히지 않는 이유도 개인의 내면집중과 내면 피해 범위의 확산에 있는 것 같다.
모름...
무지의 지 좋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