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존재‘에 대해서 너무나도 당연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있으니 보이고, 보이니 분석할 수 있습니다.
존재론과 인식론의 필요성은 인간이 자신이 인간임을 설명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증거이자 본능입니다.
그래서 말 하고자 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논해질 수 있는 대상과 논해질 수 없는 대상 및 명제는 나눠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논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고의 차이는 ’특수성‘입니다.
예시로, ‘인간의 존재가 어떠한 공통점을 지닌 생명체’라고 가정한다면, 특수성으로 인해 그 보편성을 갖추지 못한 것은 인간이 아니게 됩니다.
이런 ’특수성’은 곧 보편적 인간의 명제에서 분리가되며, 차별이 됩니다.
그러면 처음 태어난 아이에게 ‘인간‘이란 무엇인지 설명을 해야하거나 사전적으로 이를 구체화 시킬 때 인간의 정의는 무엇이여야 하는가?
위 질문에 대답하는 것 자체가 논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도전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전적 논의 보다는 인식론과 존재론적 인간의 설명은 이를 차별 없이 ‘인간‘을 논할 수 있게 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즉, ’인간은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닌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가 인간을 설명하는 맞는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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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공통점만 추출해서 묶은 것이고, '인간'은 무엇인가를 논한다면 그 공통점을 논하고 있는 것이겠죠.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고 해서 인간의 분류에 들어가는 개별 생명체에 특수성이 없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계시는 것인가요. 공통점도 있고 개인은 특수성도 있는 것이죠. '인간'을 논하는 것을 두고 '사상가'님을 논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추출한 부분에는 '존재'가 없습니다.
@ㅇㅇ 무언가의 일부를 논하는 것은 그 존재에 대한 설명이 맞을까요? 저는 인간의 정의에 대하여 존재론적, 인식론적 해석이 기존 해석(what)보다 이 해석(how)라면 더욱 보편 타당한 해석이 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 dc App
@사상가(58.29) '무언가'가 인간을 가리키고, 따라서 그 인간이라는 공통점을 정의하기 전에도 있는 개별 사람들 각각을 인간의 일부로 본다면 이 때에는 공통점 내에서만 개별 사람들이 파악될 뿐입니다. 인간은 단지 공통점을 내용으로 해서 '인간'이라는 단어로 명명해 놓은 것이지 그 '인간'이라는 단어 속에 존재가 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인간'이라는 개별 사람들의 공통점을 추출한 것에 불과한 단어와 단어 내용에는 존재도 생명도 없으니까요. 그것은 살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how는 철학이 아니고, what이 철학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how는 과학에 가깝고 어떤 근본파악이랑은 거리가 멀죠.
@사상가(58.29) 보편 타당한 해석에 대해서는 how가 유리하다고 보고 그래서 동의합니다. '인간'이라는 단어는 how에 가깝고 그래서 보편 타당한 해석이며, 이것은 what과는 다릅니다. 오히려 존재에 대한 물음은 what 으로 개인적으로 해야죠.
@ㅇㅇ https://m.dcinside.com/board/philosophy/590821 일단 철학적 분석을 해보긴 했는데, 귀결은 과학적으로 계속 흘러가네요. 좋은 의견 감사합니다. - dc App
@사상가(58.29) 글 잘 보았습니다. 본문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에서의 무엇을 how으로 본다면 '인간'이라는 단어로 명명된 것에 대하여 보편 타당을 논하는 것인데 이것에는 특수성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과거 철학자들이 했던 것이지만 그땐 과학과 철학의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철학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링크 주신 글에서그렇게 how를 묻고 인과를 생각해서 정의한 '인간'의 공통적인 부분에 결핍이 있다는 걸 말하셨고, 존재란 결핍 충족을 위한 맹목적 운동이라는 결론을 내리셨네요.
@사상가(58.29) '무엇'을 how로 보지 않고 what으로 본다면, 무엇 = what / 어떻게 = how 로 생각해볼 수 있겠고. '인간이란 무엇인지'는 실은 인간이란 '어떻게' 인간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으로 인간의 공통 조건을 정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how로 밝힌 인간의 생래적인 부분에서 논의를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개별적인 사람은 그 생래적인 부분에서만 살아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위해서'라는 목적성을 띄는 단어를 아이를 관찰해서 생각하신 본능에도 위치시키면서도, 아이가 커서 결핍을 어떤 부분에서 느끼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점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에 결핍을 느껴도 또 다른 사람은 그 무엇에 결핍을 느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how보다는 what이 들어가서
@사상가(58.29) 인간공통부분에서 벗어난 자신의 특수성에 의하여 본능과 결이 다른 부분을 본다음, '위해서'라는 목적성을 자신이 수립할 때 how로 어떻게 목적을 달성하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이는 먹고 싸고 자는 기초적인 생명유지차원에서는 벗어난 것으로 보이네요.
@사상가(58.29) 그렇다면 논해질 수 없는 부분은 그 개별성에 해당하는 부분이겠죠.
@ㅇㅇ 제가 생각하기에도 인간은 인간입니다. 인간을 무엇인가로 정의 해서는 특수성을 고려하지 못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즉, 제 말은 인식론과 존재론적 해석이 불가피함을 의미합니다. 인간에 대한 분석은 개인의 가치에 따라 삶의 이유가 달라지는 것이니, 특수성을 전재합니다. - dc App
@사상가(58.29) 그렇겠죠. '인간' 정의는 특수성을 고려한 것이 아니니까요. 공통적인 것만 뽑아서 '인간'이라는 단어로 정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상가님께서는 마치 특수성을 고려해서 '인간'을 분석해야한다고 말씀하시는 것같네요. '특수'입니다. 이것은 보편이 아닙니다. 보편 타당을 논할 때는 그런 '특수'한 것들을 고려하지 않겠다는 것이죠. 따라서 '인간'에 대한 분석은 특수성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특수성을 고려할 것이라면, '인간'이 무엇인가보다는 '사상가'님이 무엇인가를 고려해야겠죠.
@ㅇㅇ 그렇기에, ’존재에 대해서‘라는 이 글은, 예시로서 ‘사람’을 가져왔습니다. 존재의 정의가 보편성에 의한 정의라면, ‘존재’라는 것은 특수성을 포함한 대상을 포함하는 명사이기에, ‘인간’이라는 단어는 존재의 대상에 포함될 수 있으나 그 모든 것을 담기에는 부족한 그릇이라는 뜻입니다. 즉, 라캉의 이론을 잠시 빌려 설명하자면, 이는 보편성과 특수성은 ‘존재’속에 포함 되어 있지만, ‘어떠한 존재’를 뜻하는 명사 즉, 기표는 그 기의를 완벽하게 함유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는 뜻입니다. - dc App
@사상가(58.29) 네 원래 '인간'이라는 단어는 모든 것을 담는 그릇이 아니니까요. '존재'도 마찬가지라서 별도로 존재인 '것' 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개별 사람으로서 특수성이 있어도 그 특수성으로 인하여 '인간'이라는 보편성이 개별 사람에게서 사라지지 않죠. 주어진 것이고 설명가능한 how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개별사람이 '존재'라는 보통명사를 사용하면서 기표 속의 기의에 보편성과 함께 자신의 특수성을 포함시켰다고 '여긴다' 하더라도, 존재라는 보통명사 성질의 기표는 기의를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상가(58.29) 따라서 논해질 수 없는 부분은 특수성으로 일컬을 수도 있는 그 개별성. 개체의 별도 성질 그러니까 퍼스널리티이고 이건 생애경로가 포함되어 있어서 명제가 될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ㅇㅇ 음음 이해가 갑니다. 존재의 개별성(특수성)은 명제조차 될 수도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이군요. 그 부분에서는 깊게 공감합니다. 그렇기에 ‘인간’같은 특수성이 있는 존재에 대해서는 존재론적, 인식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라는 게 저의 최종 제시였습니다. - dc App
@사상가(58.29) 그 존재론적, 인식론적 해석에 대해서는 해석을 어떻게 생각해 보아야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바운더리 정도를 how로 제시한다면 그정도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자신을 해석할 때에만 그 방법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자신이 자신을 해석해서 자신만의 경로를 타인에게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런 경로 제시를 다른 사람이 볼 때 경로 = 바운더리는 알 수 있어도 바운더리 내의 질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해석 불가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길도 있고 저 길도 있는데 그 모든 길은 모든 사람이 따라 걸을 수 있으나 그런 방향이 있는 길을 걷는다고 해서 질적인 측면까지 동일하지는 않겠죠.
無无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