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말할 때, 그 자유가 반드시 책임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술과 담배는 성인이면 자유롭게 소비할 수 있는 품목이지만, 그로 인해 생기는 건강상의 문제까지 국가가 책임져주지는 않는다. 내가 술을 마시다 간이 망가지거나, 담배를 피우다 폐암에 걸렸다면 치료는 받을 수 있을지언정, 그 선택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내게 있다. 이는 자유와 책임의 기본 원리이며, 이는 단지 기호품 소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운전이라는 자유를 누리지만, 동시에 교통사고의 위험도 함께 감수한다. 아무리 안전운전을 한다 해도 사고는 불시에 일어날 수 있으며, 이를 완벽히 제거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험에 가입하고, 일정 수준의 위험을 사회적으로 분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기치 못한 사고로 생계가 무너졌을 때, 피해자는 공공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나, 그 자유로운 이동의 권한 자체를 국가가 통제하지는 않는다. 운전을 허용하면서도, 각 개인에게 일정 수준의 책임과 예방 노력을 요구하는 것은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원리는 주거 선택에서도 마찬가지로 작동한다. 나는 Hannover 라는 곳에 있을 때 저렴한 월세 때문에 본의 아니게 집창촌 근처에서 지낸 경험이 있다. 위험과 불쾌함, 그리고 심리적 압박이 있었지만, 그 환경을 감수한 것은 내가 저렴한 거주비용을 선택한 결과였다. 반대로, 보다 안전하고 쾌적한 지역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더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안전은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사회가 보장해줄 수 있는 안전의 수준에도 한계가 있다. 개인이 선택한 환경에 따른 리스크는 어느 정도 본인이 떠안아야 하며, 이것이 자유로운 선택이 수반하는 책임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태원 참사를 바라보면, 국가가 일정한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되,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몰리는 공간을 사전에 완벽히 통제하라는 요구는 자유사회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에 가깝다. 수많은 인파가 몰릴 가능성이 있는 공간마다 사전허가제나 국가 개입을 요구한다면, 우리는 결국 거리공연도, 야외 축제도, 자발적인 모임도 불가능한 사회로 전락할 수 있다. 사고가 일어난 뒤의 대응과 구조는 공권력의 영역일 수 있으나, 사고 자체의 가능성을 아예 제거하려는 발상은 자유로운 시민사회의 원리와 충돌한다.
현대 사회는 기술 발전과 함께 점점 더 많은 위험을 수반한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해킹, 피싱, 개인정보 유출 등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며, 우리는 이를 알면서도 기술을 포기하지 않는다. 정부가 모든 통신을 감시하고 통제한다면 위험은 줄어들 수 있겠지만, 동시에 개인의 사생활과 표현의 자유도 심각하게 침해받게 된다. 자유와 안전은 종종 서로 상충하며, 어느 한쪽만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 다른 한쪽은 반드시 위축된다.
나는 이러한 원칙을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자주 되새긴다. 특히 사람들이 어떤 재난이나 범죄가 일어났을 때, “국가는 왜 막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마다, 그 이면에 있는 더 근본적인 질문은 “우리는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라는 것이다. 사고 가능성을 이유로 모든 것을 국가가 통제해야 한다면, 우리는 더는 자유로운 개인이 아니라, 관리 대상이 되는 것이다. 반대로, 자유로운 선택의 가능성을 보장받고 싶다면, 그 선택이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을 일정 부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브라질의 빈민가에서 100달러짜리 지폐를 흔드는 것은 엄연히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그 자유는 분명한 위험을 수반하며, 그에 대한 결과는 어느 정도 본인의 몫이다. 국가는 범죄를 예방하고, 피해자를 도와야 할 책무가 있지만, 개인의 선택에서 비롯된 모든 위험을 원천적으로 제거할 의무는 없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국가와 사회에 보호를 요구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요구가 지나치게 되면 결국 개인의 선택권과 자유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자유란 언제나 위험과 함께 주어진다. 위험 없는 자유는 존재하지 않으며, 책임 없는 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안전을 원한다면, 그 대가가 무엇인지 직시할 필요가 있다. 자유로운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그 자유의 그림자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그림자가 싫다면, 아마도 빛 자체를 포기해야 할 것이다.
개념글 공지로
굿굿
자유와 그에 대한 책임은 맞는말이고 얘기할수 있으나 그 정도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할텐데 작성자가 말한 이태원 참사 예시에 대한 몇몇 부분은 동의하기 힘듦
개인에 자유와 책임에 관해 국가가 어느정도로 시민의 안전을 확보해야 하는지도 논의되어야 할 부분인데, 사전 국가의 개입은 좋지 않고 / 사후대응과 구조가 공권력의 영역일수 있다. 이렇게 이분법으로 나누는듯한 모양새를 취하면 안된다고봄.
@ㅇㅇ(218.147) 어느정도 국가의 사회적 안정망이 제공될때 국민들이 자유롭게 활동할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사전에 시민의 안전을 위해 국가가 적절히 개입하는게 좋은 경우도 있으니까. 교통 통제나 경찰이 있을때 시민들이 주어진 규칙과 질서내에서 자유롭게 활동할수 있고 반대로 개인들의 과도한 자유가 사회적 질서를 무너뜨리면서 타인의 자유를 막고 해를 입히기도 하니까
@ㅇㅇ(218.147) 난 이런면에서 이태원 참사가 개인들에게 주어진 과도한 자유로 질서없는 상황이 되어 큰 피해가 발생되었다고 보고 이러한 참사를 막기위해 국가가 사전이나 사후 어떤 방법들이 좋은지에 대해 앞으로 사회적 논의와 합의가 필요하다고봄. 물론 국가가 모든걸 통제하는건 적절치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는점과 극단적으로 한쪽으로 치우치면 위험하다는것에 대해서는 동의함
@ㅇㅇ(218.147) 별개로 읽기 쉽고 자유와 책임에 관한 좋은 글 잘 읽고감!
좋은 글이기도 하고, 특히 제목처럼 자유에 관해 쉽고 명확한 글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두가지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첫번째는 능력주의에 대한 맹목적인 수용으로 흐를 가능성입니다. 자유에 대한 옹호가 결국 그렇지만 모든 사태를 개인의 선택으로 미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뚱뚱한 것도 개인의 선택, 돈을 잘버는 것도 개인의 선택, 백수가 되는 것도 개인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모든 결과는 개인으로 귀속되는 능력주의가 되거든요. 하지만 실제 개인의 능력과 선택만이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아닙니다. 명백한 외부효과가 있습니다. 또한 선택과 능력 역시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마이클 샌델의 공정하다는 착각에 보면 더 깊이 설명하는 바가 있습니다.
두번째는 사회학적 관점의 결여와 그로 인한 대안의 부재입니다. 모든 원인을 개인으로 귀속시킨다면 더 이상 논의할 것도 발전할 것도 없습니다. 어떠한 문제가 있다면 혹시 사회 구조적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자살은 개인의 문제다 하면 더 이상 할게 없습니다. 하지만 사회구조적 문제로 자살이 더 만연해지는 것은 아닌지, 스마트폰 해킹에 대한 구조적 취약성이 있는 것은 아닌지, 사람이 많이 모일 것이 예상 될 때 사회적 매뉴얼을 만들 가능성은 없는지, 브라질 슬럼가의 치안을 더 좋게 할 방법은 없는지에 대한 접근이 안되죠. 그저 개인의 선택 문제라고 생각할테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가혹하지 않을까요?
'모든 문제는 선택의 문제다. 니가 그렇게 사는 것은 니가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선택을 하는데 모든 사람이 같은 조건에서 같은 선택지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