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내용은 제가 생각하는 세상과, 그 세상으로부터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쩔 수 없이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접목시키긴 하였지만, 제 나름대로의 해석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AI사용 X
1. 세상이란.
제가 정의하는 세상은 크게 2가지로, 작게 4가지로 나뉩니다.
1. 세계의 가장 큰 범주로는 내(内)세계와 외(外)세계로의 나눔입니다.
2. 내세계는 자(自)세계와 타(他)세계로 나뉩니다.
3. 외세계는 피(被)세계와 간섭(干渉)세계로 나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세계는 인간의 세계입니다. 외세계는 인간 외의 것, 즉 어떠한 명제 및 사물 등이 이에 속합니다.
자세계는 나의 세계이고, 내가 어떠한 행동을 하는 것에 따라 흘러가는 세계입니다.
타세계는 나 외의 다른 대상들의 세계입니다. 다른 대상은, 자신의 자세계가 타세계 속에 있는 것입니다.
피세계는, 나한테 직접적으로(물리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물 혹은 운동, 동물(inhuman-animal)입니다.
간섭세계는 실물로 존재하지 않고, 어떠한 명제나 논리, 혹은 생각의 집합입니다.
내세계는 외세계로부터 간섭을 주고받습니다. 하지만 결코 세계가 둘이 섞이는 일은 없습니다. 예시로 자세계의 사람이 간섭세계로 갈 수 없으며,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자세계는 타세계가 될 수 없습니다. 즉 ’나‘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나눔의 틀은, 인간의 존재를 도식화하여, 그 대상이 어떠한 세계의 간섭을 받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시로서, 인간의 결핍은 간섭세계에 위치해있습니다. 이러한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서 자세계는 외세계에 있는 결핍을 해소하기 위하여 자세계에서 움직입니다. 이는 간섭을 주고받았음을 의미하게 됩니다. 또한 간섭세계는 외세계의 산하에 있기에 가치나 행복등을 외세계에 둡니다.
사람이 삶을 사는 이유는, 다른 세계에 그 가치나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자세계의 행동이 타세계를 위한 행동이면, 이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가치나 행복은 외세계에 있는데, 인간이 인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이것은 칸트의 인식론적 해석으로 설명 가능합니다.
인간은 대상을 물자체가 사람의 오감을 촉발시켜 표상으로서 받아드립니다. 이 물자체의 가치는 외세계이기 때문에 이는 즉 간섭세계의 영향임을 말합니다.
이는 그러면 타세계는 외세계의 촉발의 대상이냐? 라는 질문에는, 이 질문이 사변성에 대한 도전이기에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도전입니다.
그렇기에 내 세상의 한계는 존재의 한계이며 세상의 한계이고,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존재합니다.
1.1 세상의 한계.
세상은 ‘나’입니다.
즉, 세상의 한계는 나의 한계입니다.
이는 내가 알고있는 것은,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일부입니다.
나의 지성 그리고 감성과 이성으로 인하어 내 세상에 들어온 정보는 내 세상의 한계를 명확히 구분짓습니다.
우리는 세상안에 있는 일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침묵은, 세상 안, 정확히는 간섭세계의 논제에 대해서, 즉 세상 속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말을 하지 말라는 뜻을 지닙니다.
이 말은 세상 안에 알 수 있는 논제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뜻이 됩니다.
제가 말 하고자 하는 세상의 한계는, 말 할 수 있는 영역에 한합니다.
즉, 세상 밖의 것은 논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의 존재는 세상 밖의 존재인데 이에 대해 어떻게 논의 하는가?” 라는 질문은 사변적 특성을 기인하여 알 수 없을 뿐이지 그 존재의 유무를 지나 그 논제가 이미 세상 안에 있음을 뜻합니다.
단순한 예시로, ’추측‘은 세상 밖의 논제를 세상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인식론적 트리거입니다.
그렇기에 ‘나‘의 존재와 나의 생각의 한계는 창조하는 것 이전에 세상 밖에 있는 것을 세상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제가 정의한 세계에 따르면, 외세계의 간섭세계의 논제는 이미 세상 안에 있을 뿐, 외세계의 한계는 즉, 세계의 한계입니다.
세상은 선험적 존재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선험적 대상과 존재와 후험적 존재와 대상이 섞인 시공간적 장입니다. ‘나’에게 있어서 세상이란 시공간적으로 ‘과정’에 있습니다.
시간의 존재는 분명히 선험적입니다. 시간의 존재의 기원은 분명 인과관계의 산물일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존재는 분명히 후험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타세계 내에서의 인과성이 나의 자세계를 만들었습니다. 즉, 자세계는 내세계에 있어서 후험적 대상입니다. 그렇다면, 범우주적으로 봤을 때 세상은 선험적인지를 논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은 선험적입니다. 그 이유는 외세계의 선험성에 있습니다. 비록 간섭세계는 후험적 요소가 들아갈 수 있으나, 피세계의 지구, 우주, 물리법칙 등 선험적 법칙의 필연성은 당연하게도 이 선험성을 증명합니다. 하지만, 이를 무조건적 ‘선험‘에 포함시킨다면, 세상의 구성요소가 후험적인 내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모순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고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생은 절때 선험적이지도 후험적이지도 않습니다. 미래의 자신이 존재하는 이상 이를 후험적 존재라고 말을 해버린다면, 이는 모순입니다.
그렇기에 철학적으로 인간에게 있어 가장 근본적으로 중요한 ‘삶’이란 과정에 있음을 말합니다.
2. ‘나‘는 무엇인가?
인간은 ‘존재‘에 대해서 너무나도 당연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있으니 보이고, 보이니 분석할 수 있습니다.
존재론과 인식론의 필요성은 인간이 자신이 인간임을 설명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증거이자 본능입니다.
그래서 말 하고자 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논해질 수 있는 대상과 논해질 수 없는 대상 및 명제는 나눠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입니다.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논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고의 차이는 ’특수성‘입니다.
예시로, ‘인간의 존재가 어떠한 공통점을 지닌 생명체’라고 가정한다면, 특수성으로 인해 그 보편성을 갖추지 못한 것은 인간이 아니게 됩니다.
이런 ’특수성’은 곧 보편적 인간의 명제에서 분리가되며, 차별이 됩니다.
그러면 처음 태어난 아이에게 ‘인간‘이란 무엇인지 설명을 해야하거나 사전적으로 이를 구체화 시킬 때 인간의 정의는 무엇이여야 하는가?
위 질문에 대답하는 것 자체가 논해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도전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사전적 논의 보다는 인식론과 존재론적 인간의 설명은 이를 차별 없이 ‘인간‘을 논할 수 있게 되는 중요한 수단입니다.
즉, ’인간은 무엇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닌 ‘인간은 어떻게 존재하는가?‘가 인간을 설명하는 맞는 의문입니다.
3. 삶의 의미와 이유.
제가 생각하는 삶이란 살아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 이유로는 맹목성에 지배당하는 나 자신에 대한 회의감으로부터 ’이유‘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즉, 나는 이유가 없는 맹목적인 본능에 따르는 인간이 되고싶은 게 아니였습니다.
이 ’이유‘가 있어여만이 삶에 의미가 생깁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삶의 ’의미‘는 이유가 있어야 비로서 존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살 ’이유’가 없는 삶은 저는 죽는 것이 낫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 저에게 있어서 ’이유‘란 무엇인지 정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물체가 그 존재의 ’이유‘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궁극적으로 ‘신‘이 존재해야만이 인간의 삶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서는 ’종교’라는 개념보다 ’신’의 존재의 ’요청’에 가까운 사람이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무신론자입니다.
이는 즉, 삶의 ‘이유’란 저에게 있어서 사변적입니다.
제가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이유는 궁극적인 ‘진리‘를 찾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삶을 살아야 하는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진리‘란 자고로 보편성의 극치, 즉 특수성이라는 것이 존재해서는 안되는 모두에게 삶의 이유를 부여하는 것을 뜻합니다.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에 대한 예시로서, 행복이란 행복해서는 안되는 사람과 행복하지 않은 사람, 행복을 추구해야만 하는 고통스러운 삶을 생각하면 이는 특수성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삶은 고통이다‘라는 전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 이유로는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맹목적으로 삶을 지속하기 때문입니다.
쇼첸하우어의 사상을 오독한 것이 아닌, 제 나름대로의 해석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진리’의 보편성을 약간은 배제하여 나에게만 적용된다면 그래도 살만한 의미가 있는 삶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이는 다른 말로,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란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 나름대로의 ‘진리‘는 ’사람은 죽는다’입니다.
이러한 진리는 즉, 맹목적인 삶을 거부하는 인생에 대하여 고찰하는 것은 ’자유’의 가치가 상당부분 저에게 있어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세상으로부터의 부재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것이 저에게 있어서 마지막으로 남겨진 ‘자유‘의 발현입니다.
4. 행복과 불행.
사람은 태어나길 맹목적으로 태어납니다.
선험적으로 사람은 의지의 맹목성 때문에, 살고자 하는 욕구가 발현됩니다.
갓태어난 아기는 결핍(배고픔, 고통, 고독함 등)을 채우려고 몸짓과 소리로 그 결핍을 알립니다.
즉, 맹목성의 기저는 결핍입니다.
여기서 행복과 결핍이란 단어는 땔 수 없는 존재입니다.
결핍이 충족되면 사람은 행복을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를 소망(결핍)하고, 충족시킨다면 이는 곧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불행은 어떻게 정의가 되는지 알아봐야 합니다.
이 또한 결핍과 땔 수 없는 존재로, 결핍이 언제 채워질지 모르는 상황 그 자체가 ‘불행’입니다.
예시로 배고픔을 언제 채울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 갈증 등으로 인해 무언가의 결핍이 생긴 상황 등 이러한 ‘불확실성에 의한 불행’이 제가 정의하는 불행입니다.
행복과 불행의 기원이 결핍인 것을 알았으니, 이를 전회하여 생각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결핍의 증가는 불행의 증가일 수도 있지만, 행복의 증가도 될 수 있다”라는 역설이 탄생합니다.
논리적으로 봤을 때, 불확실한 결핍의 증가가 아니라면 이는 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인식’을 통해 결핍을 인지하고, 이흘 해소하려는 본능을 지닌 존재입니다.
즉, 사람은 근본적으로 행복을 삶의 원동력으로 쓰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행복따위가 삶의 이유라면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로는,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맹목적 본능에 순응하는 것으로, 자유로운 삶이라고 보기에는 모순점들이 존재합니다.
저는 ”사람은 자유로워야 삶의 가치가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본디 본능에 순응하는 것이 삶의 이유라면, 순응하지 않는 것은 삶의 의미가 없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유와 의미는 다릅니다. 이유가 있어야 의미가 생깁니다.
즉, 사람이 맹목적이라면 살아야 할 마땅한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5. 결핍과 존재.
존재란 자고로 무언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존재의 필요성을 요구하는 것과 인과관계의 산물은 ‘존재‘입니다.
이러한 존재는, 원인과 결과가 있듯이, 존재는 결핍이 있습니다.
그것이 존재의 기저입니다.
대상(동물)의 기저는 결핍과 그것으로 인한 맹목적인 욕구가 있습니다. 그 이유로는 신생아, 갓 태어난 동물 등 선험적으로 주어진 본능이 아니라면 형용될 수 없는 행동에는 인과성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가 결핍입니다.
즉, 맹목성은 결핍의 산물입니다.
여기서 결핍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면, 이 글을 오독할 여지가 있기에, 제가 생각하는 결핍에 대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결핍은 가치중립적 상태의 ‘본능’이며, ‘존재’의 기저입니다. 결핍의 가치중립성에 대한 입증으로는, ‘인식’전까지 결핍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결핍은 인식되는 순간부터, 언제 채워질지 모른다면 이는 불확실성에 의한 불행입니다.
제가 불행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다시 한 번 신생아를 생각해 보자면, 소통의 수단의 부재로 인한 울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보통 신생아는 결핍이 생기면, 행동으로서 울음을 터뜨립니다. 울음의 기저에는 결핍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결핍‘의 존재의 기저로서는 무엇이 존재하는지 알아야합니다. 인간의 기저가 결핍인데, 기저의 기저를 찾자면, 이는 ‘원인’입니다. 원인이 있기에 결핍이 있습니다. 무궁무진한 원인의 결과로 인해 초래된 결핍은 불행을 낳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존재의 기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났는가? 앞서 말 한듯이, 누군가의 결핍이 낳은 산물입니다. 아이를 갖는 욕망이 불확실성에 의한 불행을 저지하기 위한 산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가? 그 전에 나는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 무엇이 나를 필요로 하였는가? 반복적인 질문인 것 같지만 다릅니다. 필요로 하는 대상의 차이입니다.
이것에 대한 답으로는 두 개가 있습니다. 형이상학적으로는 ’의지‘의 맹목성의 발현이고, 두 번째로는 과학적으로 세포의 에너지 공급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존재란 결핍을 메우기 위한 맹목적 운동이며, 이러한 존재의 필요성은 형이상학과 과학, 그 어떤 논리로 보아도 부정하기 힘든 '참'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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