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공리적 선언
무한 소급의 오류라는 것이 있다.
어떤 근거 A를 증명하기 위해 근거 B가 필요하고,
다시 그 근거를 위해 또 다른 근거가 끝없이 이어져 결국 최종적인 토대에 도달하지 못하는 논리적 파편화를 뜻한다.
이 허무한 낭떠러지를 막아세우는 유일한 방벽이 바로 공리(Axiom)다.
"이것은 무조건 참이다"라는 가정을 바닥에 깔았을 때만, 비로소 논리라는 성벽은 쌓아 올려질 수 있다.
결국 우리는 무한 소급의 추락을 피하기 위해 공리를 택하지만,
엄밀히 말해 공리는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시스템을 가동하기 위해 임의로 고정해 둔 상수(Constant)일 뿐이다.
예를 들어 '중력은 작용한다'라는 공리를 세웠을 때, "왜 중력이 작용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순간 논리는 필연적으로 다시 무한 소급의 늪에 빠진다.
웃긴 것은 이 비극을 설명하는 '무한 소급의 오류'라는 개념조차 하나의 공리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살아갈 이유를 찾는가.
우리는 대개 열반(Nirvana)이나 절대적 진리 같은 '최종적 해답'을 갈구한다.
왜냐면 이유보다 빠르게 존재해버렸기에.
내가 보기에 열반은 0이라기보다 Null에 가깝다. 모든 인과와 고통의 굴레를 소거하여 데이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공(空)'은 말하는 순간 공이 아니게 되는 형용모순의 영역이다.
용수(Nagarjuna)가 말한 고정된 본질이 없음은,
공리 이전의 참과 거짓으로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함을 뜻한다.
불교는 경계선이 허상이라 외치며 자타(自他)의 흐릿함을 주장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는 언어와 사유라는 시스템의 공리 자체를 벗어버리라는 권유일지도 모른다.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가 말하듯 정의하려는 순간 본질에서 멀어지기에,
그 모호함 속에서 Null이 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말하는 열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붓다조차 열반에 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붓다라는 존재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타인의 사유 안에서 가장 거대한 데이터로 작동하고 있다.
존재의 잔향이 이토록 짙은데 그것을 어찌 Null이라 볼 수 있겠는가.
결국 '붓다의 열반'조차 종교라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또 하나의 공리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비울 수 없다면 차라리 끝까지 채우겠다.
나는 소거를 통한 평온(Null)보다,
최대한의 전지(Omniscience)를 추구하며 살고 싶다.
진리가 공리 위에 세워진 상수일지라도,
나는 내가 선택한 이 규칙 속에서 피 흘리며 나아갈 것이다.
소멸이 예정되어 있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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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데 기재했을때 오해하는 사람이 있어서 덧붙임.
붓다 비판 ×
붓다 열반 아님이라 주장하는 것 ×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을 Null 이라는 유사점이 존재한다고
'생각'되는 개념으로 분석해보려 한것.
비판 보단 선언문임.
반박시 님 말이 맞음
null이 평온이라고? 용수는 농담하고 있다고 보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공과 열반 null은 공통점이 있는거 같아서 시도해본거임.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 없음. 강요하는 식의 ~는 ~다의 글도 아니고요
깊게 생각할 수가 없게 했구만요
@夢幻泡影(220.127) 필자임.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건 우리는 우리가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이라 믿고 산다는 거임.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있다고 믿고 싶은 진리나 열반조차도 허상일지도 모른다고 가설을 재기한것. 열반을 null로 해석해보려 했으나 열반은 null이 아니기에 null 하지 않다는 문장으로 부정해 실패함을 명시함. 결국 나의 인식과 자아마저 허상일지도 모르지만
@夢幻泡影(220.127) 최대한 알고자 하겠다는 개인적 의지 표명의 글임
매트릭스 세계관 생체 밧데리 생성장치 돔에서 정보처리 교환 삽입관 빠지기 일보 직전인듯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