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조는 인용자.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객관적인 전(全) 실재ㅡ다시 말해 의식으로부터 독립한 존재로서의 물질ㅡ와 그 운동·발전(역사)에 대한 포괄적인 입장이며 이 객관적인 전실재 가운데는 당연히 외적자연과 사회도 포함된다. 유물사관은 그중에도 특히 인간사회의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파악(사적 유물론이라 일컬어진다)을 의미하며, 만약 변증법적 유물론을 보편적인 것이라 한다는 이는 특수한 것에 해당된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보편이란 그 속에 특수를 포함함으로써 비로소 보편이라 말할 수 있으며 특수는 그 속에 보편이 관철됨으로써 비로소 특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사적 유물론을 특수라고 할 때의 의미는 그것이 특히 변증법적 유물론의 '핵심적' 구성요소라는 점에서이다. 그 이유는 맑스주의와 철학이 현실사회의 변혁, 즉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피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그로 인한 전인류의 해방을 중심과제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와 엥겔스에 있어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확립이 사적 유물론의 확립과 동시에, 그것도 이를 핵심적 내용으로 하면서 이루어졌던 것은 이 때문이다. 소위 자연의 변증법에 대한 상세한 연구는 그 후에 변증법적 사유를 자연과 자연과학 가운데서 구체화하고 이를 통해 변증법적 사유 자체를 더욱 확고하게 입증하기 위해 착수되었다. 그런 까닭에 변증법적 유물론을 단지 자연의 변증법으로만 이해하고 마치 자연의 변증법이 독자적이고 체계적 원리-예를 들면 반발과 견인과 같이-를 가진 것으로 사적 유물론의 기초가 되며 그것이 사회로 연장된 것이 사적 유물론이라고 생각하는 견해는 틀린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마르크스주의철학의 체계 중에서 자연변증법이 차지하는 비중에 대한 과소평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엥겔스의 유명한 표현에 "자연은 변증법의 시금석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는 당시 자연과학의 성과(그 중에도 세포의 발견, 에너지전화의 증명, 진화론의 등장이 '3대발견'으로 거론되고 있다)를 검토하고 자연과학이 변증법의 시금석으로서 지극히 풍부하고 많은 재료를 제공하고 있으며 이에 의해 자연에서의 사물의 경과가 결국 변증법적이며 참된 의미에서 역사를 경과하고 있다는 것을 역설하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변증법적 유물론은 유물사관과 동시에 확립되었으며 그때 자연에 대한 유물변증법적인 파악은 일반적으로 승인되었다. 그러나 첫째로는, 종래의 형이상학적 자연과 즉 낡은 자연철학을 해체하고 유물변증법적 자연관을 유물변증법적ㅡ맑스주의적ㅡ세계관의 불가결한 하나의 고리로서 확립하기 위해, 둘째로는 뷔히너, 포크트 등의 속류유물론자가 주장하는 일면적이고 기계적인 자연관과 이에 기초한 잘못된 사회관을 논파하고, 이를 통해 맑스주의적인 사회의 역사적 파악ㅡ유물사관ㅡ의 올바름을 옹호하기 위해, 자연에 대한 유물변증법적 파악이라는 문제를 따로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전개할 필요가 있다. "자연은 변증법의 시금석이다"라는 엥겔스의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중요성을 잃지 않는다. 엥겔스도 지적하였듯이 자연과학의 분야에서 획기적인 발견이 이루어지면 유물론은 그 형태를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맑스주의의 자연과학자와 철학자 앞에는 현대 자연과학의 발전과 성과에 기초하여 자연의 유물변증법적 파악을 보다 고차적인 형태로 끌어올리고 이를 통해 맑스주의의 세계관(변증법적·사적 유물론)을 옹호하고 보강·발전시켜야 한다는 과제가 대두되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특히 강조해야 할 점은 변증법을 자연 속에서 발견하기를 거부하는 유물사관주의가 상당히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루카치는 일찌기 [역사의 계급의식] 가운데서 "방법(변증법적 방법)을 역사적·사회적인 현실에 한정시키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변증법에 관한 엥겔스의 서술에서 생겨나는 여러가지 오해는, 본질적으로, 엥겔스가ㅡ헤겔의 잘못된 선례를 추종하여ㅡ변증법적 방법을 자연에 대한 인식에까지 확대하려고 한 데 그 근원이 있다"고 하면서 "가장 본질적인 상호작용은 역사과정에서의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적 관계"라고 주장하였다. 주체와 객체란 실천에 있어서의 상관적인 양측면이므로 유물사관주의는 정도의 차이는 다소 있을지라도 어쨌든 루카치의 계열에 속하게 되며 변증법적 유물론을 단지 유물사관으로 환원시켜 결국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유물사관 속에 해소시켜 버릴 뿐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역사에서의 유물론 자체를 거부하고 실천, 다시 말해 소위 '소위 주체·객체의 변증법'을 그들의 그릇된 유물사관의 출발점으로 삼고 실천을 그들 철학의 근본원리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일찌기 일본의 니시다 키타로(서전기다랑,西田幾多郞)는 자연과학에서 연구되는 자연과 물질은 주체와 객체가 분화되지 않은 상태의 근본실재로서 순수경험의 일면인 추상적인 면, 다시 말해 절대무(絶對無)의 노에마적 측면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도 하였다. 이 견해는 수많은 주체적 유물론자(예를 들면 다나카 키츠로쿠(전중길육,田中吉六) 등)에 의해 계승되어 그들의 유물사관주의의 근거가 되었다. 이들은 순수경험 대신에 실천이 근본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주장하면서(실천의 원점(原點)으로서의 '무(無)'조차도 제거하고 대신, 니시다적(서전적,西田的)인 '장소'의 변증법이 전개된다) 자연과학에서 취급하는 자연은 단지 실천의 추상적·노에마적 측면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연변증법 따위를 주장하는 것은 도리어 '형이상학'(반변증법)에 빠지는 것이며 맑스가 말하는 '실천적' 유물론자의 견해와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테제에서 마르크스가 제창한 '실천적 유물론'은 포이에르바하(L.Feuerbach)를 포함하여 종래의 유물론이 취해 온 기본적 견해[사유(의식)에 대한 존재(자연)의 제일차성의 인정]를 전제로 '감성적ㅡ인간적인 활동'의 파악이 종래의 유물론에서는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이 핵심적 내용이었다. 그런 까닭에 플레하노프(G.V.Plekhanov)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정당하다. "사유가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존재가 사유를 규정하는 것이다라는 사상은 포이에르바하의 모든 철학적 기본명제의 근저에 깔려 있는데 바로 이 사상이 맑스에 의해 유물사관의 기초로 되었다." 맑스주의에서는 "자연이 토대가 되며, 자연의 산물인 인간은 그 위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엥겔스 [포이에르바하론] 자연은 역사적인 존재이며 자체의 운동·발전의 합법칙성과 변증법을 가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는 형이상학적 자연관과 다름없다. ... 인간의 대상이 되는 것과 인간에 의해 실천적으로 변혁되는 것은 직접적으로 동일한 의미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우주의 여러 영역, 소립자의 영역, 세포와 생체고분자의 영역 등은 분명히 실천을 통해 비로소 인간의 인식대상으로 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관측과 실험에 의해 변형될 수도 있다. 과학적 인식은 본래, '실천으로부터 독립한 자연'(뒤에서 설명하겠지만 실천으로부터의 독립과 의식으로부터의 독립은 구별된다)의 운동법칙을 더욱 본질적으로 파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파악된 법칙을 적용함으로써 인간은 자연을 합목적적으로 변혁한다. 증기력의 이용, 원자력, 품종개량, 산천의 개조 혹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물질, 이들은 모두 '실천의 성과로서의 자연'이며 이 자연은 이미 인간에 대해 단순한 외적 자연, 자연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사회생활에 편입된 생산력의 요소 또는 생산물 등으로 된다.
더우기 이러한 실천의 성과로서의 자연(가령 인공물질)이 실천으로부터 독립한 자연의 연장선상에서 형성되고 전자의 법칙에 대한 연구가 후자의 법칙에 대한 연구에 기초하거나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은 현대과학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유물론의 입장에서 어떻게 현대과학의 성과를 총괄하면서 그 발전의 전망을 열어나갈 것인가라는 관점이 각별히 중요 ... 변증법을 둘러싼 존재론적인 문제설정보다는 현대의 과학적 인식의 전개에 초점을 맞추는 인식론적인 문제설정이야말로 핵심적 과제 ... 그렇기 때문에 고대 자연철학으로의 복귀를 의미하는 '형이상학적이고 통일적인 자연상'의 제출은 애초부터 과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사카다(坂田)가 자연의 계층성이라는 관점을 소립자론의 발전의 지도원리로 삼은 데서도 보이듯이 과학적 인식발전의 개개의 역사적 단계에서의 일정한 자연관, 자연상은 각각의 자연과학적 이론의 형성을 위한 전제가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구체적인 변증법적 자연관·자연상ㅡ이것은 더우기 새롭게 달성된 자연과학의 성과에 기초하여 발전적으로 형성된다ㅡ은 철학일반(유물변증법)과 자연과학을 매개하는 고리로서 불가결한 인식론적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된다.
자연과학과 변증법, 17-26p.
* 수학의 공리라는 것은 극히 빈약한 지적 내용의 표현으로서 수학은 그 내용을 논리학에서 빌려오지 않으면 안 된다. 수학의 공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에 귀착된다.: 1.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에우클레이티드 제5공리.-인용자주.) 이 명제는 순전한 동어반복이다. 왜냐하면 양적 의미에서 본 '부분'이라는 관념은 애당초부터 전체라는 관념에 일정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부분은 양적 전체가 몇 개의 양적 부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공리라는 것이 아무리 이것을 명확하게 확인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로 하여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한다. 이 동어반복은 다음과 같이 논의하더라도 어느 정도 증명할 수까지 있다. 즉 전체란 몇 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부분이란 몇 개가 모여서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부분은 전체보다 작아도ㅡ 이 경우에는 공허한 내용이 더욱 심하게 두드러진다. ... "전체 포괄적인 존재는 유일하다" 만일 동어반복, 주어에서 이미 표현된 것을 술어에서 단순히 반복하는 것, 이것을 공리라고 한다면 이 문구야말로 순수한 공리이다. 뒤링씨는 주어에서 존재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고 말하고 나서 술어에서는, 그렇게 되면 이 존재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담하게 주장한다. 이 얼마나 거대한 '체계 창조적'인 사상인가!(F.Engels, [반뒤링론], 69,72p.)(그런데 칸토르는 일대일대응의 방법을 이용하여 무한집합에서는 부분과 전체가 같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런 방법을 도입하자 [연속체 가설은 ZFC 공리계에서 옳다고 증명할 수도 없고 그르다고 증명할 수도 없다]라는 기묘한 명제가 출현하였다. 변증법은 형식논리학의 공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변증법이 과연 이것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게 되면 부르주아 학문체계에 핵폭탄을 투하하게 되는 것이다.(의식의 흐름, 인상비평.))-인용자주,
** 이건 아니다. 사적 유물론은 변증법적 유물론을 사회생활에 적용한 것이다.(DIAMAT.)-인용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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