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비논리적 생명체입니다.
그들은 매일같이 열량을 필요로 하고, 수분을 탐합니다.
이러한 인간은, 가치를 좇아 움직입니다.
아니, 움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본능에 의해 움직일 수 밖에 없는 나는 자유로운가?”
이러한 근본적 질문은, 인간의 맹목성의 가치를 논하지 않고 설명 가능하지 않습니다.
즉, 본능에 순응하는 것이 자유보다 가치가 있다면, 본능에 따르는 게 인간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인간은 합리적인 것 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를 선택하는 것이 본능에 앞서는 일도 있습니다.
인간은 언젠가 죽습니다.
”죽음은 가치를 없애는 것인가?“
이러한 사변적 질문을 하나의 세계에서 논하는 것은, 이미 알 수 없는 논의가 됩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두 개로 나눠서 봐야합니다.
나의 세계(자세계), 타인의 세계(타세계)
나의 세계에서 내가 죽는 것은, 세상으로부터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즉, 가치가 없어(nothing)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에서 봤을 때, 죽음의 목격은 가치를 지닙니다.
그것이 설령 부정적 가치를 지니더라도, 나의 세계는 타인의 세계에 간섭할 수 있는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렇기에 타인을 내 죽음의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두어 내가 삶을 거둔다면, 이는 정언명령에 거스르지 않는 죽음입니다.
하지만, 나의 죽음은 타세계에서 가치를 지닙니다.
가치란 상황과 맥락에 맞게 변화합니다.
그렇기에 나의 죽음은 타인에게 있어, 호재일 수도 있는 것이고 재앙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내 죽음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도전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죽는다는 것은, 본능에 거스르는 행동입니다.
이는 사람이 본능에 따르는 것은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논증합니다.
그렇기에 스스로 죽는 것은 자유의 최대 발현이자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입니다.
이는 타인이 봤을 때,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비극적, 끔찍함 등을 부재로 인한 회의감에 의하여 수식어로 내뱉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경험에 의한 ‘주관‘에서 죽음의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회의감을 ‘경외심’으로 수식하고 싶습니다.
저의 경험적 ‘주관‘은 본능을 거스를 수 있는, 즉 자유를 최대한 만끽한 주체를 인식한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자에 대한 최대의 대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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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의견무시해도된다만 혹시 그 자유를 위한 자살이라는 행위조차 본능에의한거면 어떡해 - dc App
자살이 본능이라면, 이미 모든 사람들은 죽었어야함.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