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에는 본시 틀이란 것이 없다
예의를 지키며 인신모독성 글을 주의하자와 같은 것은 서로의 동의하에 약속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를 말하고 표현하는 거에 제한과 같은 없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를 사각형으로 바라보고 어떤 이는 육각형으로 채워야 하는 형식이 있어야
한다 생각한다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 법칙은 아니지만 자신이 익숙하고 자신이 편리하기 때문에 다른 이도
그렇게 해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진리에 지붕이 있고 외벽이 있지는 아니한다
그런 굴레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곳에 공터를 활용해야 한다
- 아 이곳에 아파트를 짓자는 말이구나
가 되지는 않는다 주차장도 될 수 있고 공원도 될 수 있으며
오피스텔과 빌라 또 정부청사나 상가도 될 수 있는 수많은 활용을 말하는 것임에
아파트라는 굴레를 가진 이는 그런 앎의 연장선으로 선입견으로
바라 보는 것이다 진리에 굴레를 씌우는 것이다
공간의로써 활용해야 하는 이에게 거기 아파트를 지어서 뭐하게요 라 말하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대화를 하기 전부터 수준을 낮추고 낮추고 또 낮추며 어디까지 이해의 수준을 낮춰야
대화를 할 수 있는지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를 수는 있다 하지만 본시 소통이란 협의와 조정으로 맞추거나 필요한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나의 만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판단하여 만족함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수용성을 목적으로 한다
내가 만족하게 내 뜻대로 니가 움직여라가 아니라 내가 만족할 수 있게 내가 변화할 수 있음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의 다른 생각이 계속 연결이 되기 위해서는 맞춰지는 기본 베이스를 먼저 파악하고
조정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철학의 기본 바탕이 되는 것이다
감정을 다투는 것이 아니라 견해를 다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상대의 틀이 나에게 맞춰지지 않는다 하여 화가 나고 밉고 감정의 동요가 생긴다면
그것은 너의 기본이 되는 바탕이 문제가 되는 것이고
그 자격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판단이 있기에 모두 맞추거나 이해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모르더라도 대화의 예의는 갖출 수 있도록 하여라
이것은 자격이 아니라 자질에 관한 문제이다
인간의로써의 부족함을 말하는 것이다
틀을 유지하는 대화도 있고 틀을 벗어나는 초월적 개념의 대화도 존재한다
수준이 높은 자와 수준이 낮은 자의 대화도 존재한다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노력이라도 하는 시늉은 하거라
아니면 관여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진리를 이렇게만 말해야 하는 법칙과 그렇게만 바라 보아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냥 네 스스로 그렇게 바라보고 그렇게 하는줄 알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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