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즈론 


1. 렌즈란 무엇인가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우리가 본다고 믿는 것은 뇌가 효율을 위해 편집 왜곡한 요약본이다. 착시현상이 대표적이다. 뇌가 빠르게 결론 내리도록 설계된 것이다. 원시시대 부스럭 소리가 나면 바람인지 호랑이인지 확인하려던 자는 죽었다. 무조건 호랑이라고 과잉해석하고 도망친 자는 살았다. 우리는 그 후손이다. 


야생에서 생존하고, 사냥하고, 번식만 한다면 뇌가 제공하는 효율적 착각은 유용하다. 하지만 문명을 관리하고 통찰을 갖추려면 이 착각을 넘어서야 한다. 이 효율적 착각을 렌즈라고 부른다.


렌즈론의 목적은  렌즈를 완전히 벗는게 아니다. 렌즈가 있다는 사실을 먼저 알고, 필요할 때 켜고, 방해되면 끄고, 강화하고, 골라서 사용하고, 렌즈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유를 얻는 것. 내 정신의 운영권을 되찾는 것이다. 



2. 물리학, 렌즈를 벗다 

이 렌즈를 자각하는 과정은 인류가 물리법칙을 발견해 온 역사와 닮았다. 

사물이 떨어지는것을 당연하게 여기다가 중력을 발견했다. 

공기는 빈 공간인 줄 알았으나 기압이 작용하고 있었다. 

시공간은 불변의 배경인줄 알았지만 중력에 휘고 관측자에게 다르게 흐른다. 

세계는 단단한 실체인 줄 알았으나 대부분 텅 빈 공간에 확률과 정보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자연을 바라보는 착각에서 벗어나자 인류는 현대 문명을 만들었다. 


3. 마음의 렌즈

마음에도 물리학처럼 착각이 있다. 마음의 렌즈는 8겹으로 구성되어있다. 아래로 갈 수록 더 근원적이고, 본능적이고, 벗어나기 어렵다. 


1) 정당화 렌즈 

이념 도덕 정의 원칙. 이 렌즈가 작동하면 세상을 흑백으로 가른다. 내 관점만 옳고 다른 관점은 틀리다. 대화는 중단되고 토론이 아니라 재판이 된다. 목표는 이해가 아니라 처벌이다. 과거에 같은 믿음을 공유한 집단을 빠르게 결속시켜야 생존에 유리했고 그것이 현재까지 뇌에 강하게 남아있다.


2) 소속 렌즈 

 니 편, 내 편. 우리편 말은 좋게 들리고 남의 편 말은 나쁘게 들린다. 사실보다 진영이 중요해진다. 현대는 소속없이도 생존은 가능하지만 과거에는 무리에서 쫒겨나면 곧 죽음이었다. 진실보다 소속을 우선하는 쪽으로 최적화되었다. 


3) 평가 렌즈

 서열 점수 스펙. 이 렌즈가 켜지면 사람과 선택을 점수로 환산한다. 존재보다 라벨이 중요해진다. 관계가 교류가 아니라 거래가 된다. 이 렌즈는 현대·과거를 막론하고 생존과 번식에 효율적이다. 강자를 빠르게 식별하고, 보호와 자원을 제공할 번식 상대를 고르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람의 영혼을 보는 태도는 삶의 충만함에는 도움이 되지만, 위험과 힘의 분포를 빠르게 계산하는 데는 불리하다.


4) 정체성 렌즈

자아, 에고, 정체성 '나는 이런 사람이다'라는 서사. 일관성을 위해 현실을 왜곡하고 자기에게 취해서 과잉 행동한다. 과거에는 강자나 집단에서 원하는 캐릭터를 선언하고 유지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다. 그래서 아직도 남아있다.


5) 서사 렌즈

원인과 결과, 과거 현재 미래. 인간은 불확실성을 못 견딘다. 그래서 모든 일에 왜? 를 찾고, 사건을 이야기로 만든다. 이것이 서사 렌즈이다. 이 렌즈 덕분에 우리는 예측하고 대비한다. 과거를 분석해 행동을 수정하고 미래를 대비한다. 문제는 과잉작동이다. 이미 지난 과거에 집착하고 미래를 걱정하다 현재와 행복을 잃는다. 


6) 의미 렌즈

가장 투명해서 낀줄도 모르는 렌즈이다. 실제 세상은 연속되어있고, 경계도 없고 고정된 것도 없다. 하지만 그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세상을 다루고 조정하고 가리키고 소통하는 것 모두 불가능하다. 그래서 인간은 세계를 개념화 하고 언어로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만든다. 


 본질이 달이라면 개념과 언어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문제는 손가락을 달로 착각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대부분의 논쟁은 서로 다른 개념과 언어를 쓰고 기의와 기표를 오해하면서 벌어진다.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 모양을 두고 싸운다.


 우리는 의미렌즈를 끼고 언어라는 뭉툭한 손가락을 휘두르며 이것저것 가리키며 소통하며 살아간다. 이 사실을 알기만 해도 본질에 다가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은 과거나 현재나 똑같다. 의미렌즈는 눈으로 눈을 볼수 없듯, 도구로 도구를 해부해야 하기때문에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렌즈이다. 하지만 이 렌즈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면 문명 수준의 구조를 이해하고 설계할 수 있다. 의미렌즈는 모든 프레임의 프레임이다.


7)  정서 렌즈 

희노애락. 정서에 따라 현실을 왜곡한다. 현대에는 정서가 과열되면 판단을 망치지만 과거에는 감정이 즉각적 경보 시스템이었다. 오래 생각하다 죽느니 공포 불안에 바로 반응하고 분노로 상대를 겁주고 웃음과 눈물로 구성원과 연대해야 했다. 


8) 감각 렌즈

배고픔 통증 피로 오감. 이 렌즈가 켜지면 시야가 좁아지고 내몸의 상태가 세상의 모든 것이 된다. 이 신호는 생존과 직결되므로 가장 강하고 벗어나기 어렵다. 



4. 결론

이 여덟 개의 렌즈는 나쁜 것이 아니다. 모두 생존을 위해 만들어졌고, 실제로 오랫동안 우리를 살려왔다. 문제는 렌즈가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렌즈가 곧 세계라고 믿고 살아가는 상태다. 그 순간 우리는 선택하는 존재가 아니라 렌즈에 끌려다니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왜 저 사람은 저럴까”, “왜 내 인생은 이렇게 됐을까”를 묻는다. 많은 경우 답은 사건이 아니라 렌즈에 있다. 같은 현실도 정당화 렌즈가 켜지면 싸움이 되고, 소속 렌즈가 켜지면 진영이 갈리고, 평가 렌즈가 켜지면 관계가 거래가 된다. 서사 렌즈가 과열되면 현재를 잃고, 의미 렌즈에 갇히면 손가락을 붙잡고 달을 놓친다. 정서와 감각렌즈가 과열되면 내 컨디션이 세상의 전부가 된다. 


렌즈론의 목표는 자유다. 

 

집착으로부터의 자유 

불안으로부터의 자유 

비교로부터의 자유 

공포와 박탈감으로부터의 자유 

개념과 언어의 감옥으로부터 자유


그리고 한 단계 더 올라가고자 한다면 이 자유는 더 깊은 깨달음과 초월로 가는 발판이 된다. 그 이후의 경지는 아직 모르므로 여기서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