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이란, 배워서 알게된 것을 뜻합니다.

이 지식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세상의 한계를 말합니다.

즉, 지식이란 인간에게 있어서, 끝을 맞이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확장 되어가는 끝없는 고유의 산물임을 뜻합니다.

하지만 이 지식은 ‘배움’이라는 것을 통해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생각하는 나와 수업을 듣는 나는 같은 지식의 확장인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물체의 원료는 선험적 존재인지, 후험적 존재인지 생각하거나, 인간의 삶은 왜 행복하지만은 않은지에 대하여 깊게 논의를 하곤 합니다.

보편 타당한 지식이야 말로, 지식인 것인가? 라는 질문에 현재 다달았습니다.

그렇지만, 보편타당한 지식은 누군가에게 있어서 개인적 고찰의 산물에 지나지 않은 논리임을 생각하니, 저의 개인적 고찰 또한 보편성만을 인정 받는다면, 다른 이들의 글과 차이점이 무었인지 고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부터의 세계’를 현재 2년 째 계속해서 읽고 있지만, 그는 칸트의 사상 하에 자신의 세계관을 구축했습니다.

보통 그의 저서를 원문으로 접하는 분은 잘 없으시리라 생각합니다만, 그의 원문을 긴 시간동안 접한 결과 제가 내린 답변은 하나입니다. 

‘궤변‘입니다.

논리학적으로나 예술적인 부분에 대한 고찰은 가히 훌륭하다 평가할 수 있지만, 그의 형이상학적 논리들을 현대에 들어서 메타적으로 본다면, 예시로서 의지와 표상의 관계 등 존재론적, 인식론적 해석으로 들어가자면 과학적 논리는 거의 전무합니다.

또한 그는 칸트의 ‘지성‘에 대하여 너무나도 넓은 폭의 논리를 대신하는 하나의 해궤망측한 기계라고 표현했는대, 이 또한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계념 또한 그 기계와 다를 바 없는 형이상학적 존재를 말합니다.

즉, 지식이란 결론적으로 자신이 생각하고 그것이 참이라고 논증을 한다면, 이는 지식의 확장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에 도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다른 이들의 철학을 배우는 이유는 그 사상들을 원료로 자신의 철학을 세우는 것이 저는 철학의 목표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 사상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을 할 뿐이고, 그 철학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묻는 것이 다입니다.

‘나’의 철학의 발전은 ‘지성’의 확장인 것인가?라는 질문은 결론적으로 ‘참’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자신이 세운 공리에 대해 깊게 논의하는 것 만큼 자신의 신조를 널리 알리겠다는 그 일념은 가히 인간, 또 인간적입니다.

그것이 인류의 ‘지식‘의 확장인 것입니다.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