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적 이론, 즉 'ism'은 세상의 단면을 잘 드러내는 일관성 있는 소설일 뿐이다. 나는 이 도구들이 진리인 양 휘두르는 교조주의를 경계한다. 그것은 현실과 멀어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지지하는 '반출생주의'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2년 전 결혼한 친구가 아이를 낳았다.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애기 진짜 귀엽다"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내 이면에는 서늘한 모순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반출생주의의 관점에서 탄생은 고통의 시작이며, 부도덕한 투입이다. 나는 아이의 탄생을 보며 '안타까움'과 '연민'을 동시에 느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지적 비겁함'이라 비난할지 모른다. 탄생(원인)이 부도덕하다면 그 유지(결과) 또한 승인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적 귀속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사실'과 '가치'의 층위를 분리하고자 한다. 존재의 탄생이 해악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나, 이미 던져진 존재에게 우리가 가져야 할 당위적 태도는 냉소나 비난이 아닌 '삶의 질에 대한 기원'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고통과 쾌락은 비대칭적이다. 태어나지 않았다면 고통도 없고 쾌락의 부재 또한 악이 아니지만, 일단 태어난 존재에게는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얻는 것이 실존적 과제가 된다. 여기서 나는 '낙관적 허무주의'를 결합한다. 존재의 탄생은 비극적이지만, 그 비극이 존재의 연속까지 비극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오히려 탄생이 비극이기에, 우리는 그 안에서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야 할 '실천적 의무'를 갖는다.
물론, 친구에게 이런 서늘한 진실을 들이밀지 않는 이유는 오만함에 대한 경계 때문이다. 내 사상의 잣대로 타인의 인생을 재단하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다. 또한, 인간이 지닌 '낙관 편향'은 생의 고통을 견디게 하는 유일한 마약성 진통제다. 사상의 선명함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마지막 진통제를 빼앗는 것이 과연 고결한 사유인가?
나는 출생이라는 시스템적 폭력을 비판하지만, 그 시스템 안에서 함께 고통받는 개별 주체를 미워하지 않는다. 이미 주사위는 굴러갔다. 그렇다면 최대한 행복하게 사는 게 최고다. 여름날 시원한 수박 한 조각에 즐거워하며 살길 바라는 나의 '축복'은, 사실 사상적 변절이 아니라 비극의 구조를 공유하는 존재들 사이의 가장 깊은 연민이다.
나는 반출생주의라는 날카로운 칼을 품고 살아가되, 그 칼날로 친구의 손을 베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사상은 세상을 난도질하는 무기가 아니라, 이 부조리한 생을 함께 버텨내는 유용한 도구여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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