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를 말할 때 , 무에서 유를 만들어 냈다라는 표현을 잘 씀. 없던 걸 있게 만들어 냈다. 근데 이걸 특정 단위 기준(개인단위이든 조직단위이든) 비교적 혼자서 했다고 하면 독창성이 있다고 표현함.
그런데 무에서 유가 있을 수가 있나? 라는 물음을 보자. 이 無가 지칭하는 바가 무엇이냐. 재료, 내용 그런 것들임. 그렇다면 有가 지칭하는 바가 무엇이냐. 이것도 재료, 내용 그런 것들임. 따라서 어떤 내용 없이 새로운 내용이 나올 수 있냐는 물음으로 볼 수 있음. 정확하게 여기에서 이 재료, 내용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인지 보자. 그것은 물체일 수도 물체가 아닐 수도 있음.
이런 생각을 해보자.
애플에서 컴퓨터랑 핸드폰을 합쳤다. <합쳤다> 즉 조합했다, 연결했다, 편집했다. 그렇다면 있는 것들을 이리저리 해제하고 합치고 하다보면 세상에 없던 것이 나올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이 첫번째 생각이고. 단순하게 오로지 이 생각을 중점으로만 다 파악하려고 하면, 모든 것은 <짜집기>이다. 아이디어도 짜집기를 하다보니까 나오는 것. 그렇다면 짜집기를 하기 위해서 재료나 내용을 어디서 가져올까? 라면서 남의 것을 도용하는데 정신을 집중하게 됨. 그리고 스스로는 그런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것을 공개하지 않으려고 하지. 이것은 나 스스로는 단견이라고 생각하지만, 뭐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들임. 한화에서 벤처기업 M&A나 투자 실사를 한답시고 그 벤처기업이 기술을 공개하게 만든 후 실사를 해. 실사 후 M&A나 투자 결정을 철회하고 비슷한 기술로 자회사를 만들어버림. 실제 이게 바로 대기업이 벤처기업을 좀먹는 행위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음. 아마도 당했다고 생각하는 쪽이 그렇게 주장하겠지. 피해를 받았다고 주장하는(벤처기업측) 입장에 따르면 한화는 이미 재료나 내용들이 다 있음. 인력도 충분함. 어떤 재료는 같은데 어떤 방법론이나 적용방식의 변화 혹은 '어떤 재료를 조합했는가'라고 하면서 조합방법은 아니까 그 "어떤 재료"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행위. 이런 것들을 하는 것. 한화가 아니더라도 이런 방식을 채택하는 건 다른 영역에도 셀 수 없이 많이 있음. 예술쪽에서도 무얼하니. 이들은 물체 중심이 아니지. 도대체 이들이 만들어 낸다는 성정체성이 몇 개인지 알 수가 없음. 내 입장에서는 괴랄함. 여하튼 이 문단에서는 <합쳤다>가 주제임.
위에서는 어떤 조합방식의 변화, 개념의 정립을 말했음. 애플 사례에서 휴대폰 + 소형무선통신단말기를 합칠 생각을 애플이 했는데, 그 특정생각. 다른 무엇도 아니고 휴대폰. 다른 무엇도 아니고 컴퓨터. 그 두 개를 합칠 생각을 가리켜 독창성이 있다고 하고. 이게 아이디어. 별론으로 스티브 잡스가 소니 빠돌이었고 아이폰이 어떻게 나왔는가?를 설명하는 일화는 상당히 재미있으니 한 번 찾아서 읽어보길 권장함. 이건 무엇이냐? 그 아이디어 자체가 세상에 없었다가 생겼지. 그래서 이걸 아마도 아이디어가 없었던 상태 즉 無에서 아이디어가 생겨난 상태 즉 有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함.
돌아와서. 그런데 위에서 조합방식, 개념의 정립만 말하지 않았지. 다음 생각으로 위에서 섞인 것을 분리해보자. ① 내용의 변화 관점에서도 보자는 것임. 예를 들어 스마트폰은 어떻게 나왔는가? 스마트폰은 소형 컴퓨터인데, 기존의 큰 컴퓨터 + 무선통신단말기(핸드폰)을 합친 것임. 여기서 내용, 재료는 컴퓨터와 핸드폰임. 두 개를 합쳐서 스마트폰이라는 이전에는 없던 것이 만들어져서 새로 나옴. 이런 것도 창조적이라고함. 즉 원래 유에서 유가 나오는데, 앞의 유는 원래 있던 것이고 뒤의 유는 없던 것이 새로 생긴 것임. 有 즉 휴대폰과 컴퓨터. 이거 원래 있던 것이잖아. 그렇게 있던 것에서 스마트폰. 정확하게 애플사의 아이폰이라는 그 이전 세상에서는 없던 조합물이 나옴. ② 근데 그 아이디어가 <어디에서> 나왔는가. 無의 지칭 대상을 아이디어로 하면, 무에서 유가 나온 것. 그런데 그 아이디어는 어쨋든 컴퓨터와 휴대폰이라는 有<에서>나왔지. 그래서 말이 혼동된다고 생각함. 내 생각에 그 조합방법은 내용을 고려하더라도 지성의 작용이 없으면 나올 수 없음. 만약에 지성이 발휘되지 않았을 때에는 컴퓨터를 보면 컴퓨터밖에 생각하지 않고, 휴대폰을 보면 휴대폰밖에 생각하지 않을 것임. 그 바운더리 내에서만 바운더리라는 것이 있는 줄도 모른 상태로 생각한다는 뜻. 그러면 계속 '무언가에 비추어서 생각한다'밖에 하지 못함. 재해석도 없고, 지식의존적이게 됨. 아무리 무엇을 설명해도 자신이 아는 것으로 돌아감. 사람에 대한 종속이 아니더라도 다소 그런 상황의존에서 벗어나 시야가 넓어지는 것은 지성이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이는 마치 해외 언론에서 말하는 정보를 보고 시야가 넓어졌다는 말이랑은 다름. 그건 여전히 상황의존적임.
따라서 내용변화를 중점으로 볼 때에는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은 없고, 유에서 유가 나올 뿐인데 앞서 말했듯 새로운 유인 것임. 그 새로운 유에는 기존의 유(핸드폰, 컴퓨터)가 요소로 들어가 있음.
결론적으로 창조를 생각할 때에도 줄곧 이 갤러리에서 말했지만, 지성이 중요함. 그리고 그 지성은 본능이나 감정 혹은 단순 정보나 지식의 획득... 뭐랄까 이건 기억한다랑 연관이 있는데 만약에 지성과 지성이 아닌 것을 구분해서 다이아몬드 원석 깎아서 빛나는 다이아몬드 부분만을 보자는 식으로 비교적, 최대한 지성이라는 성질을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기억과는 관련이 적음. 그리고 이게 아마도 논리임. 왜냐면 논리에는 내용이 없거든. 이건 파악도구고 훈련을 통해서 그러나 어떤 감정과는 관련 없는 영역에서 내재화시킬 수 있는 것이지 그 논리에 욕구나 느낌이나 또는 어떤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님. 그리고 이 지성으로 개념을 만드는 것이지 개념 그 자체도 아님. 그래서 논리적으로 무언가를 파악할 때에는 무엇에 비추어서 생각한다거나 내가 아는 것에 의해서 생각한다는 표현을 쓸 수 없음. 창조는 지성에서도 나온다.
그치.. 모르겠구만.. 하지만 그럼에도 창조라는 단어가 있음에 주목해볼만하지 않나.. 단어의 사용이 천지창조 같은식으로 사용되는 편이니까 그것은 신만이 가능하다.. 이렇게 생각하는건 아닐까
종교는 굉장히 자기중심적이고 상황의존적인 역사가 있고, 종교인들도 그런 경향이 있음. 이게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쪽은 정신적으로 원시부족민스러움을 넘어서 생명의 근원. 생명이 아니더라도 어떤 근본적인 것. 여기로 들어가고 거기로 들어가면 하느님에게 복종해서 나머진 모두 평등하고 원죄가 있다는 식으로 가는 것. 그렇게 원죄가 있는 자신의 복종 대상은 신이지. 신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창조를 했고 모든 것을 다 설계했고 그래서 전지전능이겠지. 절대자를 항상 두잖아? 종교인에게 창조는 창조가 가리키는 바를 보지 않음. 걔네는 창조가 의미하는 내용을 봄. 그래서 사실 무언가 새로운 걸 만들었음에 집중하지 않고, 새로운 걸 만든 그 신이 절대자이고 거기에 붙어 먹겠다는 의미가 있음.
결론적으로 자신들에게 다가온 어려움, 고통 이런 것들 때문에 정신적으로 살기 위해서 신에게 기대는 것이라고 생각함. 그래서 이들은 뭐 삶이 고통이라고 하는 것 같음. 원죄가 있는데 삶이 고통이 아니겠어. 그리고 고통이여야지 고통이 없으면 신에게 왜 기대겠냐. 그래서 고통이 있어야 한다는 당위를 설정해 놓고 그게 변하지를 않는 것이라고 생각함.
@글쓴 철갤러(1.222) 그러면 이제 무언가를 만든단 의미에서의 창조를 따진다고 할때.. 사실 창작이란 단어로 교체해서 써도 맥락상 크게 달라지진 않는듯하다.. 근데 왜 그럼에도 신학적 의미가 상당히 섞이는 창조라는 단어가 궁금했던걸까? 이게 모르겠는 부분..
@글쓴 철갤러(1.222) 창조는 무에서 유를 만듦.. 신학적 의미가 섞여있음 애초에 불가능함.. 이런식으로 따진다면 "으음.. 이건 신학적 서술에 쓰는 단어구나.." 하면 되잖아? 한편, 지적재산권이라던가 표절시비같은.. 다른사람의 창작물을 도용하는 행위는 "도용"이라고 표현되기도 함.. 으음... 모르겠어
@ㅇㅇ(223.39) 궁금... 그러니까 그 호기심이 왜 창조라는 단어에 방향을 두었느냐 하는 것? 생각 대상이 다른 것도 아니고 왜 굳이 창조이냐?라고 나에게 물어보면, 디폴트값을 '생각해본다'에 두고, 지금 창조라는 단어를 봐서 그랬음. 별론으로 여기서 무언가에 비추어본다. 내가 가진 지식에 비추어서 창조를 본다만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계속 해당 지식으로만 회귀해버림. 여하튼 그래서 동기는 호기심인데, 그러면 호기심이 왜 있느냐? 또는 호기심이 왜 발동되었느냐? 라는 걸 생각해보면, 일단 이런 류의 호기심을 지적 욕구라고 표현할 때에는 그런 욕구의 근원이 무엇이냐? 라는 물음으로 생각해볼 수 있음. 근데 나는 이런 식으로 욕구차원으로 파고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이런 방식의 근원찾기식, 혹은 어떤
@ㅇㅇ(223.39) 욕구로 모두 정렬시키려는 방식보다는 지성의 작용, 지성의 반응 이런 부분을 주목함. 반응물이 창조라는 단어였고 반응주체가 지성이고. 그래서 나는 이런 걸 설명할 때 항상 혼합되어있다고 봄. 분별하려고 하나, 정확하게 이게 분별될 수 없고. 그러나 분별되는 부분이 있다고 함. 또한 그 뭐랄까. 이건 신학적 서술에 쓰는 단어이구나? 라면서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나아가는 부분도 이 부분이 욕구에 가깝나 지성에 가깝나? 라고 한다면 나에게는 지성에 좀 더 가까움. 마치 생각이 생각을 유발한다와같음. 뒤에 지적재산권이나 표절시비에서 도용문제는 네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모르겠음.
@글쓴 철갤러(1.222) 으음.. 그렇구나 나도 그런편이다 나도 너랑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완전히 같은건 아니겠지만.. 나도 갤에서 흔히 보이는 데카르트의 회의적 방법론을 생각하다가.. 의심을 의심하는건.. 안되는데 이게 어떻게 루프에 빠지지 않았나.. 를 생각하다가 호기심이 있었고 호기심이 관찰을 했기에 루프에 빠지지 않았다 의심을 의심한다고 생각하지만..
@ㅇㅇ(223.39) 그리고 생각이 생각을 유발한다는 표현에서. 이거는 초등학생 때 배우거든. 동그라미 그려놓고 동그라미 안에 예컨대 우산이라는 단어를 써. 그 다음 그 우산을 중심으로 파생되는 것들을 마치 연관어 뽑아내듯 주변에 써. 우산이면 비, 우비, 흐린하늘, 고인 물웅덩이 등등 그런 연상기법. 상황의존적 사고. 이런 것이 있고, 하지만 그게 있다고 해서 그것만 있느냐? 라고 물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임. 우산을 요소로 쪼개서, 우산에는 천같은 것이 있고 그 천을 지지하는 철제 구조물이 있고, 플라스틱 손잡이가 있고. 우산을 접었을 때 팔랑거리는 천을 잡아주는 띠와 그 띠가 풀어지지 않게 하는 장치가 있고. 근데 이런 분석도 기억이나 연상에 의존하고 있음. 그러나 눈앞에서 우산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어떠하겠음?
@글쓴 철갤러(1.222) 의심의 작용을 호기심이 관찰했다고 생각하는편임.. 그냥 궁금해서가 대체로 이유가 많지.. 그리고 뭐랄까.. 나만 이게 궁금한건가?? 이건 다른거긴한데.. 뭐 그런 이유에서 너랑 같이 대화를 하고있는거지 너도 궁금했단걸 알게되어서 너무 좋구만..
@글쓴 철갤러(1.222) 내 뇌속에 장기기억을 꺼내올 필요가 없겠지. 기억 해봐야 몇 시간 정도 실제 눈으로 감각한 것을 단기로 기억하면 족하겠지. 한편으로 이게 그럼 실물인 우산을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산이라는 단어를 본다면은 어떠하겠음. 지금 우리가 댓글 읽고 있는 것처럼. 그러면 지금 이거는 우산이라는 단어를 보면서도 우산을 실제로 본 그 시각에 의존하지 않고 있지. 그래서 어떤 기록물이나 문건에 있는 문자로 우산을 검토하면 이건 지성적 작업에 가까운 것 같음.
@글쓴 철갤러(1.222) 무언가가 파생되는것.. 그리고 무언가의 구성물을 보는것.. 이거는 기호로 대체하면 꽤.. 그럴듯하게 여겨지는 뭔가가 나오는데 뭐냐면 생각의 차수가 늘어나는것일 뿐임..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음..
@글쓴 철갤러(1.222) 뭐랄까... 근데 이제 그 무언가를 연상해서 다룬다고 하는게 실제로 정확한 연상이 되는거냐는 또 다른문제지 보통 흐릿한 아이콘을 떠올리고 내가 이걸 연상했다고 여기고 세세한 디테일은 놓치기 쉬우니까.. 또.. 우산이란 단어를 봤을때 우산을 연상한다고 하면 이게 검은우산인지 분홍우산인지.. 서로 다르게 생각할수도 있는거고
@ㅇㅇ(223.39) 데카르트의 회의적 방법론 같은 것은 솔직히... 나는 존재나 실존에 예전에 관심이 있었어서 데카르트가 한 그 생각과 나의 존재를 연결시키는 방법을 봤었음. 근데 일상에서 아니면 이렇게 생각할 때 시시때때로 존재나 실존을 찾지 않고 사는데 그것을 왜 찾는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음. 어떤 이는 '지지' 라는 말을 사람이 인정해주고 호응해준다고 파악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똑같이 '지지'라는 표현을 동의로 쓰는 영역이 있음. 전자는 사람이 들어가고 후자는 사람이 빠짐. 의심도 마찬가지로 이걸 데카르트와 연관지은다고 보면, 데카르트는 사람을 뺀 것 같음. 그러면 데카르트의 의심에는 고통은 빠져있는 것 같기도 함. 그래서 네말대로 관찰자 시점. 그런데 그 관찰자 시점이 본능에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던.
@ㅇㅇ(223.39) 그런 것? 이런 측면에서 호기심을 욕구차원에서만 혹은 어떤 본능차원에서만 설명하지 않으려고 함.
@글쓴 철갤러(1.222) 그렇구만 모르겠어 요즘은 그런생각도 하거든 뭐랄까... 망각을 기능적으로 이용할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하다가 보통은 그냥 주의가 돌려지면 알아서 까먹어 지거든? 사건 => 경험 => 망각 이거인데 잘해봐야 사건 => 경험 => 해석 => 망각 이거고 이걸 사건 => 경험 => 해석 => 분류 => 망각 이게 되는지가 궁금했음
@글쓴 철갤러(1.222) 근데 나는 그냥 냅둬도 알아서 잘 까먹는데 이걸 굳이 분류까지하는.. 세세한 뭔가를 더 했는데 망각이란게 결국 까먹어야 되는거 잖아? 근데 이제 분류하는 과정에서 기억이 더 붙잡힌다던가 그 과정에서 망각이 뭔가 잘못된다던가.. 그거는 좀 곤란해지는 방향이 아닌가 싶단거지.. 그래서 모르겠어 나도
@글쓴 철갤러(1.222) 호기심을 본능에서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고 무언가의 다른세분화된것으로 여기고 이걸 뭐.. 나쁘지 않다 이거야..으음.. 모르겠네.. 난 호기심을 일단 호기심으로 두고 이게 재밌다고 여기는 편이긴 한데 다른 뭔가라고 건드리긴 조금 꺼려지는 부분인거야.. 암튼 그래
@글쓴 철갤러(1.222) 난 일단 그렇단건데 넌 다를수도 있고 뭐 그런거지 나도 잘모르겠음
@ㅇㅇ(223.39) 생각 대상이 늘어남을 인식 범위가 각각 넓어졌다고 보면 될 것 같은데. 무언가를 종합고려할 때, 종합 고려하는 대상의 층위가 무엇인가의 측면에서 그 효과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될 거 같음. 대상의 층위가 우산만이면, 우산의 요소를 보겠고. 대상의 층위가 대상의 필요성이면 그래서 요소가 왜 그래야하는가?의 기능측면에서 보겠고. 그렇다면 그런 기능이 왜 있는가?는 환경을 보겠고. 한편으로 그걸 판매하는 상인 입장에서는 그 우산을 자회사의 재무, 영업조직, 예상되는 이익(마진률), 마케팅을 위한 판매장소의 문화나 비용 등을 고려해서 보겠지. 뒤에 필요성이나 상인의 측면에서는 어떤 사람이 우산을 봤을 때 혹은 내가 그 우산을 봤을 때 둘 다 혹은 불특정 다수가 그걸 분홍 우산으로 어떻게 보게 되는가 그런 다수나
@ㅇㅇ(223.39) 둘 간에 다르게 지각할 수도 있다고 하는 바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음.
@ㅇㅇ(223.39) 사건 => 경험 => 해석 => 분류 => 망각. 이게 됨. 그래서 그거를 망각하기 전에 분류작업에서 분류한 걸 기록하면 됨. 그리고 까먹는 거. 까먹으려고 의도해서 까먹는 게 아니라 그냥 까먹어 짐. 하지만 이 망각이라는 게 영구적인 망각이냐. 즉 내가 경험하고 해석하고 분류까지 했던 사건에서 각각이 완전 망각되느냐? 그건 아니라고 생각함. 단지 지금 의식 속에 없는 것임. 그 지성이라는 영역은 내용이 없어서 솔직히 망각? 원래 얘는 기억이 없어서 고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음.
@ㅇㅇ(223.39) 아... 본능에서만 설명하지 않으려는 것이지, 위에서 말했듯 이게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음. 그래서 본능으로만 정렬하지 않으려고 말했던 거지.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그걸 자동적으로 하고 있어. 다른 무언가라고 하기에는 꺼려진다는 건 왜지.
@글쓴 철갤러(1.222) 그렇구만 나랑 꽤 비슷하긴 하네 사건 => 경험 => 해석 => 분류 => 망각 에서 분류를 기록하면 되긴하지 난 이게 외부기록없이 내부에서 가능한지가 모르겠단거고 기록은 따로 하는편이지 뭐 대단할거라기보단 그냥 일기쓰기잖아? ㅋㅋ 아무튼 본능이라는 정렬축만 쓰지 않는다고 하는거면 나랑 비슷하긴 해
@글쓴 철갤러(1.222) 다른무언가라고 하기엔 꺼려진다 으음..그건 좀 막연한거지 난 호기심을 일단 호기심인 상태로 잘 쓰고 있는데 이를테면 이런거야 내가 감동을 느낀 어떤 대상이 있다쳐 근데 내가 감동이 어떤 조건에서 생기는지를 잘 생각해서 감동을 연출할수 있다 치자 그리고 감동의 구조를 환원해서 뭐뭐가 있고 뭐뭐가 움직이면 감동을 느끼게 된다고 하자
@글쓴 철갤러(1.222) 그러면 뭔가 버튼을 누르면 감동을 느끼게 되는 그런게 되는건 아닌가? 하는 그냥 막연한 꺼려짐일 뿐임 뭐 대단한 의미가 있는건 아님.. 아직 안해봐서 모르겠어 궁금하기도 해
@ㅇㅇ(223.39) 분류가 '외부기록 없이' 내부에서 가능하냐를 물었을 때. 이 기록을 한 번 볼 필요가 있음. 문자가 없었던 시절에는 행동, 음성이나 어떤 사람의 말로 외부에 표현을 했을 것. 그럼 그 표현을 수신할 수 있는 생명체가 기록대상일 수 있어. 그 때에는 표현이 단순해서 이걸 언어라고 명명하기에는 어렵지만, 예컨대 어제 내가 무슨 표현을 했다. 그럼 그걸 다른 생명체가 기억하고 똑같이 모방하는 정도. 그럼 그 모방으로 나를 기록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단순하기 때문에 그 집단에서는 금방 퍼지고 기록이 비슷비슷했을 것이라서 그정도 한계 내에서 내부가..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내면이 분류되었을 것임. 내면의 분류 대상은 상황이나 때에 따른 감정 그런 것이겠지. 그래서 이건 본능이나 감정에 의존하는 반응이 분류된다
@ㅇㅇ(223.39) 그런데 또 여기서 주안점이.
@글쓴 철갤러(1.222) 그렇구만.. 역시 문자가 문화누적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고 보는부분이 있나보네 뭐랄까... 문자로 기록을 하면 작업공간에 미해결상태가 해결되었다고 여기게되서 생각을 더 붙잡지 않고 다른 생각을 하게되고.. 문자를 통해 압축과정이 생기고.. 뭐 그치..
@글쓴 철갤러(1.222) 보통 난 이걸 "외부고정점"이라고 표현하는 편이긴 해.. 외부고정점은 사람일수도 있고 글로 적어둔 무언가일수도 있고 뭐 그렇지..
@ㅇㅇ(223.39) 어떤 경전같이 즉 성경이나 사서삼경같이 문자로 딱 박아놓고 글자는 바뀌지 않는 상태로 기록되어있는 책을 두고, 그걸 계속 보면 내면 분류가 어떻게 되느냐임. 그럼 그걸 계속 본 사람은 또 내면이 비슷비슷해짐. 그리고 여기에서 경전 필사든 소리내어 읽든 그런 행동이 있겠고. 이런 어떤 단계를 따로 구분하는 이유가 논증하는 건 또 다르기 때문임. 이 논증부터는 개인별로 내면분류가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임. 살면서 자신의 감정이 반응을 보였던 지점을 중심으로 하지만 좀 더 섬세하다고 보임. 지금까지도 분류 대상이 내면의 감정 이런 것들임. 여기에서 또 보아야할 것은 형식논리를 내재화시킨 부분인데. 그 형식논리는 전술하다시피 내용이 없음. 그리고 이 형식논리로 이미 느꼈던
@ㅇㅇ(223.39) 감정반응들을 정리하는 네 말마따나 사후에 하는 감정발동조건 정리같은 것을 하면, 감정 반응 속도가 빨라지지 않을까 싶음. 농경사회 비포장길을 차타고 다니다가, 정비된 길로 갈아놓으면 빠른 것처럼 말이지. 이렇게 속도 빠름이 하나가 있고. 다음으로 버튼 누르면 감동 느끼게 되는 거는 동일 감정이 튀어나갈 수 있고 버튼이랑 연결되어있는 통로를 많이 뚫어버릴 수는 있다고 생각함.
@글쓴 철갤러(1.222) 그 내면이 비슷비슷해짐이 문화, 언어 별로 다르다고 여기고있고 그 비슷해짐의 형성을 "좌"라고 표현하고 있긴 함.."관점"과는 다름.. 동일 언어를 쓰는사람이 각기 다른관점을통해 해석하는건 가능하다고 여기고 있음.. 하지만 언어나 문화등을 통해 만들어진 "좌"가 다른 부분..
@글쓴 철갤러(1.222) 이를테면 해외의 문화를 들여오고 받아들이는건 한국좌로 재해석 되기 때문에 외국의 본래의 것과는 달라지는 경향성이 있다고 여기고 있음.. 기독교가 한국에와서 뭔가 달라진다던가.. 그런것을 좌가 다르다고 여기고 있는 편임.. 불교도 한국불교와 일본불교가 다름.. 그리고 이 비슷비슷해짐이.. 의식의 작용이 아니라 전의식적이고 두정엽의 반복연산에서 나오는게 아닌가
@ㅇㅇ(223.39) ㅇㅇ 근래에는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용례가 있는데 원래 과거 역사에서는 문자를 모르는 이에게는 문화가 없는 것으로 봤었음. 문자를 모르는 양민들은 양반이 하는 제사라는 문화를 그냥 따라하는 거가 다고. 그리고 이런 의전행사하는 걸 전세계에서 다른 형태로 다 했던 거고 따라하는 것도 마찬가지인듯. 돌아와서 외부고정점.. 외부기록 맞지. 그걸 통해서 내면이 분류된다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함.
@글쓴 철갤러(1.222) 그런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음.. 그냥 그럴듯한 소리임 아닐수도 았는데 그냥 그런게 아닐까..? 하고있단거임..
@글쓴 철갤러(1.222) 그렇구만.. 꽤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네 으음.. 신기하네
@ㅇㅇ(223.39) 좌가 고전 논리학에서 놓임새같은데? 위에서 말하는 상황의존적인 부분. 그런 것일듯.
@글쓴 철갤러(1.222) 아 그래?? 원래 있는 말이야? 이건 또 신기하네 놓임새라 어감이 내가쓰는거랑 비슷한가 싶기도 해 일단 난 이걸 어떤자리에 앉아있음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 뭐냐면 사용언어나 문화가 반복되면서 특정 연산이 반복적으로 사용되게 되면서 이를테면 비교연산 경로연산 같은게 어떤.. 문화별로 어떤 축의 조합이 반복적으로 비슷하게 형성되는 경향성이 있는게 아니냔거임
@글쓴 철갤러(1.222) 그래서 똑같은 내용을 읽어도 언어-문화별로 해석이 달라지게 됨.. 주로쓰는 연산이 달라져버려서.. 그래서 좌표라고 하기엔 좌표란 표현이 너무 고정되어있는거 같고 서있다기엔 잘 움직이는 부분도 아니고.. 그래서 어떤자리에 앉아있음 인거고 그래서 좌표가 아닌 그냥 "좌"라고 한거야
@글쓴 철갤러(1.222) 그리고 이 좌는 자동화가 되어있는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음 그리고 자판을 치는것을 연상하는편임 우리가 키보드 자판을 누를땐 아무런 의식이 없이 자동으로 어떤 다른생각을 함과 동시에 키보드의 자판을 누름.. 그런식으로 형성되어있는 어떤 연산이 사고에 영향을 이미 주고있다고 여긴단거임..
@ㅇㅇ(223.39) 논리학에는 사람이 없어서 사람도 사물처럼 봄. 여기에서 놓임새는 공간과 관련 있음. 그 사물이 어떤 장소에서 어떤 형태를 취하고 있는지 그 방식이 무엇인지. 이런 거. 이 공간을 한반도나 서유럽대륙, 혹은 중앙아시아, 남아메리카 이런 곳으로 설정하고, 사물(사람)이 그 특정 공간에 놓여져 있을 때 그 사람이 하는 행동이 다르잖음. 우리나라에서 손가락 브이표시는 나쁜 뜻은 아닌데, 영국같은 곳 가면 브이표시하면 모욕을 주는 표시지. 그 공간은 자연환경도 다르고, 네 말대로 언어도 다르고 문화별로도 달라서 위 손가락 표시같이 해석이 달라지겠지.
@ㅇㅇ(223.39) 좌가 자동화되어있는 편이 맞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사서삼경 읽지 않고 아무리 유교를 욕해도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욕하는 유교문화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 거의 자동화된 부분이라고 여김. 네 말마따나 그게 사고에 영향을 주고 주는 빈도가 그 공간이나 문화 내의 사람을 어떤 방식으로든 만날 수록 많아지니까 못벗어난단 거임.
@글쓴 철갤러(1.222) 알듯말듯하네 비슷한거같은데 놓임새라는게 더 큰범주인거같다 그러니까 놓임새라는 것의 범주에 좌를 넣을수는 있어보이긴 해 너가 어떤 공간을 중앙아시아로 설정한다고 하는것처럼 놓임새를 좌라고 설정하는것은 가능한거 같긴한데 으음.. 그러니까 놓임새를 공간이라고 하고 이것에 좌를 담을순 있을거 같은데... 같다고 하긴 뭔가 좀.. 그렇단거지 구조가 비슷하긴 함
@글쓴 철갤러(1.222) "우리나라에서 사람들이 사서삼경 읽지 않고 아무리 유교를 욕해도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욕하는 유교문화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이 있음" 이게 꽤 적절한 사례로 여겨짐 이게 벗어나지 못함인지 어떻게 잘 연습하거나 훈련하면 벗어나지는 부분인지 그걸 잘 모르겠긴 하지만 그부분을 좌라고 표현중임
@글쓴 철갤러(1.222) 으음.. 일단 너가 말한걸 더 생각해봐야 할거같음.. 뭔가 내가 흐름을 끊는거 같아서 미안하지만 아무튼 재밌었음..
@ㅇㅇ(223.39) 좌는 어떤 내용의 원리를 표현한 것으로 보임. 근데 이게 개념이기도 하고 범주이기도 하더라도 무언가 인류학 내용이랑 비슷함. 그것도 문화인류학이랑 비슷함. 아마도 놓임새는 논리학 범주이지 이게 어떤 내용은 아니라서 놓임새라는 범주로 좌가 포섭은 되는데, 그렇다고 범주 그 자체를 너의 좌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음. 놓임새라는 범주가 만약 기능을 한다면, 그것으로 좌라는 원리를 파악하는 것 정도겠지. 일단 나는 형식논리를 훈련으로 내재화한다고 하면, 상황의존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함. 마치 도파민이 배출되는데 도파민 수용체가 없어서, 아무리 도파민을 뿌려대도 도파민이 수용되지 않는 그런 모습이 있음. 똑같은 공간과 사람 속에 있어도 어떤 경로로든 만나지를 않고 있어서 혼자 산속에 있는 것과 같은 비슷한
@ㅇㅇ(223.39) 상태가 됨. 재밌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