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보면, 인간이 믿고 있는 기준들은 서로 맞지 않는다.


사람들은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이성적으로 살라고 말한다. 그런데 감정이 부족한 사람은 이상하다고 한다. 공감하지 못하면 문제가 있다고 한다. 감정을 버리라고 하면서, 동시에 감정을 요구한다. 결국 이성이라는 말은 감정을 제거하라는 것이 아니라, 허용된 범위 안에서 통제하라는 뜻에 가깝다.


의미에 대해서도 비슷하다. 우리는 의미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어떤 것에 의미를 느끼는 순간을 보면, 그것은 이성적 선택이라기보다 먼저 일어나는 반응에 가깝다. 끌림, 거부감, 익숙함 같은 감정이 먼저 작동하고, 그 위에 의미가 붙는다. 의미를 만든다고 하지만, 그 출발점은 이미 주어진 것이다.


그 주어진 것들은 대부분 사회 안에서 형성된다. 사람들은 사회에 맞추지 말고 자신답게 살라고 말하지만, 정작 ‘나답다’고 느끼는 기준 자체가 사회를 통해 만들어진다. 내가 옳다고 느끼는 것,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선택하고 싶다고 느끼는 방향까지도 이미 외부에서 형성된 구조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어디까지가 사회이고, 어디부터가 나인가.  

이 질문을 밀어붙이면 불편한 결론이 나온다. 내가 사회 속에서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내가 그 영향들의 집합이라면, ‘사회에 휘둘리지 않는 나’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사회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나라는 구조를 통해 스스로를 계속 작동시키고 있는 것에 가깝다.


여기서 시선을 더 바깥으로 밀어보면, 인간 자체도 특별한 존재라고 보기 어렵다. 달이 지구 주위를 도는 것처럼, 지구가 자전하는 것처럼, 자동차가 연료와 구조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인간 역시 주어진 조건과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하나의 과정일 수 있다. 생각과 감정, 선택까지도 결국은 물리적·생물학적 반응이라면, 인간의 삶은 하나의 사건 흐름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 안에서 ‘의미’라는 것이 어디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한 가지가 더 어긋난다. 내가 전부 외부에서 형성된 결과라면, 나는 단지 만들어진 구조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 구조 안에서 나는 여전히 ‘나’라고 느껴진다. 이 감각은 설명되지 않는다. 단순한 반응의 집합이라면, 그 안에 주체가 끼어들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나는 이 몸 안에서 나를 경험하고 있다.


나는 구성물인데, 왜 나는 나인가.


이 지점에 이르면, 삶을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게 된다. 무엇을 기준으로 긍정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부정할 것인가. 우리가 기준으로 삼고 있는 감정과 경험조차 이미 주어진 조건 속에서 발생한 반응이라면, 그 판단 자체도 절대적인 근거를 갖지 못한다.


이 문제를 그대로 두면, 책임이라는 개념도 흔들린다. 인간이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 따라 출력되는 과정이라면, 어떤 행동도 그 사람의 순수한 선택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어떻게 비난하고 처벌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처벌을 유지한다. 이때 처벌은 정의라기보다 기능에 가깝다. 잘못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이후의 행동을 바꾸기 위한 입력으로 작동한다. 책임은 절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설정된 조건일 수도 있다.


결국 인간은 일관된 기준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감정과 이성은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분리된 것처럼 다뤄지고, 사회에서 벗어나려 하지만 그 사회로부터 만들어지며, 의미를 만든다고 하지만 그 기반은 이미 주어진 반응에 가깝다. 그리고 그 모든 위에서, 설명되지 않는 ‘나’라는 감각이 남는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