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 분열하고, DNA라는 설계도를 따라 형성된 존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연법칙 속에서 만들어진 하나의 생물학적 구조입니다. 여기까지는 명확합니다.
그런데 이 설명은 중요한 무언가를 빠뜨리고 있습니다. 인간은 단순히 작동하는 구조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느낍니다’. 지금 이 순간을 인식하고, 내가 나라는 감각을 경험합니다. 이 1인칭 경험, 즉 감각질은 단순한 정보 처리나 반응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색을 볼 때의 느낌, 고통을 느낄 때의 감각, 그리고 ‘내가 여기 있다’는 자각은 외부에서 관찰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부에서만 주어지는 경험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합니다. 나는 분명 물리적 과정의 결과물인데, 왜 그 과정은 단순한 작동으로 끝나지 않고 ‘느껴지는 경험’으로 나타나는지 설명되지 않습니다. 왜 나는 다른 사람이나 동물처럼 하나의 대상이 아니라, 이 몸 안에서 나로서 세계를 경험하고 있는지에 대한 답은 여전히 비어 있습니다. 뇌의 작용으로 작동한다는 말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말해 줄 뿐, 왜 이런 경험이 존재하는지는 말해 주지 못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선택과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가난한 환경에서 벗어난 사람을 보며 그것을 의지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정말 개인의 의지라고 단정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성향은 유전에서 오고, 행동은 환경과 경험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은 독립적인 의지라기보다, 이미 주어진 조건들의 결과일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서 나는 이전에 ‘사회’라는 표현을 썼지만, 더 정확하게는 ‘환경’입니다. 그리고 이 환경은 단순히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인도에 가더라도 환경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곳에도 조건은 존재하고, 무엇보다 나 자신 자체가 이미 환경의 결과물입니다. 나는 환경 속에 있을 뿐 아니라, 환경으로 만들어진 존재이며, 내 몸과 사고 방식 자체도 하나의 환경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 역시 절대적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감정, 가치관, 신념은 모두 환경과 조건 속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그 기준 자체도 조건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판단을 내리지만, 그 판단을 끝까지 정당화할 수 있는 절대적인 근거는 확보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인간은 자연 법칙에 따라 작동하는 하나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그 안에서 ‘나’라는 감각을 경험하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 감각과 판단, 그리고 의미는 끝까지 밀어붙이면 확실한 근거를 가지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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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없다'라는 글을 쓴 것은 현재 환경에 대한 불만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사용하는 기준과 의미, 그리고 ‘나’라는 경험 자체에 대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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