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경계를 흐리는 순간, 악은 가장 안전해진다
— 악을 직시한 철학자들과 도덕적 혼동의 문제
악은 단지 폭력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악은 자주 흐릿한 얼굴로 나타난다. 노골적으로 자신을 악이라고 선언하지도 않으며, 대개는 더 세련된 언어를 고른다.
상대성, 현실주의, 이해, 맥락, 복잡성 같은 말을 앞세운다. 물론 이 말들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선과 악의 경계를 지우는 데 사용될 때다. 그 순간 악은 가장 편안해진다.
악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악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일이다.
왜냐하면 이름 붙여진 것은 식별되기 때문이며, 식별된 것은 경계되고 저항받기 때문이다.
반대로 선악의 구분이 무너지는 순간, 악은 더 이상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 된다.
잔혹함은 취향 차이가 되고, 기만은 생존 전략이 되며, 비열함은 현실 감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그렇게 악은 책임으로부터 빠져나간다.
이 점에서 선악 구분을 부정하는 행위는 단순한 지적 유희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판단의 칼날을 무디게 만드는 일이며, 도덕적 감각 자체를 마비시키는 일이다.
선과 악을 완전히 같은 평면 위에 올려놓고 “결국 다 관점 차이일 뿐”이라고 말하는 순간,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쪽은 늘 악이다.
선은 원래부터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교묘한 혼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악은 다르다. 악은 언제나 경계를 흐릴수록 유리하다.
굳이 종교적 표현을 빌리자면, 이것이야말로 악마의 오래된 속임수라 할 수 있다. 악마는 정면에서 “나는 악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애초에 선과 악 같은 것은 없다”, “누가 감히 그것을 구분하느냐”, “네가 악이라 부르는 것도 다른 입장에선 선일 수 있다”는 식으로 속삭인다.
이 말은 얼핏 지적이고 유연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판단력과 도덕적 척추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선악의 구분이 사라지면, 결국 남는 것은 힘과 계산뿐이다.
이 문제를 이미 오래전에 직감한 철학자들은 적지 않았다.
플라톤은 인간과 국가의 타락을 단순한 실수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질서가 무너지는 문제로 보았다.
그에게 정의란 단순한 규범 문구가 아니라 영혼의 각 부분이 제자리를 지키는 상태였다. 반대로 부정의는 그 질서가 깨진 상태였다.
즉 악은 그저 취향의 차이나 관점의 차이가 아니라, 영혼과 공동체의 구조가 뒤틀린 상태라는 뜻이다.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을 경계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참과 거짓, 정의와 부정을 가르는 기준을 허물고 말의 기술만 남기면,
결국 더 교묘하고 더 힘센 자가 이기게 되기 때문이다. 진리를 포기한 토론은 결국 말싸움으로 추락하며,
정의를 잃은 공동체는 강자의 수사학에 먹힌다.
홉스는 인간 내면의 공격성과 경쟁심, 불신을 지나치게 낭만화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적절한 제도와 힘의 구조 없이도 자연스럽게 조화롭게 살 것이라는 환상을 믿지 않았다. 그의 통찰은 냉정하다.
인간은 두려움과 욕망, 자기보존의 충동 속에서 쉽게 충돌하며, 따라서 선의만으로는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악을 막기 위해서는 선한 마음만이 아니라, 악이 실제로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계산한 구조와 힘이 필요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도덕적 당위만 있고 방어 수단이 없다면, 선은 반복해서 이용당한다.
마키아벨리는 더 노골적으로 이 문제를 건드렸다.
그는 선한 통치자가 항상 선한 방식으로만 행동하려 들 경우, 악한 자들 사이에서 쉽게 파멸할 수 있음을 보았다.
그래서 그는 악인이 되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악인의 수법을 모르는 선인은 현실에서 살아남기 어렵다고 말한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해 없이 읽는 일이다. 마키아벨리의 핵심은 잔혹함 찬양이 아니라 순진함 비판에 가깝다.
현실에는 규칙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 존재하며, 그들을 상대하려면 그들의 언어와 방식, 계산법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
이는 앞서 말한 “악을 이해하되 악에 잠식되지는 않는 존재”라는 문제의식과 정확히 맞닿아 있다.
한나 아렌트는 악이 반드시 거대한 악의지를 지닌 괴물의 형태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그녀가 지적한 것은 생각 없음, 판단의 중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지 않는 습관적 복종이었다.
이것 역시 선악의 경계를 흐리는 문제와 이어진다. 사람이 자기 판단을 멈추고 체제의 언어, 조직의 언어, 다수의 언어만 반복하기 시작하면,
그는 더 이상 선과 악을 구분하는 주체가 아니라 전달 매개가 된다.
악이 가장 쉽게 확산되는 조건은 거대한 증오의 폭발만이 아니라, 판단하지 않는 평범함일 수 있다.
결국 여러 철학자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반복해 온 통찰은 꽤 비슷하다.
인간은 생각보다 쉽게 타락하며, 악은 생각보다 교묘하고, 선은 생각보다 쉽게 무력해진다.
그리고 그 이유 중 하나는 늘 같다. 인간이 선악의 경계를 너무 쉽게 포기한다는 점이다.
선악을 구분한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 교과서의 문장을 외우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에서 무엇이 인간을 파괴하고 무엇이 인간을 보존하는지 분별하는 능력이며,무엇이 신뢰를 가능하게 하고
무엇이 공동체를 좀먹는지 식별하는 능력이다. 거짓, 배신, 조작, 학대, 착취, 비열함은 그것을 당하는 사람의 관점에서만
악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관계와 공동체를 구성하는 기본 조건을 허무는 것이기에 악이다.
이 판단을 놓치는 순간, 인간은 도덕적 상대주의의 이름으로 악에 길을 열어 주게 된다.
그래서 진짜로 경계해야 할 것은 노골적인 악인만이 아니다.
오히려 더 위험한 것은 선악 판단 자체를 유치하다고 비웃는 태도다. 냉소는 종종 지성처럼 보이지만,
많은 경우 그것은 판단 책임을 회피하는 기술일 뿐이다. 모든 것을 해체하고, 모든 가치를 의심하고, 모든 판단을 |
권력 놀음으로 환원해 버리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더 자유로운 인간이 아니라 더 무방비한 인간이다.
구분을 잃은 의식은 결국 가장 강한 힘에 끌려간다.
악을 이기는 존재는 자신을 천사라고 믿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안에 공격성, 지배욕, 복수심, 비열함의 가능성이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기 안의 어둠을 보았기에 타인의 어둠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이해하되 동일시하지 않고, 직시하되 복종하지 않으며, 대응하되 타락하지 않는다.
바로 그 점에서 그는 순수한 선인보다 더 강하다. 그 강함은 잔혹함이 아니라 자각에서 나오며, 그 자각은 선을 현실 속에서 방어할 수 있게 만든다.
선은 순진함일 필요가 없다.
정의는 무방비일 필요가 없다.
도덕은 현실 감각과 분리될 필요가 없다.
오히려 현실에서 살아남는 선은, 악의 구조를 정확히 이해한 선이다.
그리고 끝까지 지켜야 할 마지막 선은 바로 이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복잡하더라도, 아무리 인간이 모순적이더라도, 선과 악의 구분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 구분을 무너뜨리는 순간 악은 가장 안전해지고, 인간은 가장 쉽게 속는다.
굳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단언하자면 이러하다.
선악 구분을 부정하는 말이 언제나 악의 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현실에서는 너무 자주 악에게 유리하게 작동해 왔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선악의 경계를 지우는 유혹은 악마의 가장 오래되고 세련된 속임수 중 하나라 할 만하다.
악은 인간에게 처음부터 잔혹해지라고 속삭이지 않는다.
대신 먼저 이렇게 말한다.
애초에 악 같은 것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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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추
감동스러운 글이다
악인(悪人)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존재 1부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philosophy&no=596276
https://m.dcinside.com/board/philosophy/594083 나랑 관점이 되게 비슷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