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갈래 선로 위에 사람이 누워있다.

한쪽에는 나이 지긋한 노부부가, 다른 한쪽에는 어린 자매가 손을 꼭 잡고 있다.

그리고 당신의 손에는 낡은 레버가 쥐어져있다.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까만 커피 표면이 잘게 흔들리고, 아크릴판 너머로 저 멀리서 기차가 달려오는게 보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이들이 죽고, 레버를 당기면 노부부가 죽는다.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겠는가.


아마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린아이니까,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아보이니까.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노부부는 이미 충분히 살았다고 여길만하다.

이 긴박한 상황 속에서, 어떤 사람은 숫자를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나름의 원칙을 꺼내들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럴 겨를도 없이 레버를 당겨버릴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생각했는가?


노부부는 덜 중요해서?

아이들은 더 중요해 보여서?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생떼같은 자식이 떠올라서?

그래서 삶과 죽음의 무게를 저울질 한 것인가?


그렇게 레버를 당겼다고 하자. 그리고 노부부는 처참하게 죽었다. 그런데 사실 그 노부부는 저 어린 자매를 키워온 조부모였다. 이제 아이들은 살아남았지만, 동시에 그들을 돌봐주던 마지막 사람들을 잃었다. 당신의 '선택'으로 인해. 당신은 어떤 생각으로 레버를 당겼는가? 아이의, 혹은 노인의 생명에 상대적으로 더 큰 가치가 있는가? 다른 한쪽의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 만큼의 도덕적 지침이 당신에게 있는가?


여기에 정말 도덕적인 판단이 있었는가?

애초에 그런 판단이 존재할 수 있는 자리였는가.


이것이 너무 극단적이라면, 조금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학교에 장학금이 하나 남아 있다.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 한 학생은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렵다. 하루 식사라곤 학교에서 먹는 점심이 다인 형편이다. 다른 학생은 조금 나은 편이지만, 이 장학금이 없으면 학업을 이어가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당신은 심사표 앞에 앉아 있다. 둘 중 하나는 받는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받지 못한다.


당신은 누구를 선택하겠는가?


이번에도 사람들은 판단할 것이다. 누가 더 절박한가, 누가 더 억울한가, 누가 더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 누구의 가능성이 더 크고 누가 더 안타까울까. 그래서 조금 더 사정이 나은 학생을 탈락시켰는가? 다른 학생보다 살만하기 때문에? 하지만 이 학생도 장학금이 없으면 학업을 잇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이 선택은 과연 도덕적인가?


아직도 헷갈린다면 여기에 조금 더 노골적인 예시가 하나 더 있다.


한 회사가 있다. 사정이 꽤 괜찮아서 당장 망하지 않는 건실한 회사다. 오늘 누군가를 해고시키지 않으면 내일 문닫을 걱정을 해야 할 상황도 아니다. 다만 조금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조직을 재편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둘 중 하나의 팀은 정리하기로 결정됐다. 그리고 그 선택의 책임은 당신에게 주어졌다.

한쪽은 오래 일해온 사람들이다.  다른 한쪽은 더 젊고, 앞으로 오래 일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당신은 누구를 내보내겠는가?


무엇이 가장 '옳은' 선택인가?


여러분은 잘못하지 않았다.

이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질문이었다.


적어도 앞선 장면들에서 여러분이 한 일은 선과 악을 가르는 일이 아니었다. 여러분은 그저 이미 주어진 자리에서, 이미 좁혀진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떠안았을 뿐이다.

장학금 심사표 앞에서 누군가를 탈락시켰고, 인사 문서를 통해 누군가에게 해고를 통보했으며, 선로 앞에서 레버를 잡았을 뿐이다. 그러나 장학금을 받지 못한 학생도, 회사를 떠나야 했던 직원도, 노부부의 죽음도. 그 비극의 처음이 여러분에게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여러분은 그저 이미 닫혀버린 상황 안에서 마지막 선택을 떠맡은 또다른 피해자에 더 가깝다.


많은 학문들이 바로 이 마지막 순간을 붙잡고 묻는다. 무엇이 더 옳았는가, 누구를 남겼어야 했는가, 누구를 살렸어야 했는가. 이 질문들은 사건이 끝난 뒤 도착하는 경찰처럼 언제나 상황이 벌어진 뒤에 나타나 우리를 붙잡는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순간 여러분 앞에 놓여있던 것은 온전한 도덕 판단의 장면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여러분이 할 수 있었던 건, 여러분의 가치관에 따른 옳은 선택이 아닌 이미 닫혀버린 구조 안에서 강제된 경로의 조정 뿐이었다.

선택은 분명 있었다. 그러나 그 선택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곧바로 도덕적 판단이 성립됐다 이를 수 있는가? 누군가가 반드시 잃고, 밀려나서 다시 나아갈 길이 주어지지 않은 채 마지막 결단만 남아있다면, 그 자리는 도덕의 본래 자리가 아니라 이미 실패한 구조 속에 남겨진 가짜 선택지라고 할 수 있으리라.


불편하다. 우리는 느끼고 있다. 단지 누가 더 불쌍한가를 두고 흔들린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보고 있었다.


왜 언제나 마지막 선택자만 심판대 위에 오르는가.

왜 모두의 시선은 레버를 쥔 손끝에만 머무르고.

왜 그 손에 레버만 남게 만든 구조는 늘 배경처럼 밀려나는가.


왜 장학금을 받지 못할 사람은 미리 존재하고, 왜 해고될 사람은 이미 판 위에 올려져있는지, 우리가 끝내 설명하지 못했던 불편함들은 사실 마지막 선택이 아니라 그 선택만 남도록 상황을 닫아버린 구조를 이미 보기 시작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나는 이것을 결코 낯선 감각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이미 그것을 목격하고 있으며, 부분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아직 정확히 명명되지 못했을 뿐.


사람들은 여전히 선로 위에서 도덕을 찾고, 심사표와 통보서 위에서 정의와 책임을 찾는다. 그러나 동시에 무언가 잘못되어 있음을 느낀다. 단순히 누군가를 불행에 빠뜨렸음에 대한 불쾌감이 아닌, 좀 더 근본적인 해소되지 못함으로 알아차린다.

이것은 새로운 신비가 아니다. 세계에 퍼져있던 사회, 문화, 도덕이란 작은 조각들이 연결되며 구조적으로 도래했음을 이미 모두가 어렴풋이 감지하고 있던 것이다. 더이상 도덕을 손바닥 위에 놓을 수 없는 시대에 걸맞는 의식이 요구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 선택자의 책임이 아닌, 그보다 앞선 곳에서 왜 그런 구조가 갖춰졌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도덕은 대체 무엇인가? 무엇을 도덕이라 불러야 하는가.


내가 보기에 도덕은 무엇이 선택되었는가를 먼저 보는 것이 아니다. 누가 더 선했는가 혹은 더 순수한 의도를 가졌는가, 더 나은 결과를 만들었는가를 먼저 따지는 것도 아니다.

도덕은 그보다 먼저, 애초에 '진짜 선택이 가능한 구조가 살아있는가'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는가, 그렇게 갈라진 상태는 실제로 유지될 수 있는가, 제한된 상태에 놓였더라도 다시 선택 가능한 자리로 돌아갈 길이 남아있는가. 이 질문들이 빠진 자리에서 마지막 선택만을 붙잡는 것은, 도덕을 보는 것이 아니라 도덕이 이미 무너진 뒤 남겨진 잔해를 더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책임과 도덕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지 않는다.

죄책감은 실제다. 분노도 실제다. 후회도, 억울함도, 해명도 실제다. 누군가를 탓하고 싶어지는 마음 또한 너무나도 또렷한 실제다. 그러나 그것들이 실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곧 도덕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인간이 이미 벌어진 구조적 붕괴를 견디고, 설명하고, 서로 떠넘기며 어떻게든 감당하기 위해 만들어내는 사후의 단계에 가깝다. 책임은 붕괴 이후에 누가 무엇을 했는가 묻고, 감정은 그 결과를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를 드러낸다. 해소는 이미 벌어진 일 위에 질서를 덮으려 한다. 이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도덕이 될 수는 없다. 도덕은 애초에 무엇이 가능한 구조였는가를 물어야 하지, 이 층위들을 분리하지 않고 모든 것을 뭉뚱그리면 결국 아무것도 선명하게 보지 못하게 된다.


현실의 많은 문제들이 늘 도덕의 이름으로 호출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그 문제들의 상당수는 사실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효율과 배분과 통치의 문제, 즉 사후적인 문제들이다. 손실을 떠넘기고, 비용을 청구하며, 분노로 누구를 집어삼킬 것인가, 어떤 방식으로 조직을 더 매끈하게 운영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오히려 사람의 삶을 무너뜨리거나 방향을 통째로 뒤바꿔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분리해야한다. 무엇이 도덕이고 무엇이 사후처리인지 선명하게 보고 앎으로써 행해야 한다. 각자가 축으로 단단히 서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명확히 분리해야한다. 그래야만 당대의 우리가 느끼고 있는 불쾌감과 좁아진 세계의 불안함이 해결 될 수 있으리라, 나는 그렇게 본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 질문은 중요하다. 어찌됐든 대안은 필요하니까.


하지만 없다.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된 여건 안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제,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이 상황의 책임을 분노로 묻는 것보다 한 발 앞서 나아가야 한다. 이미 닫힌 상황 안에서 피해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무엇을 우선할 것인가, 누구에게 부담을 현실화할 것인가를 묻는 대신, 왜 우리의 손에 레버가 남게 되었는가를 탐색해야 한다. 진정으로 도덕이 어디에 자리하는지, 어디서 어긋났는지를 보려면 우리는 조금 더 먼 곳을 바라봐야 한다.

손에 쥐어진 레버가 아니라, 왜 그 손에 레버만 남게 되었는지를. 마지막 선택의 옳고 그름만이 아니라 왜 그런 선택만이 가능한 구조가 성립했는지를. 도덕은 바로 그곳으로 시선을 돌릴 때 비로소 다시 제자리를 찾는다. 그래야만 우리는 같은 비극 속에서 덜 더러운 선택을 반복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희생양을 더 공정하게 고르는 법이 아닌, 애초에 희생양을 고르게 만드는 구조를 다시 판단의 대상으로 되돌려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실질적인 분기가 살아 있는가.

그 분기된 상태가 유지될 수 있는가.

닫힌 상태에서 다시 선택 가능한 자리로 돌아갈 길이 남아 있는가.


이 질문을 앞세울 때에만, 비로소 도덕은 효율과 감정과 책임의 소음 속에서 자기 자리를 잃지 않을 수 있으리라.


우리는 선로 위에서 도덕을 찾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닫힌 구조 안에서 강제된 선택을 도덕으로 오인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복해서 느껴온 그 불편함은 틀리지 않았다. 마지막 선택만으로 끝내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는 그 감각, 선과 악이라는 양면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찜찜함. 바로 그것이 우리가 이미 구조를 보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이미 목격하고 있다. 이미 인식하고 있다. 이미 무언가 잘못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마지막 선택자를 더 날카롭게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만 남도록 세상을 닫아버린 구조를 찾아내 다시 묻는 것이다. 도덕은 그곳에서 다시 시작되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