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철학은 답이 없어서 쉬움” 이라는 말부터 이상함.

답이 하나로 딱 떨어지지 않는다고 쉬운 게 아님.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음.

수학은 적어도 문제를 잘 세팅하면 정답 판정이라도 가능하지, 철학은 전제 설정, 개념 구분, 논증 구조, 반례 처리, 함의 분석까지 전부 스스로 감당해야 함.

정답이 명확하지 않다는 건 채점이 느슨하다는 뜻이 아니라, 엉터리 주장과 정교한 주장을 가르는 기준이 더 추상적이고 더 엄격해진다는 뜻임.


그리고 “철학은 몇 년 투자하면 최신 논의를 읽어서 이해할 수 있다”는 것도 너무 순진한 소리임.

철학 텍스트가 왜 어려운지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에 가까움.

철학은 단순히 문장을 읽는다고 이해되는 학문이 아님.

같은 문장도 그 안에 숨어 있는 전통적 맥락, 용어사, 논쟁사, 전제의 층위, 대응하는 반론을 모르면 그냥 한글 읽듯이 읽고 지나가는 거임.

칸트, 헤겔, 하이데거, 크립키, 루이스, 맥다월, 셀러스 같은 텍스트를 진짜로 “이해”하는 건 뉴스 기사 읽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언어 하나를 다시 배우는 수준에 가까움.


또 웃긴 게 철학 내부에서도 수리철학, 물리철학, 분석철학은 어렵고 다른 건 쉽다고 퉁치는데, 여기서부터 이미 철학을 너무 모르는 티가 남.

분석철학만 철학이 아님.

윤리학, 정치철학, 현상학, 독일관념론, 해석학, 언어철학, 심리철학, 형이상학 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어려움.

어떤 분야는 수식이 없어서 쉬운 게 아니라, 수식 없이도 개념만으로 사람 머리를 박살내기 때문에 어려운 것임.

수학 문제는 풀이가 틀리면 어디서 틀렸는지라도 잡히는데, 철학은 개념 하나 잘못 잡으면 글 전체가 멀쩡해 보이면서 통째로 무너짐.


그리고 “특히 여자애들이 하는 페미니즘 철학은 초딩도 할 수 있다” 이건 그냥 수준 낮은 편견이지 논증이 아님.

어떤 분야를 까려면 그 분야의 핵심 텍스트와 대표 논쟁, 주요 개념, 내부 분파 정도는 알고 말해야 함.

페미니즘 철학 안에도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 정치철학, 사회철학, 언어철학, 법철학이 다 엮여 있음.

가령 standpoint epistemology, epistemic injustice, objectification, care ethics, intersectionality 같은 주제는 읽기 쉬워 보일 수는 있어도, 실제로 파고들면 개념 충돌과 규범적 함의가 엄청 복잡함.

그걸 “여자애들” 운운하면서 깎아내리는 순간, 비판이 아니라 그냥 감정 배설이 됨.


그리고 가장 큰 오류는 학문의 난이도를 하나의 축으로만 서열화하려는 태도임.

수학은 형식적 엄밀성, 계산 능력, 추상적 구조 파악에서 매우 어렵고,

물리학은 거기에 더해 모델링, 실험, 측정, 해석이 붙어서 어렵고,

철학은 개념 분석, 전제 비판, 논리적 정합성, 해석학적 감수성, 메타 수준의 반성까지 요구해서 또 다른 방식으로 어려움.

즉 “뭐가 더 어렵냐”는 질문 자체가 반쯤 잘못된 질문임.

마치 마라톤 선수한테 레슬링이 쉬워 보인다고 해서 레슬링이 쉬운 운동이 되는 건 아닌 것과 같음.


역사 이야기 끌고 오는 것도 허술함.

“옛날엔 수학, 과학, 공학도 다 철학이었다 → 그래서 철학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이 수학/물리였다”

이건 분류사와 난이도를 멋대로 섞은 것뿐임.

옛날에 자연철학이 넓은 우산 개념이었다고 해서, 오늘날 철학의 핵심 난점이 자동으로 수학/물리 쪽으로 환원되는 건 아님.

학문이 분화되었다는 건 각 분야가 자기만의 방법론과 검증 규칙을 정교화했다는 뜻이지, 철학이 나머지보다 열등해졌다는 뜻이 아님.

오히려 현대 철학은 분화된 개별 학문들이 당연하게 쓰는 개념적 전제들을 다시 묻는 역할을 더 선명하게 맡게 됨.

인과, 법칙, 설명, 동일성, 의식, 가치, 정당화, 진리 같은 문제는 수학이나 물리학이 혼자 해결 못 함.


또 “철학은 말할 수 없는 영역에서 멈췄는데, 수학적 방법을 적용하자 지식이 폭발했다”는 식의 서사도 지나치게 단순함.

과학혁명이 위대했던 건 맞지만, 그걸 철학의 패배로 읽는 건 무식한 해석임.

애초에 “자연은 수학적으로 기술될 수 있다”, “관찰은 이론에 의해 구조화된다”, “설명은 어떤 형식을 가져야 하는가”, “법칙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들은 전부 철학적 질문이기도 함.

과학이 잘 굴러간다고 철학이 불필요해지는 게 아니라, 과학이 전제하는 틀을 묻는 작업이 계속 필요해지는 것임.


결정적으로 “어렵다”를 너무 공학적 난이도로만 이해함.

방정식 복잡하고 실험 장비 다루기 힘들면 어려운 학문,

언어로 논하고 개념 다루면 쉬운 학문.

이건 지적 게으름에 가까움.

언어로 사고하는 학문이 쉬운 게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은 언어를 매일 쓰니까 자기가 그 영역도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것임.

철학 글이 쉬워 보이는 이유는 철학이 쉬워서가 아니라, 표면적으로는 일상어를 쓰기 때문임.

근데 그 일상어 안에 들어 있는 “존재”, “원인”, “자유”, “의식”, “옳음”, “동일성” 같은 단어들은 일상어 껍데기를 쓴 초고난도 개념들임.


정리하면 학문 난이도를 논하는 척하지만 사실상


난이도 기준이 일관되지 않고,

철학 내부의 다양성과 깊이를 무시하고,

편견을 논증인 척 섞어 넣고,

과학사의 분화를 철학의 패배로 오독하고 있음.


수학과 물리학이 어렵다는 건 맞음.

근데 그 사실이 곧 철학이 쉽다는 뜻은 아님.

철학은 계산 대신 개념을, 실험 대신 논증을, 공식 대신 정당화를 다룬다.

도구가 다를 뿐이지, 난이도가 사라지는 게 아님.

오히려 많은 경우 철학은 틀렸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기 어려운 방식으로 어렵다는 점에서 더 교묘하고 더 잔인한 학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