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흔히 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엄밀히 말해 존재 그 자체의 현전이라기보다는 현전의 가능조건이 스스로를 은폐하는 과정에서 남겨놓은 지연의 흔적이며, 바로 그 흔적이 다시금 자기의 비기원성을 기원처럼 오인하게 만드는 초월론적 잔여의 내재적 반복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반복은 단순한 귀환이 아니라, 귀환 이전에 이미 귀환의 구조를 선취하고 있었던 선험적 후행성의 자기-분열적 운동이므로, 존재는 결코 자기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주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자기와의 불일치가 가장 자기적인 방식으로 자기에게 귀속되는 역설적 소속의 양태로만 이해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사유는 대상을 향해 나아가는 의식의 능동적 표상작용이 아니라, 이미 대상 이전에 대상성의 가능성을 배치해 둔 비대상적 차연의 장(場)이 자기 자신을 뒤늦게 사유의 형태로 회수하는 일종의 반성 이전의 반성이다. 그러나 이 회수는 회수된 것을 결코 동일한 채로 보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회수되는 것은 본래 회수 가능한 것으로서 먼저 주어진 적이 없고, 오히려 회수의 형식 자체가 그 회수 불가능성을 자신의 내적 조건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 가능성의 구조가 남긴 탈구(脫臼)의 흔들림을 개념이라는 이름으로 임시 봉합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동일성은 차이를 억압한 결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끝내 동일화되지 않음으로써만 가까스로 유지되는 자기-부정적 안정성이다. 다시 말해 동일한 것은 동일하기 때문에 동일한 것이 아니라, 동일하지 않은 것들이 동일성의 외관 아래 비가시적으로 공진할 때에만 성립하는 비동일성의 응축이다. 그러므로 어떤 개념이 명료해질수록 그것은 오히려 자기의 비명료한 발생 조건을 더 완강하게 은폐하며, 그 은폐의 성공이 곧 명료성으로 오인된다. 이때 개념의 투명성은 진리의 징표가 아니라 불투명성이 자신을 삭제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주체란 무엇인가. 주체는 세계를 향해 선행적으로 열려 있는 통일적 중심이 아니라, 세계가 아직 세계로 구성되기 이전에 이미 균열로서 배치된 분절의 임계점들이 후행적으로 하나의 내면성을 발명해낸 결과물이다. 주체는 자기 자신을 소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는 자기 소유의 불가능성을 소유하는 척함으로써만 성립한다. 이 말은 곧, ‘나’라는 것은 나의 중심이라기보다 중심 없음이 지속적으로 중심의 형식을 가장하는 탈중심적 응축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자아의 가장 내밀한 층위는 언제나 자기와 가장 무관한 타자성의 침전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로 그 무관함이 역설적으로 자기성의 핵처럼 기능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시간 역시 연속적인 현재들의 선형적 배열로 이해될 수 없다. 현재는 현재인 적이 없다. 현재는 언제나 이미 지나간 것으로서만 붙잡히거나 아직 오지 않은 것으로서만 예비되며, 따라서 현재의 본질은 현전이 아니라 영구적인 비-현재성의 자가매개이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흐른다는 표상을 가능하게 하는 정지된 탈구들의 비대칭적 간격이 우리에게 흐름처럼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지나간 현재가 아니라 현재가 결코 자기 자신으로 수렴할 수 없었다는 사실의 구조적 이름이며, 미래는 오지 않은 현재가 아니라 현재가 자기 자신에게 늦어지는 형식 그 자체이다.
이제 문제는 존재와 무의 관계가 아니라, 존재와 무가 서로를 관계항으로 가지기 이전에 이미 서로의 조건으로서 오염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에 놓여 있다. 무는 존재의 결핍이 아니고, 존재는 무의 부정이 아니다. 양자는 서로를 배제함으로써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충분히 배제하지 못함으로써만 성립한다. 이 불완전한 배제가 곧 형이상학의 기원이며 동시에 그 해체의 가능성이다. 왜냐하면 어떤 것이 자신이 아닌 것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닫힌 동일성 안에 고정될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것도 자신 바깥의 것을 완전히 외재화하지 못하므로, 모든 존재는 자기 내부에 자기의 외부를 접어 넣은 채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는 명제와 사태의 대응에 있지 않고, 대응 불가능성이 끊임없이 대응의 형식으로 위장되는 그 반복적 파열 속에서만 발생한다. 우리는 진리에 도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진리가 도달 가능하다는 믿음이 붕괴하는 지점에서 비로소 진리의 구조적 윤곽과 조우한다. 하지만 이 조우조차 조우가 아니다. 그것은 조우 이전의 지연이 조우 이후의 이해로 오인되는 하나의 해석적 착시이며, 이 착시 없이는 아무것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의미는 언제나 오해의 자기정교화라는 형식을 취한다.
결국 철학은 세계를 설명하는 학문이 아니라, 설명 가능성이 성립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누락해야 했던 것들의 체계적 복귀를 추적하는 불가능한 학문이다. 철학적 사유가 깊어진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명확히 안다는 뜻이 아니라, 명확성 자체가 얼마나 두꺼운 비명확성의 침전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점점 더 정교하게 감지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엄밀한 사유는 결론에 도달하는 사유가 아니라, 결론이라는 형식이 어떤 선행적 절단과 배제를 통해서만 가능했는지를 끝없이 지연시키는 사유다. 그리고 바로 그 지연 속에서, 사유는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방식으로만 자기 자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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