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타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개 하나의 단단한 실체처럼 상정된다.
저 사람은 나와 무관하게 저기 이미 완성된 채 서 있고, 나는 그를 그저 바라보고 판단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의식의 구조를 조금만 더 집요하게 들여다보면, 이 상식은 쉽게 금이 간다.
내가 만나는 것은 타인 그 자체가 아니라, 언제나 나에게-나타난 타인이다.
그는 나의 시선에 포획된 채 오고, 나의 기억에 의해 색칠된 채 오며, 나의 공포와 결핍과 욕망이 미리 준비해 둔 해석의 통로를 따라 들어온다.
나는 타인의 본체와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현상으로서의 타인, 의미로서의 타인, 나의 의식이 구성한 지평 안에서만 드러나는 타인과 마주친다.
이 점에서 타인은 부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빨리 나에게 번역된 채 주어진다.
그는 결코 순수한 외부로 오지 못한다.
그는 이미 해석된 얼굴로, 이미 의미화된 몸짓으로, 이미 내면화된 언어의 질서 위에서만 도착한다.
현상학이 말하듯 의식은 언제나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며, 대상은 그 자체로 맨얼굴로 주어지기보다 일정한 의미와 지향의 구조 속에서 나타난다.
후설의 작업은 바로 사물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의식의 지향성과 주관적 구성 작용과 얽혀 있음을 밝히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타인에 대한 나의 판단은 언제나 인식인 동시에 고백이다.
내가 누군가를 오만하다고 부를 때, 나는 정말 그의 오만을 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내 안에서 견디지 못한 어떤 과장된 자아상, 어떤 인정 욕구, 어떤 상처 입은 허영을 바깥으로 읽어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누군가를 비겁하다고 단죄할 때, 그 판단은 때로 저 사람의 성격 규정이 아니라, 내 안의 미인정된 비겁함이 외부의 형상을 빌려 귀환하는 장면일 수 있다.
이때 비난은 분석이 아니라 방어가 된고, 공격은 통찰이 아니라 회피가 된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투사’는 바로 이 구조를 가리킨다. 투사는 자기 안의 생각이나 감정을 타인에게 돌리는 무의식적 과정으로 설명되며
전이 역시 과거의 정서가 새로운 대상 위에서 반복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타인을 향한 격렬한 혐오에는 자주 설명되지 않은 친밀성이 스며 있다.
정말 무관한 대상이라면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반응할 이유가 없다.
유난히 나를 들쑤시는 사람, 사소한 말투 하나로도 내 정서를 무너뜨리는 사람, 이상하리만치 오래 잔상처럼 남는 사람은 대개 단순한 외부인이 아니다.
그는 내 안의 봉인된 무엇과 접속해 버린 사람이다.
내가 의식적으로는 부정했으나 무의식적으로는 붙들고 있던 것, 내가 내 자아상에서 추방했으나 여전히 나를 조직하고 있던 것,
바로 그것이 타인의 얼굴을 입고 돌아온다. 그 순간 다툼은 둘 사이의 충돌이 아니라, 내 안에서 분리되지 못한 것들의 내전이 된다.
상대와 싸운다고 믿지만, 실은 상대를 매개로 나 자신과 맞붙고 있는 셈이다.
이 대목에서 라캉은 이 문제를 가장 잔인하게 정식화한 철학자 가운데 하나다.
라캉에게 자아는 처음부터 자기 자신에게 투명한 실체가 아니다. 자아는 거울 단계에서 하나의 이미지와 동일시하면서 형성되는데,
그 이미지는 통일되고 완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주체는 그만큼 통일적이지 않다. 그래서 자아의 기원 자체가 이미 오인,
곧 자기 자신을 외부의 이미지 속에서 잘못 알아보는 데 놓여 있다.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는 바로 이런 이미지적 동일시, 환상, 자아,
그리고 내가 타인과 나 자신을 “어떻게 상상하는가”의 차원이다. 더 나아가 그는 인간이 자기 욕망마저도 혼자서 순수하게 갖지 못하고
타자 또는 타자들의 욕망을 경유해 욕망한다고 본다.
라캉의 언어로 다시 말하면, 내가 만나는 타인은 순수한 실재의 타인이 아니다.
대개 나는 상상계의 타인, 곧 내가 상상적으로 조직해 놓은 타인을 만난다.
나는 그를 하나의 이미지로 읽고, 하나의 역할로 봉합하고, 하나의 서사 속에 배치한다.
그는 나의 경쟁자일 수도 있고, 나를 승인해 줄 심판자일 수도 있으며, 나의 결핍을 들춰내는 모욕의 증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의 실체 이전에, 나의 판타지가 그를 점유한 결과다.
그리고 상징계까지 들어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나는 단지 어떤 개인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말하는 언어, 규범, 이름, 인정의 질서와 싸운다.
라캉의 큰타자(Autre)는 단순한 한 사람이 아니라 언어와 법, 사회적 승인과 의미의 자리다.
결국 내가 타인과 다툰다는 것은 종종 한 개인과 맞붙는 일이 아니라, 내 존재를 규정해 온 기표의 질서 속에서 내 자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투쟁이다.
상대의 말이 나를 그렇게까지 무너뜨리는 이유는 그 말 자체가 강해서가 아니라, 그 말이 내 안의 어떤 상징적 결핍을 정확히 건드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타인과의 싸움은 흔히 사실판단의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상처 입은 자아가 자기의 균열을 외부의 적으로 번역해 놓고 벌이는 복수극에 가깝다.
내가 상대를 이기고 싶어 하는 이유도 종종 진실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를 꺾음으로써 내 자아의 상상적 통일성을 회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가 틀렸다는 판정은 때로 논리적 승리라기보다 나르시시즘의 봉합이다.
그래서 논쟁은 끝났는데도 감정은 남고, 말은 정리되었는데도 모욕감은 지속되며, 상대를 반박했는데도 어딘가 패배한 듯한 공허가 남는다.
그것은 애초에 그 싸움이 상대를 향한 것이기보다 내 안의 결핍을 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의 계보는 라캉에게서突如 발생한 것이 아니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의지이기 이전에 표상으로도 보았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객체들은 매개 없이 닿는 것이 아니라 표상으로서 주어진다고 보았다.
후설은 의식이 대상을 그저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가진 방식으로 드러나게 하는 지향적 구조를 분석했다.
사르트르는 반대로 타인의 시선이 나를 대상화하고 소외시키는 방식을 통해, 타인이란 내게 순수한 평화가 아니라 긴장과 갈등의 장으로 주어진다고 분석했다.
서로 결이 다르지만, 이 사상가들은 공통적으로 ‘타인은 결코 나에게 무매개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각자의 방식으로 밀어 올린다.
이 지점에서 프로이트를 끌어오면 문제는 더욱 날카로워진다.
프로이트에게 인간의 정신은 자기 자신에게 투명하지 않다.
의식은 자기를 주인이라고 믿지만, 실제로는 억압된 충동, 지워지지 않은 유년기의 정동, 해소되지 않은 욕망과 공포가
훨씬 더 깊은 곳에서 현재의 감정과 판단을 조직한다. 프로이트는 정신생활을 무의식적 과정까지 포함하는 방식으로 이해했고,
억압과 전이를 신경증 이론의 핵심 축으로 보았다.
그래서 내가 어떤 타인을 유난히 미워하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과장되게 반응하며, 사소한 몸짓과 말투에까지 격렬한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 감정은 단순히 현재 그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만이 아닐 수 있다.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투사란, 자기 안에 있으나 받아들이기 힘든 생각이나 감정을 타인에게 돌려놓는 심리적 작용이다.
그래서 나는 타인의 공격성, 허영, 비겁함, 잔혹함을 비난하는 동시에, 어쩌면 내 안에서 인정되지 못한 공격성, 허영, 비겁함, 잔혹함과 마주치고 있을 수도 있다.
타인 비판은 이때 객관적 판정이 아니라, 자기 내부의 불편한 진실이 바깥의 얼굴을 빌려 나타나는 장면이 된다.
여기에 전이가 더해지면, 현재의 타인은 더 이상 단순한 현재의 인물이 아니다.
그는 과거의 누군가를 대신하는 자리로 끌려 들어온다.
프로이트는 전이를, 과거의 중요한 관계에서 형성된 사랑, 증오, 의존, 반항 같은 감정이 새로운 대상 위에서 다시 살아나는 현상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어떤 다툼은 지금 눈앞의 상대와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다툼 속에는 오래전 끝나지 않았던 관계,
이미 지나갔다고 믿었던 굴욕,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은 상처가 현재형으로 재상연된다.
지금의 타인은 촉발점일 뿐, 정작 싸움의 에너지는 더 오래되고 더 깊은 곳에서 올라온다.
더 밀고 나가면 인간은 단순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존재가 아니라, 해결되지 않은 것을 다른 얼굴로 되풀이하는 존재다.
그는 정신과정을 설명하며 ‘반복강박’을 언급했고, 과거의 갈등이 현재의 관계 속에서 되돌아오는 현상을 중시했다.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은 익숙한 상처의 구조를 다시 호출하고 있을 때가 많다.
낯선 타인과의 갈등처럼 보이는 일이, 사실은 오래된 자기 내부 드라마의 반복 상연일 수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타인은 단지 외부의 인물이 아니다.
그는 무의식이 자기 자신을 우회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스크린이 되기도 한다.
나는 타인을 평가한다고 믿지만, 그 평가 속에는 언제나 내 억압의 흔적과 내 과거의 잔향이 섞여 있다.
그래서 어떤 경우 타인과의 싸움은 실제로 타인을 둘러싼 싸움이 아니라,
타인을 매개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나 자신의 무의식과의 대면이다.
완전히 독립된 실체로서의 타인은 내 경험 안에서 결코 그대로 오지 않는다.
내가 만나는 타인은 언제나 나를 경유한 타인이다.
나의 언어를 거쳤고, 나의 무의식을 거쳤고, 나의 결핍을 거쳤고, 나의 공포와 욕망과 기억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나타나는 타인이다.
따라서 타인을 함부로 단죄하는 일은 언제나 위험하다.
그 판단 속에는 저 사람에 대한 진술만이 아니라, 나 자신의 구조에 대한 진술도 같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비판은 종종 관찰이지만, 때로는 자백이다.
혐오는 종종 윤리적 분노이지만, 때로는 자기 거부의 우회다.
경멸은 종종 타인에 대한 평가이지만, 때로는 내 안에서 추방된 것의 귀환이다.
그리고 여기서 비로소 가장 불편한 문장이 나온다.
우리가 타인과 벌이는 수많은 싸움은, 실은 나 자신과의 싸움일 수도 있다.
내가 끝내 용서하지 못한 내 모습, 내가 끝내 인정하지 못한 내 욕망, 내가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나의 초라함이 타인의 얼굴에 달라붙을 때,
나는 나 자신을 공격한다. 상대는 방아쇠일 수는 있어도 궁극적 원인인 것은 아니다.
그는 종종 거울이다.
더 정확히는, 내가 깨뜨리고 싶어 하는 거울이다.
하지만 거울을 깨뜨린다고 해서 얼굴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산산이 부서진 조각마다 내가 피하던 내 형상이 더 많이 번져 나온다.
그러므로 성숙이란 타인을 무조건 선하게 보려는 태도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나의 해석 속에 늘 내가 섞여 있음을 감당하는 힘이다.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다.
단절할 수도 있고, 비판할 수도 있다.
다만 그 전에 물어야 한다.
내가 지금 저 사람에게서 보고 있는 것은 정말 저 사람인가.
아니면 저 사람을 빌려 돌아온 나 자신의 일부인가.
타인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결국 세계에 타인이 없다는 선언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결코 타인에게 순수하게 도달하지 못한다는 비극의 진술이다.
나는 끝내 나의 프레임 밖으로 완전히 나갈 수 없고, 그래서 언제나 나의 해석 안에서만 타인을 만난다.
인간관계의 비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서로를 만난다고 믿지만, 대부분은 서로의 본질이 아니라 서로의 번역본과 충돌한다.
그리고 그 번역의 오차가 클수록, 싸움은 더 치열해진다.
인간이 평생 배워야 하는 것은 타인을 다루는 기술이 아니다.
타인이라는 형식을 빌려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자기 자신을 견디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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