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의 모든 것은 전기신호다. 근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전기신호가 생명체 안에서 작동하면 고통, 공허함, 의지 같은 것들이 생겨난다. 실체는 없지만 내가 실제로 경험하는 것들. 이걸 실존적 층위라고 부르기로 했다.

전기신호가 생명체 사이에서 오감을 통해 전달되고 축적되면 선악, 문화, 합의 같은 것들이 생겨난다. 실체도 실존도 없고 사회가 있을 때만 존재하는 것들. 이걸 사회적 층위라고 부른다.

그래서 층위는 세 개다.

물리적 층위 — 실체 O, 실존 O (전기신호)

실존적 층위 — 실체 X, 실존 O (고통, 공허함, 의지)

사회적 층위 — 실체 X, 실존 X (선악, 문화, 합의)

선악은 개념만 존재할 뿐 실체가 없다. 시대와 집단마다 내용이 바뀐다는 게 그 증거다. 북한한테 남한이 악인 것처럼. 절대적 선악은 환상이다.

근데 그럼 윤리는 없는 건가? 아니다. 혼자인 인간에게 윤리는 없지만, 타인을 만나는 순간 상호이익이라는 실존적 경험에서 윤리가 자연스럽게 창발한다. 선악 없이도 윤리는 존재 가능하다.

공허함은 풍요가 만들어낸다. 배부르고 안전해지니까 “나는 왜 사는가”를 묻게 되는 거다. 그 공허함이 철학의 동력이다. 근데 철학이 답을 찾으면 공허함이 사라지냐고? 아니다. 답을 찾을수록 공허함은 더 깊어진다. 그 루프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다.

전기신호인 줄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 것 — 그게 인간찬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