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발화자의 '어떠어떠한 사고 방식을 가져라'와 같은 격언, 경구, 덕담은 기본적으로 모두 관념론적 전제 하에서 이야기되는 것임.
(근데 이건 사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철학적인 논의로 층위를 비트는 것이기도 한데, 여하간 일상에서의 대화 내에서도 깊은 대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것이 철학적인 논의의 특성과도 결부됨을 인지하고 태도를 고쳐야한다 생각하기 때문에 이건 짚을 필요가 있다고 봄)
실천적인 지혜를 듣는 것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일은 없겠으나(왜냐하면 그러한 실천적인 지혜가 미래에 경험을 통해 각인되며 직접적인 영향을 줄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으니) 당장의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에는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함(물론 인식의, 앎의 변화에 대한 영향은 당연히 주나)
물론 이 단언에는 전제가 있으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관을 가질수록 복잡한 세계를 단편적으로 일축한 격언, 경구에서 동기를 부여받지 못할 확률이 높다는 것임.
논리적인 사람을 보고 대중들이 찐따, 회의주의자, 비관주의자라고 일갈하고 그를 집단적으로 질타하는 사례가 빈번한 것을 상기한다면 이 전제를 직관적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다 생각함.
또한 전제 안에 숨겨진 또 하나의 전제가 있으니 그건 바로 동기 부여의 객체는 허물 없이 얘기하자면 결국 감정적 충동에 민감할 확률이 높다는 것임.
만약 인물 A가 자기 주관의 틀이 약하고, 팔랑귀이며, 성향이 보편적이고, 그에 따라 누구보다 타율적이라면, 그 이는 실제 삶의 차원에서는 무언가에 쉽게 편승 가능할 것이고 역설적이게도 자기가 자유롭게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거라 믿을 확률이 높음.
물론 이에 대해서 필시 역이 보장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나(칸트를 보고 주관이 약하다고 하는 미친 사람은 없을 것이기에) 요지는 대중들의 양태에서만큼은 필충조건으로 보일 정도로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임.
암튼 경험함으로써 지적 상태가 풍만해진 발화자의 저러한 수사적이고 일축된 가벼운 메세지를 듣고서는, 그에 대한 지적인 정보 수용을 넘어 질적 변화가 야기되기 위한, 즉 실천으로 도약되기 위한 상태로서의 청자에 대한 필요조건은 역설적이게도 청자가 맹목적인 감정적 충동이 강하게 야기되는 상태이거나, 무지한 상태여야 함.
(맹목적인 감정적 충동을 일어난다고 무지한 것은 아니지만 무지하면 맹목적인 감정적 충동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사실, 왜냐하면 무지한 사람들은 복잡한 논리 구성 자체를 포기하기 때문)
긍정적인 사고관을 가져라: 이것에 대해 선택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오류라는 것임.
긍정적인 사고관은 결과로서의 현상인 것이지 그 자체로 제 1원인이 될 수 없음.
여기서 또 한 번 포착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점은 해답지가 선택 가능성을 보장한다고 생각하는 점, 즉 해답지 => 선택지 라고 생각한다는 점임.
'만사에 초연해져라', '노력이 재능을 이긴다', '자기 몫은 자기가 챙겨라': 이런 조언들은 어떠한 경험을 겪은 사람들이 여러 층위에서 그에 맞는 해답을 내놓는 것이지만 저것들이 일관성 있게 적용되는 결론이 될 수는 없음.
다시 말해 일반화된 결론이 아니기 때문에 경험 이전에는 지적 수용 외에 실천에 대한 어떠한 것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임.
하지만 그럼에도 저러한 조언들은 언젠가는 확증 편향으로써 핵심적인 사고관에 재배치될 가능성이 열려 있음.
그렇기에 그 자체로 무의미하다까지는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임.
금딸 성공 기록은 며칠이나 되는가.
그대의 동반자 오른손이 에게 위로와 격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