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의 특징은 번잡하다, 감각중심으로 쓴다,
이유는 빠르게 쓰기 때문이다. 생각나면 팍 쓰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논의의 정확성의 문제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앞서 밝혔듯이 시니피앙은 그 사람의 반응과 징후를 나타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읽기 싫으면 읽지 않으면 된다. 우리가 어떤 타자의 글에서 기대하는 것은 정확성이 아니다. 그 타자의 반응을 보고 싶을 뿐이다.

우리가 경험담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가 먼저가 아니라,
자신의 몸에서 일어난 반응에 대해서 너무나 경이로워서 그렇다.
그것을 가만히 놔두지 못하고, 뭔가 발산해야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누가 됐건간에 그것을 전달하는 것이다.
(물론 더 친한 사람이 먼저 생각날때가 많을 것이다.)

시니피앙을 잘못된 출산이라고 보고 (태생상 기형적 출산이다. 구강구조는 뇌의 움직임과 맞지 않으니까)
따라서 시니피에의 세계를 중심으로 두고, 그것의 프로세스를 중심으로 보게 될 때
어떤 사람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보다는,
그 사람이 무엇에 관하여,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글을 읽을 때는 그런 것을 집중적으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문제의식이 중요하고
탐구방법을 아는 게 중요하고 (방법론 및 접근하는 방식이 무엇인가)
그 결과를 아는 게 중요하다.
글이란 건 이 3가지만 알면 된다.
여기에 공적인 결론은 없다. 과학도 마찬가지다. 그 과학자 개인의 반응을 기록한 것이 과학내에서의 연구결과다.
그것을 좀 더 공적인 듯 보이는 양식으로 기록한 것일 뿐이다.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들이 하는 일이 관찰인데)
따라서 과학 영역의 글도 마찬가지로, 그가 무엇에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읽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시니피앙이 달려든다는 관점에서 읽으면, 필시 오독을 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프로세스는 명시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이를 명확하게 밝혀놓은 적이 없다.
있다하더라도 그렇게 취급한 경우가 드물거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민한 누군가는 그러한 해석방법이 필요하다는 필요성을 자각했을 것이고
나름대로의 접근툴을 개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접근툴이 공적으로 드러난 경우는 별로 없다.
물론 많은 시도들은 있었다. 범주론에서부터 판단론 변증론, 순수이성비판, 심리학의 이해, 등등,
수많은 천재들은 대가들은 그러한 것에 기민하게 반응했다. 그것을 알아야 더 심화된 논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읽고,
그래서 넌 뭔 말을 하고 싶은거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니가 왜 그런 의문을 가졌을까? 그게 사고의 패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문제(앞에 던져진 것)에 대하여 '반응(마주치고 이후의 모든 양상)을 하게 되고, '탐구'(적극적으로 해명)하는 흐름을 갖는다.
동서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면 이런 식의 프로세스를 갖는다. 곧 자세히 밝혀보려 시도하겠지만 그것은 신체기관의 한계에 기인한다.


잠깐 여기까지 짧게 서론을 잡고,
앞으로 내가 어떤 글을 쓰게 될지에 대해서 한번 얘기해보려 한다.

수많은 대가들이 밝히려고 했던 것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것은 신과 죽음, 공평함의 문제, 그런 안드로메다적인 문제가 아니고,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범주론을 제시했을 때,
그가 시니피에에 대해 반응한 것은 다음과 같이 추리해볼 수 있다.
그는 분명 시니피에의 세계에 있었다. 그런데, 그는 분명히 '털컥'하고 걸리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느낌들이 대개 언어와 직결된다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바로 그 때,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니피에'를 해석하는 틀이 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또는 분별하는 틀이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시니피에가 '분별'이 되는 것이다.

로널드 래내커는 인지문법이라는 이론을 제시하면서,
그 '동사'라는 것이 시간구간내의 변화라는 것을 언급한다.
래내커의 이론은 이런 식이다. 인간은 '동사'를 이해할 때, (몇 가지 구별법이 있으나 다 제끼고 연쇄에 대한 것만 언급하려 한다.)
시간0지점에서, 해당 시간지점으로, '차례대로 좌표점을 하나하나 넘어간다'라고 지적한다.
예를 들어보자. 당신이 야구공을 집어던진다면, 야구공은 당신의 손 지점(0지점)에서 차곡차곡 0지점과 비교하여 1지점2지점3지점 등으로 넘어가고,
그 다음 목표했던 해당 지점(n지점)으로 간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보통 '가다' '던지다'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하지만 래내커의 입장에서 그것은 시니피에로 볼 때, 물체들이 '좌표점'을 하나하나 거쳐간 것이다. (래내커의 표현과 다르게 표현하지만 의미는 같다)
다시 말해 래내커의 입장에서 '비교'라는 인지기제는 매 순간 작동하는데, 그것이 시간이라는 틀에서, 지금과 그 후, 그 후, 그 후, 그 후, 이런식으로 계속 비교하면서 좌표점이 이동되는 것을 동사의 특징이라고 부른다. 비교 차원에서 그는 전치사가 왜 동사와 다른지를 설명한다. 전치사에는 그런 시간대비 변화가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위의 래내커 얘기가 어려우면 집어쳐라. 이해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쉽게 생각해볼 것은, 니가 '움직인다'라고 생각되는 것들은 좌표점 내에서의 '지금과 후'를 기민하게 비교하면서 얻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모든것을 총합해서 설명하면, 우리는 마치 곰플레이어를 보듯이, 시작점에서 끝점까지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고, 그것이 동사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동사는 그래서 '스캐닝(그의 표현에 따르면)의 기제를 거친다. (스캔인지 용어는 적합치 않으나 저런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만 알면 된다.)

이 모든 논의를 이해하지 않아도 좋다.
이 얘기를 한 이유는 아리스토텔레스나 래내커를 소개하기 위한 게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려고 했던 것의 정체를 파악하자는 의도에서다.

아리스토텔레스나 래내커가 했떤 것은, 시니피에를 살펴보다가 (이를 살펴보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언젠가 쓸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분명히 '털컥'하고 걸리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것들을 소급하고 들어가서 10개 정도의 분류를 해낸다. (구별해낸다. 털컥 거리는 것들을)
알다시피 그 유명한 범주들이다. 우시아. 질. 양. 능동. 수동. 관계. 장소. 시간. 자세. 소유.

그리고 이를 '단어'로도 취급할 수 있지만 위험하다.
왜? 시니피앙은 반응이다. 얼마든지 발생시킬 수 있다. 하지만 시니피에는 정해져 있다. 그러니 시니피에부터 해결해야 한다.
막말로 '달려간다'고 표현하던 '뛰어간다'고 표현하던 뭔 상관인가?
하지만 그것이 '장소에서의 변화, 질적인 변화 (뛰어감에 따른 혈압상승 등) 능동, 기타 여러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더 중요한 건 시니피에의 세계인데, 그것을 기민하게 들여다보다가 얻어낸 것들이 위의 10가지 정도의 분류일 것이다. (시니피에는 멍한 게 아니다.)

아주 풍성하고 다양한 그곳에서, 10가지를 뽑아낸 게 아리스토텔레스인데,
이런 질문을 해봐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뽑아낸 게 다일까?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암묵적으로 전제했던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지적 도구'를 볼 수 있다. 가령 납땜을 하는 것은 작업이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납땜'을 가능케 하는 손, 인두, 같은 것은 도구 아니겠는가? (또는 손동작, 손의 움직임, 이 움직임에 대한 정체가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위의 '카테고리'를 찾아낸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무엇'이 저걸 찾게끔, 또는 가능하게 했을까?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도대체 어떤 '사고기능'을 갖고 있었나? 이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게 있었으니까 저게 나온 것 아니겠는가?

가장 대표적인 게 미분(먼지처럼 분하는 것, 잘라내는 능력) 분별(잘라낸 걸 구별하고 알아내는), 종합(잘라낸 것들을 붙여내는) 스캐닝(아까 말했듯이 어떤 이미지의 시간적 변화를 지켜보는) 비교(이미지와 이미지를 견주어보는) 중첩(비슷한 것들은 같은 곳으로 묶어서 취급하는, 이 표현은 다르게도 가능하다)

등등,
수많은 방법적 접근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별해놓은 10가지가 중요한 것이기 보다는, 어떻게 저 10개가 구별가능할 수 있었을까? 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왜냐하면 저 결과로서 10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접근한 것에 아웃풋으로서 나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탐구의 논리 및 구조가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인 이유는 저서들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나중의 문제이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인 이유에는 저런 접근툴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신만의 접근툴'이 있었기 때문에 범주론이라는 책을 낸 것이고,
플라톤은 자신만의 툴이 있었기 때문에 국가라는 책을 낸 것이고
칸트는 자신만의 툴이 있었기 때문에 순수이성비판이라는 책을 낸 것이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그 결과를 가능케했던 과정(과정의 구조는 무엇이었나?), 이것이 탐구하는 사람에게는 질문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나 어떤 위대한 대가에게서 뭔가를 배울려는 사람은, 그 대가가 출력한 결과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면 중요하겠지만 사실 그건 출력물에 불과하고,
무엇이 그 출력을 가능하게 하였는가?를 기민하게 알아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 대가의 정체는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미친놈처럼, 집요하게, 그 과정(프로세스)의 면모를 모조리 밝혀내야 한다.
한 사람의 아웃풋은 거기에 있다. (그 반응으로서) 그는 탄생한다. 그의 결과물에서 역추적이 가능하나,
무엇보다 알아내야 할 것은 시니피에의 세계에서 어떤 '반응'이 시니피에의 화법으로 어떻게 나타낼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아주 골아플거라 생각하는데, 이해안되면 읽지 말아야 한다. 시간낭비일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글은 한 사람의 징후에 불과하다. 그러니 같은 '지점'을 '응시'해본 사람만이, 내 글에서, 어떤 사유의 유사성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만 이 글을 어림짐작해낼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만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