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바를 ai도움받아 써봤음.
비판해줘.
카뮈는 부조리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고뇌를 정리했다. 인간은 의미를 찾는데 우주는 무관심하다. 이 둘의 충돌이 부조리다. 카뮈의 답은 반항이었다. 시지프가 바위를 굴려 올리고 또 굴러떨어지는 것을 알면서도 올라가듯, 무의미 속에서도 살아내라고 했다. "신의 형벌을 비웃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 문제가 있다. 신화 속 시지프에게는 비웃을 신이 있었다. 제우스가 부여한 형벌이니 제우스를 향해 웃으면 된다. 현실의 우리는 비웃을 대상이 없다. 우주는 아무것도 아니다. 허공에 대고 웃는 것은 공허하다. 카뮈가 남긴 가장 큰 숙제가 이것이다.
노르웨이 철학자 Peter Wessel Zapffe가 이 숙제를 풀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 자신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Zapffe는 아일랜드 엘크라는 선사시대 거대 사슴을 떠올렸다. 이 사슴의 뿔은 3.5미터까지 자랐다. 너무 커져서 숲에서 움직이기 어려워졌고 뿔을 유지할 영양을 감당하지 못해 멸종했다. 진화가 과하게 밀어붙인 결과다. 생존에 유용하던 특성이 어느 지점을 넘어가자 오히려 저주가 되었다.
Zapffe는 인간의 의식도 같다고 보았다. 자기 인식, 죽음 인식, 의미 추구는 원래 생존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를 과잉 발달시켰다. 답 없는 질문을 끝없이 생성하는 뇌를 갖게 되었다. 엘크의 뿔이 엘크를 짓누르듯, 우리의 의식이 우리를 짓누른다.
물론 이것은 엄밀한 과학적 주장이 아니다. Zapffe 자신도 과학 논문이 아닌 철학적 에세이로 이 은유를 제시했다. 진화심리학 주류는 의식을 적응적 성공으로 본다. 그러니 이 글에서 Zapffe의 "과잉 진화"는 과학적 사실로서가 아니라, 인간 조건을 비춰보는 하나의 렌즈로 받아들이면 된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Zapffe 본인은 이 진단에서 비관적 결론으로 갔다. 의식이 저주라면 인류는 번식을 멈추는 게 윤리적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 결론은 그의 전제를 과도하게 확장한 것이다. 다르게 읽을 길이 있다.
의식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진 동물로 이해하는 순간, 무언가 변한다. 괴로워하는 자신을 한 발 떨어져서 볼 수 있게 된다. "나"가 아니라 "과잉 진화한 영장류 한 마리"로 본다. 이 영장류가 연구실에서 실험 결과에 답답해한다. 이 영장류가 뉴스를 보며 분노한다. 이 영장류가 한밤중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다 진화가 너무 멀리 간 결과다. 엘크가 뿔의 무게로 넘어지듯, 우리는 의식의 무게로 비틀거린다.
이 관점에서 고뇌가 어느 정도 우스워진다. 비극이 희극이 된다. 그러자 비웃을 대상이 생긴다. 외부의 신이 아니다. 진화의 맹목적 설계 자체를 비웃고, 그 설계에 따라 움직이는 모든 것을 비웃는다.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이것이 카뮈가 원했지만 도달하지 못한 대상이다. 신화적 대상이 아니라 내 조건 자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태도가 강요된 행복이 아니라는 점이다. 카뮈는 "시지프가 행복하다고 상상해야 한다"고 했는데 좀 억지스럽다. 행복은 기질에 따라 가능하기도 불가능하기도 하다. "우습게 바라본다"는 다르다. 행복하지 않아도 가능하다. 지적 이해만으로 충분하다. 괴로움은 그대로 있다. 다만 그 괴로움을 한 발 떨어져서 본다.
이 우스움은 지적 우월감도 냉소도 아니다. 차라리 민망한 자조적 웃음에 가깝다. 인정할 것 인정하고 포기할 것 포기한 자의 옅은 미소. 자신이 바보 같은 동물이라는 걸 아는 동물이 짓는 표정이다. 타인을 영장류로 격하하는 게 아니라 나부터 영장류로 인정하는 것이다. 공격적 시선이 아니라 공유된 처지에 대한 미소다.
이 답에는 한계가 있다. 먼저 구조적 약점이 있다. 의식으로 의식을 비웃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 참조다. 의식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의식 안에 한 층을 더 쌓을 뿐일 수 있다. 또 이런 태도가 24시간 유지되지도 않는다. 평소엔 1인칭으로 살다가 부조리가 문득 찾아올 때 꺼내 쓰는 도구에 가깝다. 부조리는 본래 간헐적이니 그래도 된다고 할 수 있지만, 가까운 이의 죽음 같은 극단의 고통 앞에서 이 거리두기가 작동할지는 확신할 수 없다. 오히려 그때 작동한다면 그게 건강한 관조인지 병리적 분리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더 근본적으로 이것이 회피이거나 정신승리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니까. 문제는 그대로 있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만 바꾼 것이니까. 다만 한 가지는 다르다. 부조리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별개다. 날씨를 바꿀 수는 없어도 우산을 쓸지 비를 맞을지는 선택할 수 있다. 우산이 비를 없애지 않지만 체감은 달라진다. 설령 이 평온이 일종의 자기 기만일지라도, 이해 위에 세운 평온과 무지 위의 불안은 다르다. 완벽한 답 대신 가능한 답을 찾는 것이다.
이 답에는 또 다른 제한이 있다. 이것은 세속 합리주의자의 답이다. 신을 믿는 사람에게 부조리는 다르게 해결된다. 다른 종교 전통을 사는 사람에게는 부조리 자체가 서구적 개념일 수 있다. 신을 믿는 사람에게 부조리는 다르게 해결된다. 부조리라는 감각 자체가 초월적 의미 체계가 무너진 조건에서 주로 문제가 된다. 다른 전통을 사는 사람에게는 이 문제 설정 자체가 낯설 수 있다. 이 글이 제시하는 답은 그 조건을 공유하는 독자를 위한 것이다. 보편적 답이라고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리고 이 글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 아니다. 윤리는 별개 문제다. 관찰자 시점으로 자신을 본다고 해서 타인에 대한 책임이나 약자에 대한 연대가 자동으로 따라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이 글은 부조리라는 특정한 고통에 대한 특정한 대처법일 뿐이다.
그래서 요약하면 이렇다. 인간의 부조리 고뇌는 과잉 진화한 의식의 부산물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을 받아들이면 자신의 괴로움을 한 발 떨어져서 관찰할 수 있다. 진화의 설계와 그 설계대로 움직이는 모든 것, 자기 자신까지 포함해서 우습게 볼 수 있다. 이것이 비웃을 대상 없던 카뮈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완전한 답은 아니다. 회피일 수도 있다. 극단의 고통 앞에서는 무력할 수 있다. 특정 문화권 독자를 위한 답이기도 하다. 그래도 행복을 강요하지 않고, 비관에 빠지지 않고, 일상을 지속 가능하게 한다.
노선을 굳이 정하자면 카뮈 쪽이다. 직시하라는 것, 회피하지 말라는 것, 그래도 살아내라는 것. Zapffe의 진단은 카뮈의 대상 없는 비웃음에 대상을 제공해주는 도구로만 가져다 썼다. Zapffe가 이 도구를 내가 쓰는 방식대로 쓰지는 않았다. 그는 이 진단에서 훨씬 어두운 곳으로 갔다. 그래서 이것은 Zapffe의 답이 아니다. 카뮈의 정신으로 Zapffe의 통찰을 끌어와 본 누군가의 답이다. 확신에 찬 답은 아니지만 내가 가진 답이다.
인공지능을읽은소감이지
재밌게 읽었음 일단 나는 그에서 나온 의식으로 의식을 비웃는 방법론이 이성에 대한 냉소 그러니까 이성에 대한 시니시즘으로 보임 이것은 이성에 대한 허무주의로 빠질 가능성이 높음 그리고 그러한 방향은 카뮈가 의도했던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함
맞네요. 세상과 나 중 나를 지우는 방법이네요... 카뮈의 부조리의 개념은 인정하나, 그 해결방법은 카뮈의 노선과 분명 다른것 같습니다. 추가로,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저는 비웃음 보다는 딱하게 여기는것을 더 의도했던것도 같아요. 커멘트 감사합니다.
고뇌라는 행위를. 인류초기 생존 행위에서 생겨나 과잉 발달한 것으로 해석하고. 선사시대 뿔의 과잉 발달로 멸종한 엘크에 빗대어 표현했는데. 엘크의 뿔은 숲에서 나무에 걸려 못움직이는 것에서 왜 문제인가? 라고 문제인식 가능하지만. 인간의 발달된 고뇌가 어떤 사건이나 상황에서 문제를 발생시키는지 제시하는 부분이 추가되면. 연결이 더 잘될것 같다. 이런 내용이 없으니까 왜 인간의 고뇌가 엘크의 뿔처럼 문제라는걸까? 의문이 생기고 내용 이해 전개가 막힌다.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