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삶이란 의미라는 화음을 더듬으며 즉흥연주하는 과정이자, 그것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럴듯한 노래였다고 착각하게 되는 농담임을 알고도 사랑으로 남는 것이다. 이 글은 이러한 추상적인 아포리즘을, 삶의 특성과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즉흥연주와 어떻게 대응되는지 논하고, 우리가 전체 이야기를 사후적으로 재해석하지만 의미있는 농담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임으로써, 결과적으로 삶이라는 연주와 남는 노래를 사랑하는데까지 이르게 됨을 논증으로 보임으로써 정당화할 것이다.

2. 인생의 특징과 의미부여하는 과정

우리는 선택할 때, 자기 인생의 모든 경험을 고려해서 선택하는 것이 아닌, 그 때의 감정, 그 때 떠오른 경험, 생각을 통해 결정한다. 만약 선택할 때 총체적인 것을 고려할 수 있다면, 아침에 내 판단이 저녁 때 달라질 수 없을 것이다. 그동안 살아온 시간에 비해 반나절에 시간은 영향을 주기 매우 짧을 테니까. 생각도 의식도 마찬가지로 연속된 이야기가 아니라, 파편적 조각들의 흐름이다. 물론 큰 흐름에서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가치관과 신념에 의해서 결정하지만, 일상에서 일어나는 수없이 미시적인 결정들은 대부분 ‘지금 가장 크게 울리고 있는 것’을 통해 결정된다. 그렇기에 나의 인생은 무저건적으로 논리적이고 개연적인 서사인 게 아니라, 가끔씩은 아무런 개연성이 없이 큰 흐름이 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인생에서 단순히 연속된 서사를 통해서만 의미를 얻는 것이 아닌,
1. 그 서사에 영향받아 생긴 나의 내면으로 인해 생기는
2. 순간의 감정, 그 때 떠오른 경험, 생각, 특히 관계 속 감정, 에너지같은 것에 스스로 의미 부여함으로서 의미를 얻는다. 사람들은 흔히 의미를 거창한 것에서 찾기에 "내가 도대체 무슨 의미로 살아가는 건지 모르겠다."라고 하지만, 나는 삶의 의미란 삶의 순간마다 느끼는 감정을 소중히하며 그를 통해 나의 인생을 다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성장하는 것에 의미부여하는 것에 있다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살아온 인생에 권태를 느끼거나, 큰 고통을 받을 때 삶 이면에 본질적인 것을 찾기에, 삶의 의미를 거창한 것에서 찾으려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삶의 흐름 자체가 의미다. 이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면 에너지와 감정작용이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지부터 이해해야 한다.

에너지에 따라 의미부여가 달라지는 경우로 다음과 같은 예시를 생각해보자. 흔히 계획을 잘 짜면 실행력이 높아진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계획을 짜든 짜지 않든 에너지가 생기는 사람이 실행력이 있는 것이다. 계획을 짜지 않고 무언가를 실행한 사람은 "일단 닥치고 해!"라고 조언할 것이고, 계획을 짜고 실행한 사람은 "계획이 중요해"라고 할 것이다. 근데 계획을 짜지 않고 에너지가 안 생기는 사람은 "역시 계획이 중요하구나."라고 할 것이고, 계획을 짜고 에너지가 안 생기는 사람은 "난 다짐 중독, 계획 중독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뭔지 알겠나? 대부분의 사람들의 조언은 '알아서 됐는데' 의미부여 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마음은 내가 처한 환경, 내 유전자, 내가 신체한테 준 영향, 리듬 등과 같은 조건에 의해 에너지가 생기는거지, 의지나 간절함같은 것으로 에너지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무언가를 좋아하는 성향인 것 역시(이성적인 판단이 아니라 끌리는 성향) 마찬가지나. 그것은 그냥 내가 그쪽으로 행동하는 것에 도파민이라는 보상회로를 줬기 때문이지, 자기가 이성적으로 깊게 고민해서 나온 결과물이 아니다. 자기 뇌가 리스크를 감수하는 뇌면 "사람은 큰 꿈을 가져야 큰 사람"이 된다고 할 것이고, 안정성을 중요시하는 뇌면 "위험이 조금이라도 있는데 하는 것은 자기 인생을 망치는 행위"라고 할 것이다.

자기문제를 회피하던 사람들이 '어느순간 불현듯이' 자기를 들여다보고 싶은 욕망이 생겨서 자기 문제를 인식하고 결국 극복했다. 그 사람은 말한다.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조그만한 용기고, 나도 그 용기를 가졌기 때문에 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라고. 근데 사실은 뇌에서의 작용으로 '어느순간 불현듯이' 그런 행동을 하고 싶어졌고, 그걸 '내가 스스로 용기를 냈다'고 착각했을 뿐이다. 그 이후부터 좋은 가치관으로 능동적으로 삶을 살아간다 생각하는건,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의 성장, 뿌듯함으로 '어느순간 불현듯이 형성된' 강한 자존감이 나의 뇌구조를 바꾸고 사람을 더 성장하고자는 마음가짐을 자발적으로 창조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외부자극도 마찬가지로 에너지가 얼마나 생기느냐에 따라 내가 어떻게 의미부여하는 지도 다 다르다. 내가 바뀌지 못하면 "난 약한 사람인가봐."라고 생각하고, 바뀌면 "그 때 그 경험이 나한테 큰 자극을 주었구나."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에너지 뿐만 아니라,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으로 의미부여하는 모든게 다 마찬가지다. 내 짝사랑하던 사람이 죽었을 때 펑펑 울면 "나는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했구나"라고 생각한다. 근데 자기가 아무 감정이 안 들면, "뭐지? 난 그 사람을 좋아했는데 그렇게 좋아한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어떤 계기가 되어서 갑자기 막혔던 눈물이 터지면 "아 그렇구나! 난 그 사람을 너무 사랑해서 눈물조차 안 나온 것인데 사실 되게 슬펐던 거구나!"라고 생각한다. 막혔던 눈물조차 안 나오면 그냥 혼동스럽고 그 사람 생각을 좀 하다가 금방 현생을 살게 될 것이다. 사람이 아무리 소중했던 사람이라도 어느날 이후부터 그 사람한테 아무런 감정이 안 든다면 그 사람을 더 예전처럼 소중히 생각할 수가 없다.

생각해보자. 사람은 자기가 의미를 추구하는 것을 통해 보람을 얻는다 생각하지만, 그러한 의미있는 행위가 긍정적인 감정이 느껴질 때야 그것을 의미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사람이 무언가에 의미부여하는 가장 큰 원천은 가슴떨림, 기쁨, 숭고함, 즐거움 같은 감정이다. 국가, 가정이라는 의미가 있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는데, 내가 그것에 헌신하면서 느끼는 자존감, 기쁨, 숭고함 등에 감정이 있어서 내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감정에 따라 의미는 달라진다. 다시 국가로 예시로 들면, 국가는 지켜야할 것이 될 수도 국민을 착취해서 저항해야할 존재도 될 수 있다. 국가는 이러한 2가지가 공존하지만, 내가 애국심의 자긍심을 느끼고, 국가에 충성하는 것에 강한 자존감과 가슴떨림을 느낀다면 나는 국가를 의미에 두고 살아갈 것이지만, 내가 남들과 하나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고, 권위를 싫어하면 권위에 저항하는 것이 나의 자존감이 되고, 이 나라 국민들에게 역겨움을 느낄만한 경험을 많이하면서, 권위에 저항하는 것이 자기 의미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 두 사람 모두 자기가 의미를 부여한 것들에 어느순간부터 아무런 감정도 못느끼고 권태만 느껴지면, 그 의미를 위해 평생 열중할 수 없다. 분명히 내가 감정적으로 얻는게 있어야 삶에 대한 회의감 없이 "이것이 내 삶의 의미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 감정 없이 권태만 느껴지는 삶을 신념으로 붙잡고 있으면 항상 회의감이 함께할 것이고, 도대체 이게 무슨 의미인지 항상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사람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서 성취를 느낀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의 행복이란 감정은 성취물에 비례해서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본래 그런 ‘멋진’ 일이 벌어졌을 때나 특출난 능력을 마침내 발휘하게 됐을 때만 만족스러워 하는 것이 아니다. 강한 자극은 한 순간이고 반복되면 질린다. 계속 고강도의 쾌락을 받는 것이 불가능한 이상, 중요한 것은 한 순간의 자극이 아니라 지속적인 만족감이다.

춤을 추는 것을 예시로 들자면 우리는 춤을 완벽하게 춰낸 그 짧은 한 순간에만 재미를 느끼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춤을 추는 과정 속에서 점점 성장해나가는 뿌듯함, 완벽하게 춤을 춰낸 순간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한 설렘, 친구와 함께 무언가를 같이 경험하고 함께한다는 것에서 오는 동질감 등등을 경험한다. 오히려 춤을 완벽하게 춰낸 순간은 짧고 춤을 추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다채로움’을 느끼는 때는 길다.
삶의 의미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고 경험하면서 겪는 순간의 감정들을 소중히 하는 태도로 사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 있는 것이다. 운동을 하고, 공부를 하고, 밥을 먹는 것... 그리고 나의 인생 스토리를 조명하고 애착을 갖는 것... 거기서 의미가 있고 행복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 감사하는 것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이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반복되는 공부나 일을 견디며 살아가도 행복하고 누군가는 "내가 도대체 무슨 의미로 살아가는건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차이는 하루를 마무리했을 때에 개운함, 책 한 장을 넘기면서 스스로를 피드벡하고 깨닫는데서 오는 기쁨 등등의 작은 기쁨에는 감사하고, 자기가 삶을 개척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성장하며, 부정적인 감정들이나 고된 노동으로 오는 고통은 오히려 그것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긍정적인 감정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먼저 오해하면 안 될 것이 나는 고통이 있어야 행복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고통이 있는 삶이 더 낫다고 주장하는게 아니다. 고통이라는 것 역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예컨대 슬픔과 같은 감정은 정화의 역할도 있지만, 내가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 있고 타인의 고통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들며 자아성찰과 자기내면을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분노를 느끼며 강렬하게 감정을 표출했던 경험, 열등감으로 무언가에 열중해본 경험, 시험보기 전 불안함으로 밤잠을 설친 경험 등등은 마음 속에 더 많은 생각과 감정을 담기게 해서 오래남는 기억이 된다. 다양한 감정은 예술적 표현을 더 풍부하게 하고 예술을 통해 입체적인 감정을 더 잘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처럼, 자기 인생도 그런 다층적인 감정들이 나의 더 다양한 면을 이해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그 감정을 통한 정신적인 성숙과 새로운 경험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은 감정적인 영향을 절대적으로 크게 받긴하지만, 그것에 의미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감정을 어느정도는 통제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상처와 열등감을 가졌다고 해도
1. 그 상처를 직면하고
2. 그러한 감정들을 통해 자기 인생을 더 다층적으로 조명해보면서
3. 정신적인 성숙을 이룰려고 노력하고
4. 그 성장의 의미부여하고
5. 그러한 경험을 한 것에 감사하는 사람은
적어도 자기를 지지해줄 소수의 사람과 사회적으로 1인분은 할 수 있을 정도의 성과만 있어도, 강한 자존감을 갖고 행복할 수 있는게 불가능한게 아니다.

물론 수치심과 분노와 같은 감정을 지속적으로 받으면 내면이 매우 피폐해지는건 맞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그런 감정들로 인생을 더 입체적으로 조명하려고 노력하면 자존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지, 그런 감정을 받는게 평생 행복한 감정을 받는 것보다 낫다고 주장하는게 아니다. 피할 수 없다면은 어떻게든 그러한 삶에서 지나치는 순간들의 감정을 관찰하고 자기 인생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며 의미를 부여하고,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자는 것이다.

당연히 사람은 재밌는 것을 하고 싶은게 본능이지만, 만약 본능을 역행해야 한다면 이왕이면 최대한 행복한게 좋지 않을까? 설사 내가 하는 일이 노가다같이 괴로운 거라도 어떻게든 의미 부여를 하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해야 한다. 예를 들어 노가다같이 힘든 단순 노동을 할 때도 내가 내 삶을 책임지기 위해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힘든 일 속에서도 부정적인 감정을 통제해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성장을 이루는 내적인 수양을 한다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의미부여는 포장질이나 자기합리화가 아니라 의미를 창조해 자신에 상황을 극복하려하는 능동적인 시도인 것이다.

3. 인생은 즉흥연주와도 같다.

이런 점에서 인생은 즉흥 연주와도 같다. 연주자는 전체 곡을 계산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초기 조건, 즉 환경, 유전자 등에 의해 전체적인 흐름은 어느정도 결정되어 있다. 이는 음악으로 비유하자면 초기 멜로디와 조성으로 비유될 수 있다. 하지만 그 흐름 속에서 새 음을 어떤 것에서 결정할 지는 방금 나온 화음, 리듬, 호흡에 의해 결정된다. 이는 우리 역시 미시적인 결정은 전 생애를 고려하지 않고 지금 떠오른 감정과 생각에 의해 부여된 의미에 의해 결정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모든 실수와 불협화음은 사후에만 재해석된다. 이것이 실수든, 새로운 시도든 그것은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규정된다. 또한 규칙은 있지만, 해답은 없다. 조성, 박자, 관습은 있어도 정답은 없다. 삶도 사회적 맥락에서 조건지어지지만, 단 하나의 해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연주 중에는 전체를 들을 수 없다. 삶 속에서 주체는, 상태들의 연쇄 속에서 전체적인 플롯이 보이지 않는다. 그저 사건이 끝나고 사건을 엮어 새롭게 해석할 뿐이다.

4. 노래가 끝난 뒤에야 그럴듯한 노래였다 착각하게 된다.

사람은 그렇게 의미부여한 것을 토대로 자기 인생을 하나의 스토리로 바라보게 된다. 그로인해 사람들은 자기 인생에서 자기가 주체가 되어 스토리가 만들어진다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자기한테 주어진 스토리를 받아드릴 뿐이다. 다시 말해 스토리 안에 등장인물들은 자기 인생을 개연성 있고 의미있는 드라마로 착각하며 살아가지만, 사실 우리는 이야기를 창작한 게 아니라, 이야기가 형성되는 것을 받아들여왔을 뿐이다.

우리는 이야기가 형성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첫째로, '나'는 사회적인 맥락과 주어진 환경들과 경험들을 통해 행동하고, 이것들은 모두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환경과 경험 모두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내가 무엇을 선택해도, 어떠한 결과가 될 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가 받아들인 이야기는 진실이 아닌 '감정이 강했던 것', '기억이 남은 것'과 같이 파편화된 사건들의 다발들들을 통해 사후적으로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야기를 온전히 파악하려면 전체적인 맥락을 알아야 한다. 전체적인 맥락은 무수한 원인과 조건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되므로, 어느 단일한 인과관계만 독립적으로 떼어내서 현상(지각되거나 관찰되는, 자연 혹은 사회에서 일관되게 일어나는 일)을 파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모델이 입은 크롭티가 맘에 들어서 옷을 사서 입고 밖으로 자랑하러 나갔다 해보자. 쇼핑물은 크롭티가 다리 길고 비율 좋아보이게 하기 위해, 체형이 좋은 모델을 쓰거나 옷을 핀셋으로 고정하는 행위를 할 수 있다. 내가 옷을 보는 안목이 없으면, 나는 내 체형을 고려하지 못하고 밖에 자랑하러 나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나를 신기하다고 처다보는 것을, 옷을 잘 입어서 쳐다보는 것으로 착각할지 모른다. 이렇듯 이야기를 구성하는 사건은 단일하게 구성된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관계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전 이야기와의 관련성 속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가 받는 감정들 역시 나의 온전히 나의 자유의지만으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닌, 사회적인 맥락과 환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찌질하다'는 말에 유독 민감하다. 통념상 사람들은 이것이 나의 자유의지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남성성이 인격을 완성하고 사회적 가치를 본인의 능력으로 쟁취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를 읽어야하고, '찌질함'이 일정부분 남성적 자격을 박탈시키는 성적인 수치심에 기원하고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 이렇듯 하나의 단어에도 사회적 맥락의 이해 없이는 나한테 미치는 감정적인 영향을 이해할 수 없는데, 이데올로기나 관습은 어떠할까?

또한 우리의 심리라는 것은 사회적인 맥락 뿐만 아니라 환경의 다발이기에, 우리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나는 어떤 사람과 약속을 잡았는데 그 사람이 "늦지 않게 오세요"라 했다. 난 이게 매우 기분이 나빴지만, 왜 나빴는지 몰랐다. 지금에 와서 기분 나쁜 이유가 뭔지 깨달은 것은
1. 불신을 암시하는 것이다. 이 말은 애초에 상대방이 시간을 잘 지키지 않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약속 시간에 늦지 않는 것은 기본적인 예의인데, 이 말은 그 사람이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여겨질 수 있다.
2. 지적질을 통해 상하관계를 내포한다. 약속은 상호평등적인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믿고 존중하면서 하는 것이다. 약속을 어긴 사람은 물론 몰상식한 사람이지만, 약속은 서로 믿어주는 맥락에서 하는 것이지 "너 이거 꼭 지켜라"고 상대방이 자신과의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할 존재로 치부해서 강요하는게 아니다. 이런 말은 군대에서 하급자한테 상급자가 명령할 때나 쓰는 것이며 그 자체로 상하관계를 암시한다.

나는 이것을 설명할 수 없지만 묘하게 기분 나쁘고 찜찜했지만, 그것을 파악하고 "아하! 맞아, 그 말 정말 맞는 거 같아!"란 생각이 들었다. 모두들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 심리가 무엇인지 누군가가 얘기해줬을 때, "음, 잘 모르겠네."란 반응을 한 적도, "아하!"란 반응을 한 적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이 "아하!"한 것도 완전한게 아니다. 생각해보니 논리가 막혀 찍 소리도 못한 내가 한심하고 무력한 거 같아서 화가난 거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이 드니, 이것도 맞는 거 같았다. 결국 심리란 것도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만 파악이 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심리도 완벽하게 알지 못하는데 이야기를 얼마나 완벽하게 알 수 있을까?

5. 그렇기에 이 모든 것은 농담이지만, 결국 사랑으로 남는다.

먼저 농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목사님) 우리가 길에서 1억을 주웠어요. 이 때 하나님은 우리한테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죠?
아이들)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머는 삶을

이해의 대상 이전에
판단의 대상 이전에
책임의 대상 이전에
-> 함께 놀 수 있는 장(field)로 회수한다.

논리로는 날 것의 심리를 허용할 수 없다. 진지한 어투로 "나는 길거리에 떨어진 1억을 가질 것이다"라고 말하면 그는 비난받을 것이다. 날 것의 심리는 항상 ‘미성숙’, ‘위선’, ‘비겁함’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지하게 논리로 자기의 '날 것의 심리'를 허용해달라하면 안 된다.

그러나 유머는 엉터리 논리로 '날 것의 심리'를 같이 공감하고 함께 놀자고 제안한다. 엉터리 논리는 이건 '하나의 놀이'라고 하면서 상대한테 책임을 지우지 않는다. 그 순간, 상대도 방어 안 해도 되고, 죄책감도 잠시 내려놓으며 다음과 같은 생각과 함께 동질감을 주며 함께하는 것이다. 즉, 유머는 “이 판단이 옳다”, “이 감정은 정당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 “야, 우리 이런 상태잖아. 그렇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함께 웃으면서 “그래, 우린 인간이지 뭐”로 끝난다.

다시말해 유머는 세계를 ‘부드럽게’ 만든다. 유머는 의미에 반항하거나 체제를 정복하는 것이 아닌 의미를 잠시 ‘장난감처럼’ 다루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도덕이 틀렸다는 건 아니다. 근데 지금은 같이 갖고 놀자”는 것이다. 그리고 유머에서는 이러한 의미가 실제로 맞는지, 틀린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러한 농담의 특성이 어떻게 삶하고 연결되는 것일까? 나는 친구한테 어떠한 조언을 듣고, "사람한테는 관성이 있어. 뉴턴 선생님도 그랬거든. 반박하면 넌 지구평평론자야(지구 평평론자는 뉴턴부터 우리가 아는 과학적 지식이 모두 사기라고 한다)"라고 한 적이 있다. 근데 내가 생각해보니 이 드립은 만약 실제로 지구가 평평하다는것이 밝혀지면 쓰지 못하는 드립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당시에 나는 친구와 웃고 떠들었다. 그렇다면 이 드립은 나중에 진실이 아니란 것이 밝혀져도 그것이 의미없는 걸까?

아니다. 웃음은 서로가 공유하고 있는 세계관이라는 조건하에 작동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유머는 진리 위에서 작동하지 않고, 공유된 의미 속에서 작동한다. 다시 말해 농담은 그것이 진리가 맞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고 공유된 의미 속에서 즐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웃음이 엉터리 궤변이라도, 우리는 의미를 구태여 캐내지 않는다. 유머에는 그런 규칙이 함축되어 있기에, 사람들한테는 유머에 괜히 논리적으로 반박하면 분위기를 망친다는 정서가 공유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사가 개연성이 있든 없든 중요한게 아닐 지도 모른다. 그 무엇을 의미로 삼든지 진실이 어떠한 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설사 내가 진실을 파내는 것이 의미라고 생각해도, 실제로는 내가 진실을 알아서 의미가 되는게 아니라, 그 과정 속에서 즐거움이 있기에 의미가 되는 것이다. 우리한테 중요한 것은 의미가 실제로 있는지보다 그것이 의미있다고 느끼는 감각이기 때문이다.

농담

1. 진실이 아닌 공유된 맥락에서 작동한다
2. 논리가 아닌 공감된 상태에서 터진다
3. 완전한 판단보다 함께 놀 수 있는 장(field)을 만든다


1. 객관적 의미가 아닌 공유된 해석 속에 산다.
2. 진실보다 체감된 의미가 중요하다
3. 완전한 판단 없이도 함께 살아간다

자 여기까지 생각이 다달랐으면 더 나아가보자. 의미란 서사에 부여한 감정작용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감정을 중심으로 서사를 재구성하는 것은 알겠지만, 특정 행동의 감정이 느껴진다는 것이 개연성이 있는가? 예를 들어보자. 자기 아기는 소중한가? 사람들은 당연하다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아기를 보면서 모성애/부성애도 안 느껴지고, 자손을 남기고 싶은 욕망도 없고, 아기를 길러야한다는 양심의 소리도 없고, 아기를 보면서 훈훈하거나 귀엽다는 모든 종류의 긍정적인 감정이 없다면 아기가 소중할 수 있을까? 이는 다시 말해 아기가 돌멩이가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기가 돌멩이와 다른 감정작용이 느껴져야할 필연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어디에도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에 개연성은 다 느낌이 주는 것이고 그 느낌이란 것이 특정행위에 그렇게 느껴져야한다는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 모든 것에는 사실 의미가 없다는 말에 참된 의미다.

그렇다면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져야 하는가? 아니다. 객관적 의미가 없다는 것과,
주관적 의미 생성 능력이 없다는 것은 다르다. 나는 그 주어진 감정을 받으며 그것이 나의 의미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될 뿐이다. 본질적인 의미는 없지만 난 의미가 있다고 착각하고 나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그 어떤 가치도 없는 인생의 모든 것을 감정작용을 통해 의미를 부여하고, 그로 만들어진 서사를 자기 이야기라 착각하며 자부심을 느끼지만, 우리는 공유된 의미 속에서 소통하며 살아가는 것, 이것은 어쩌면 거대한 농담일 지도 모른다.

나는 신한테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모든 것이 농담이다"면서 의미를 캐내는 행위를 오히려 피곤하고 우습게 만들 것이라 생각한다. 오해는 풀리지 않았고, 진실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서로 더 파고들지 않기로 합의하고 웃을 뿐이다. 삶의 의미는 농담의 의미와 마찬가지로 진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웃기기 때문에 의미있다고 착각하는 과정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결국 신은 말한다. "다 농담이다. 근데 재밌었잖아." 어쩌면 삶이란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을 상대로 한 의미없고 정교한 농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담이라고 무게가 가볍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우리가 설사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돌멩이를 사랑하는 것이라도, 돌멩이하고 수없이 소중한 경험이 쌓이면, 돌멩이는 우리 애와 같이 소중해진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인생의 의미가 없어도, 자기 삶에 사랑하면서 강인한 자존감을 새운 사람은 권태에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이것은 의미가 없지만, 의미가 부여되는 과정이고, 나는 니체의 초인을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그것을 니체 특유의 아포리즘으로 정리한 것이 내가 처음에 썼던 문장이고, 그것으로 이 글의 마지막을 장식하고자 한다.

"삶이란 의미라는 화음을 더듬으며 즉흥연주하는 과정이자, 그것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럴듯한 노래였다고 착각하게 되는 농담임을 알고도 사랑으로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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