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시대에 따라 그 의미를 바꾼다. 영어의 answer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 단어는 고대 영어 andswaru에서 유래했으며, 본래는 고발이나 맹세에 대해 책임을 진다는, 법적 책임을 수반한 무거운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책임지다' 라는 의미로도 쓰이긴 하지만 단순히 질문에 응답하는 기능적 의미로 훨씬 많이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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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l 또한 마찬가지다. 본래 법정에서 판결에 불복해 상급 법원에 호소하는 절박한 행위를 뜻했던 이 단어는, 오늘날에는 단순한 ‘매력’이나 ‘호감의 표현’으로 의미가 옅어졌다. 절박한 생존의 언어가 가벼운 취향의 언어로 변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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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언어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 의미의 개선이나, nice(무지한 → 친절한), villain(농부 → 악당)처럼 권력과 시각에 따라 의미가 뒤집히는 현상 자체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언어는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단순한 변형을 넘어, 그 안에 담긴 현실의 무게를 희석시키거나 왜곡할 때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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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을 날카롭게 포착한 인물이 바로 George Carlin이다. 그는 공연 ‘Soft Language’에서 전쟁 트라우마를 지칭하는 용어의 변화를 비판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직설적인 ‘Shell Shock(포탄 쇼크)’라는 표현이, 오늘날에는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추상적이고 임상적인 용어로 대체되면서, 참전용사들이 겪는 고통의 실체가 언어 속에서 희석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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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칼린의 통찰에 덧붙여서 이렇게 생각한다. 오늘날 ‘PTSD’라는 단어는 사소한 불편함을 과장하는 표현으로 빈번하게 사용된다. “OO 때문에 PTSD 오겠다”라는 식의 가벼운 언어 사용 속에서, 극단적인 생존 경험에서 비롯된 고통과 일상의 불쾌감이 동일한 단어로 묶인다. 단어의 사용 빈도가 증가할수록, 그 단어가 지니던 고유한 강도는 평균값으로 희석된다. 그 결과, 정작 진지하게 다루어져야 할 고통은 오히려 가볍게 소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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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 사회의 ‘꼰대’라는 단어 역시 이와 유사한 경로를 걷고 있다고 본다. 원래 이 단어는 권위주의, 소통의 부재, 경험의 절대화, 서열 중심주의를 지닌 사고방식에 대한 명확한 비판이었다. 이는 생물학적 나이와 무관하게 적용되는 개념이었으며, 특정 세대를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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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 ‘꼰대’라는 용어는 점차 변형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를 ‘대쪽 같고 원칙 있는 어른’이라는 의미로 재해석하며, 스스로를 ‘나는 꼰대다’라고 자부하는 현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비판의 대상이었던 개념은, 점차 자기 정당화의 언어로 재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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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결과는 분명하다. ‘꼰대’라는 단어가 희석될수록, 실제로 권위주의적 사고를 지닌 사람들은 비난을 회피할 수 있게 된다. “나 정도면 원칙 있는 꼰대지”라는 식의 자기 합리화가 가능해지면서, 본래 비판의 대상이었던 행위는 오히려 정당성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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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SD’가 농담이 된 사회에서 트라우마는 희화화되고, ‘꼰대’가 자부심이 된 사회에서 권위주의는 정당화된다. 단어가 가벼워질수록 현실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교묘하게 은폐된다. 결국 언어의 오염은 사고의 오염으로 이어지며, 사회를 비판해야 할 언어가 오히려 그 구조를 유지하는 도구로 전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