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이 글이 왜 쓰였는지부터 밝히고 싶습니다.

이 글에는 정답도, 전문성도, 누군가를 설득할 만한 권위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단순합니다.

이 기록은 본질적으로 저 자신의 만족과 저 나름의 행복을 이해해 보기 위한 사적인 고민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단 한 사람이라도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저와 같은 고민을 마주하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글은 충분히 존재할 이유를 갖는다고 믿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저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회에 발을 들였습니다.

인문계 고등학교 대신 실업계고로 진학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나름 최선을 다해 공부했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성적을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낮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최상위라고 하기에는 모자란 정도였거든요.


그 당시 저는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취업 시장까지

이어질 경쟁을 끝까지 버텨낼 자신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그때는 단순히 “공부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

경쟁 자체에 대한 피로와 두려움이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저는 지금도 경쟁 게임이나, PVP 컨텐츠 조차 선호하지 않거든요.


그렇게 제 꿈은 자연스럽게

치열한 경쟁에서 벗어나 비교적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무원이나 공기업 사원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저는

“경쟁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곧 행복일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 노력으로, 혹은 운이 좋게도 저는 고등학교 졸업 전에 괜찮은 공단에 취직할 수 있었습니다.

공단에서의 생활은 편했습니다. 제가 원하던 대로 경쟁은 없었고, 선배들도, 동료들도 선하고 좋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내 선택이 맞았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습니다. 공단 생활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후배가 생기고, 일이 조금 늘기는 했지만 특별히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본가를 떠나 타 지역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기에 자취방을 옮길 시기가 찾아왔습니다.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새 자취방도 금방 구했고, 이사를 준비하는 일 역시 순조로웠습니다.

하지만 이사를 앞둔 어느 날, 저는 비로소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발에 채이는 쓰레기들,

쌓여 있는 설거지거리와 빨래,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물건들,

더러워진 화장실과 냄새가 밴 이불,

그리고 믿기 어려울 만큼 불어난 체중과 푸석해진 피부까지.


그래요. 저는 행복이라는 착각과 안온이라는 마약 속에서 분명히 망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배달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였을까,

게임에 지나치게 몰두하며 살았기 때문이었을까?


그렇게 시작된 고민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되었습니다.


이 집이, 과연 행복한 사람의 집일까?


저는 스스로를 행복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아니, 분명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제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병원을 찾아가야 하는 건 아닐까?”

같은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곱씹어 보아도

답은 하나뿐이었습니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웠습니다.


고통스러웠습니다.


만약 지금의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도대체 누가 행복한 걸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애초에 행복이라는 개념은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 걸까?


수많은 질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그것들을 온전히 마주할

시간과 여유는 부족했습니다.


하루는 여전히 한정되어 있었고,

사회인으로서의 책임은

개인적인 고민보다

언제나 우선이었으니까요.


다행히도, 그 고민의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저를 둘러싼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입니다.

입영 통지를 받았거든요.


여러 신체적 사유로

저는 사회복무요원으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아주 운이 좋게도, 근무지의 환경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저에게는

생각할 시간과,

고민할 여유와,

그리고 일정한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가 되어서야

저는 비로소

저만의 행복을 고민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행복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답할 준비를


조금씩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 불경과 부처


제가 가장 선호하는 고민 해결 방식은

레퍼런스를 찾는 일입니다.


이 오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저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을 리 없다고 믿었습니다.


실제로 저는 이 방법을

회사 생활에서도 종종 활용해 왔습니다.


그래서 행복을 찾기 위해 제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역사상 가장 행복했던 인간을 찾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도 그때 떠올린 인물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요.

부처였습니다.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의 고통 속에서도,

뼈만 남을 정도의 굶주림 속에서도

그는 평온을 잃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 길로

부처와 불교의 가르침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제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르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달랐습니다.


너무도 익숙한 “욕심을 버려라”라는 말들은

제 안에서 점차 ‘공(空)’이라는 글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집착에서 벗어나

고통에서 해방되고,

공을 깨달아

마침내 불이 된다는 길.


저는 그 흐름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

그것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제 안의 의문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스스로를 망치던 그 안온한 시간 동안

이미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욕심내지 않았고,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부처의 가르침이 틀렸던 걸까요?

아니면, 제가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걸까요?

저는 그렇게

더 큰 의문만을 남긴 채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으로요.


- 성경과 예수


먼저 밝히자면, 저는 성경을 믿지 않습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 속 기적이나 표적을 사실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저에게 신앙은 없으며,

성경 또한 교양과 흥미의 목적으로

구약 일부를 읽어본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럼에도 제가 다시 성경을 펼치게 된 이유는

오직 예수라는 인간의 존재 때문이었습니다.


부처의 가르침이

제게 충분한 답이 되지 못했기에,

또 다른 성인의 삶과 사유를

참고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속 예수의 모습은

제 예상과는 크게 달랐습니다.


제 기억 속 예수는

모두를 사랑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며,

폭력을 부정하고

분노와는 거리가 먼

온화한 존재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성경 속 예수는

성경을 제 입맛대로 해석하는 이들에게 분노하고,

논쟁하며,

잘못된 일에는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말할 줄 아는 인간이었습니다.


예수는 막연히 성경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이었고,


그 뜻에 맞게 성경을 재해석하고,

다시 쓰는 사람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 행보 속에서

제가 발견한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사랑.

너에 대한 사랑,

만인에 대한 사랑,

하나님에 대한 사람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사랑.


그 순간,

하나의 명제가

머릿속을 스치듯 떠올랐습니다.


불경을 읽으며 찾고 있던 작은 실마리가

성경을 통해 비로소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집착과 욕망을 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나를 

이 시간을 살아가는 나를 

사랑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현재를, 사랑하라.”



- 철학과 니체


그렇게 불경과 성경을 읽고 난 뒤

제게 남은 가르침을 정리하자면 이러했습니다.

과거를 후회하지 말 것. 미래를 욕심내지 말 것. 그리고 현재를 사랑할 것.


그러나 여전히 무언가가 부족했습니다.

과거를 후회하지 않을 수는 있었습니다.

미래를 욕심내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를 사랑하는 방법만큼은 알 수 없었습니다.


결국 제게는

또 하나의 레퍼런스가 필요했습니다.


그날 이후, 저는 “현재를 사랑하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가르침이 아니라

철학이 필요한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여정 끝에서

제 마음을 가장 강하게 울린 인물은

니체였습니다.


“신은 죽었다”는 선언으로만 알고 있던 그 철학자는


제 예상보다 오히려 예수를 닮아 있었습니다.

오래된 가치를 전복하고,

한 손에는 망치를, 다른 한 손에는 정을 쥔 채

낡은 관념들을 부수는 인간.


스스로의 가치를 창조하고,

욕망을 긍정하며,

안온함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사람.


제게 니체는

바로 그런 존재였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제 눈에, 너무나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 초인은 제 머릿속 낡은 행복에 대한 정의들을 전복시키고

행복을 저 스스로가 새롭게 정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니체를 통해 스스로 행복을 정의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정확히는, 행복을 정의할 필요가 없음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그들의 말에서 알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과거를 후회하지 않고,

과거로부터 배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미래를 욕심내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제

현재를 사랑할 줄 압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제

다음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된 것 같습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저에게 행복은,

평안과 안온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저는 경쟁에서 도망쳤고, 치열함을 회피했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행복은 그것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요.


저에게 행복은,

공(空)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욕망과 욕심을 버려보았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행복은 그것만으로도 완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요.


저에게 행복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를 위해 나를 사랑했고, 너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행복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요.


저에게 행복은,

지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지금 이 순간, 현재 그 자체가 행복임을 압니다.


행복을 정의하려는 행위 자체가 어쩌면 행복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행복은 거창한 개념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숨을 쉬는 것,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

마음에 드는 옷을 입는 것,

따뜻한 집에서 잠드는 것,


그리고

한 발짝, 한 발짝

스스로 만들어낸 문을 열며

미래로 나아가는 것임을 압니다.


오늘의 내가

어제보다 조금 나아지는 것이 행복이고,

내일의 내가

오늘보다 조금 더 나아질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임을 압니다.


저는 더 이상


과거를 후회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욕심내지 않습니다.


과거를 단단한 계단으로 삼아

미래를 향해 걸어가며,

그런 현실을

기꺼이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합니다.



- 변명의 글

필자입니다. 우선, 글을 읽으신 분들께 사과를 드리는게 도리일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글은 GPT의 도움을 받았죠. 물론, 내용에서 수정된 부분은 없습니다.

그저 가독성과 전체적인 톤을 조정해 주었죠.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한 글을 읽게 해 드려 사과를 드립니다.

그래도 한 가지 자랑스러운 점은, 이 변명의 글만큼은 GPT에게 조금의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점이네요


그럼에도, 저는 이 글을 누군가가 읽었으면 해서 글을 썼습니다.

글 내용을 인용하자면, 스스로 만든 문 중 하나를 여는 과정이겠네요.

일종의 자기만족이자, 행복을 위한 행위입니다. 어울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튼, 이 글에서는 편의상 위대한 성인들과 철학자의 말을 부분만 인용하고, 멋대로 요약했습니다. 이 점에서 불편함을 느끼셨을 수 도 있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서 제가 느낀 감정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들의 가르침으로부터, 많은 것을 느꼈고 그 것들은 그대로 저만의 가치가 되어주었으니까요.


동시에, 논리적인 비약이 꽤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원하는 결론을 위해 끼워맞추기라는 생각이 드실 수 있기도 하고요.

또 중반부터 너무 문학 같은 서술이 나왔다고 생각도 합니다.

다만 이건, 어느 정도의 의도가 들어있다고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소설을 좋아합니다. 아마 그 영향으로 몰입해서 쓰던 글에 그런 여파가 나타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필자가 의도하지 않은, 작가의 의도라고 할 수있겠네요.


그래서, 이 글을 굳이 본문 뒤에 붙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가 겁이 많거든요.

제가 오래 사유한 결과가, 이 짧은 몇 문단의 글입니다.

이 글이 누구에게 읽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부정당하고, 비판을 들을까 무섭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이 글은, 제가 가진 사상의 기반이자, 밑바탕이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추하지만,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고있습니다.

우습게도, 이 글을 쓰면서 마음이 안정되는 중입니다.

동시에, 더 변명할 거리를 찾는 중입니다만, 마땅히 생각이 나지는 않네요. 좋은 일입니다.


사실, 아직 이 생각들은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것들이에요.

그래도, 만약 어떤 계기로, 제 생각이 180도 변하더라도, 제가 그토록 치열하게 고민한 시간들이 의미가 없어지진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이 글을 읽어주신, 당신이 있고 이 글을 쓴 제가 있으니까요. 다시 한번 글을 읽어주신 당신께 죄송하고, 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