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철갤에 글을 쓰게 된 철갤러입니다.

내용은 대체로 투박할 수 있으며 오류가 많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체나 내용에 대한 지적 및 반박은 언제건 환영합니다. 

글은 아래의 본문을 통해 진행하며, 그 이후 본문에서 보충할 만한 내용을 그 아래에서 주석을 통해 설명코자 합니다. 

---본문---

보통 부정이라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문장 앞에 늘 쓰는 '아니' 부터, '안', '못', '아니하다', '못하다' 등등이 일상어 속에 녹아있지 않던가? 우린 이 단어들을 아주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특히나, 좀 더 논리학에 조예가 있으신 분들은 보통의 논리학에서 사용하는 부정의 성질도 알고 있을 것이다. 부정은 참과 거짓 중 하나인 진리 값을 반대로 바꾸는 역할이며, 그 정의에 의해서 배중률이나 이중부정의 성질이 나타나게 된다. 

이런 논리의 부정은 현실에서도 반영되어서 모 정치인의 발언처럼 '~이거나 ~가 아니다'와 같은 말은 항상 참된 말이라고 판단하거나, '~가 아닌 것이 아니다', '~이지 않지 않지 않아요~'와 같은 다중 부정 또한 원래의 말이나 반대의 말로만 인식하는 아주 단순한 구조로 인식된다. 이처럼, 부정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을 양분할 수 있는 아주 강력한 체계를 지닌 것처럼 보인다. 이는 틀린 것은 아닐 수 있다. 허나 지금 이런 이분법적 구조를 위한 부정은 부정의 남용일 수 있다. 이 체계가 얼마나 강력한지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정이란 무엇인지 이 고전논리에서 벗어나 다시 한 번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고전논리학에서는 부정이란 진리치를 바꾸는 '연산'으로 정의하였다. 실생활에서의 부정 또한 그런 진리치의 전환으로 작용한다면, 실생활 속에도 진리치가 녹아있어야 한다. 진리가 생활에 녹아있다니 참으로 낭만적이고 학문적으로 그럴듯해 보인다. 그런데, 늘 그렇듯 이런 주장에 대한 반례로써 제 3지대의 존재가 사용된다. 그렇다고 하기에도 애매하고 아니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그 사이의 존재는 사실에 대한 진리를 희석시킨다.

반례가 좀 유치한가? 실례를 들어서 이야기를 해보자. 짜장면과 짬뽕과 같은 메뉴를 선택하는 와중에 짜장면을 먹는 것이 아니라면 짬뽕을 먹는 것일 수 있다. 그런데, 누군가는 짬짜면을 먹는다던지 누구는 볶음밥을 먹는 것도 짜장면을 먹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는 짬뽕, 볶음밥 둘 다 짜장의 부정으로 넣으면 해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짬짜면은? 짜장을 먹는 것인가? 짬뽕을 먹는 것인가? 아니면, 짬짜면을 먹는 것인가?*

이것이 부정의 함정이다. 정확히 말하면, 이분법으로써의 부정은 함정이다. 왜냐하면, 볶음밥과 같이 짬뽕과 짜장면 둘에 모두 속하지 않는 것과 짬짜면과 같이 둘을 포함하지만 둘에 모두 속한다고 이야기 하기에는 애매한 것들처럼 모든 명제를 유한한 원리로 긍정이나 부정에 대응할 순 없다. 그리고, 부정은 정확하게 무엇이나 어떤 것들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 또한 확인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부정의 역할에 대해서 다시 숙고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현실을 기술할 때, 어떤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음을 더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하곤 한다. 그리고, 충분히 그 내용이 현실을 잘 기술하였다고 생각되면 그 내용을 보고 참되다고 한다. 보통 우리가 내뱉는 내용이 현실을 잘못 기술하려고 의도하는 것이 아닌 이상 참되다 여겨지는 내용을 생각한다. 그런데, 이 내용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왜곡되는 경우가 생긴다. 또 내용이 전달되었더라도 그 의미가 왜곡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 내용이나 의미를 바로잡기 위해서, 상대방이 내놓은 해석이나 내용에 대해서 우리는 '아니 그게 아니고...' 로 말문을 땐다. 그리고, 이는 상대방이 내놓은 해석이 자신이 구성한 내용이나 의미와 다름을 의미하며, 다름은 곧 자신의 입장에서는 그릇됨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떻게 그릇되다는 것이지? 단순히 내용과 의미가 다르기만 하면 그릇되는 것이다. 이 때에는 현실을 잘 기술하였는지와는 다르게 말하고자 한 내용과 의미가 잘 전달되었는지에 집중하여 옳고 그름을 이야기 한 것이다. 

그러니까 부정이란 상대에게 의미가 잘 전달되도록 바로 잡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다. 상대에게 해당의 의미의 수정을 요구하는 것일 뿐이며, 세상을 양분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부정이란 본래 내용 전달에서 사용되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 부정은 오로지 '상대의 반응'에 대해서만 적용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의도적으로 부정문을 통해서 세상을 기술코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부정이란 보통 소통하는 상대에 대해서 의미 수정을 요구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상대가 사라지고 혼자 독백하는 과정에서는 어떨까? 부정의 용도가 위와 같이 한정되어 있다면, 부정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 오로지 평서문으로 현실을 기술할 수 있다. 이것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이런 내용이 만약에 다른 사람들이나 상대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들이라면, 상대의 응답이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상대에게 정확한 의미를 전달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 상대의 응답을 미리 예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전달코자하는 현실을 기술한 내용을 명제라고하자. 그런데, 다른 이들이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면, 그 오해를 포함하는 내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를 반명제라고 하자. 그리고, 이 반명제에 대해서 부정을 통하여 명제의 의미를 확고히 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자. 이렇게 하면, 본래의 부정의 용도를 생각해 볼 때, 예상되는 '상대의 반응'에 대해서 적용할 수 있으므로 적절하다. 

따라서, 상대와 문답하는 상황이 아닌 글과 같은 경우, 부정은 오로지 본 명제와 다른 의미를 가진 반명제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에만 사용해야 한다. 어떤 개념에 대해 정의하거나 명제를 형성하는 데에 부정을 사용하는 것은 또 다시 세계를 너무나 간단하게 양분하려는 시도다. 그러면, 부정으로 정의된 것처럼 보이는 단어들은 어떻게 기술해야 할까? 그런 경우에 대해서는 오직 다음과 같이 기술해야 한다. 

'부정의 개념을 지니고 있는 정의들에 대해서는 먼저 선언한 뒤에 그 의미에 대해서 설명하고, 본래에 대한 부정을 통해서 의미를 한정하여야 한다. 그 외에는 부정 개념을 정의할 수 없다.'

굉장히 강한 제약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부정의 개념을 지닌 단어를 정의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현실을 기술하는 방향에서 그 의미를 포착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방법을 통해 구성한 본 개념에 대하여 부정적인 개념은 부정에 속하는 개념으로 수립되고 그 둘과도 다른 개념을 정의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그러면, 이 글의 구성에서 의문이 들 수 있다. 

"글은 부정에 대해서 오로지 '상대의 반응'에 대해서만 적용하는 것이 옳다 하였는데, '오로지'는 부정을 이미 함의하고 있는 개념 아닌가?"

굉장히 타당한 지적이다. 왜냐하면, '오로지'는 보통 '같은 것 없이 유일하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같지 않음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 설명하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유일하다'는 자체적으로 부정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설명되곤 한다. 그런데, 유일함은 때때로 이렇게 설명될 수도 있다. 

'어떤 것을 만족하는 둘이 있다면, 그 둘은 같다'

이는 통상적인 배타적 유일이 아니라 포괄적인 유일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는 잘 정의되었다. 이런식으로 용어를 정의해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유일 말고도 유이함과 다양함 또한 정의해 볼 수 있다. 

---주석---

*: 인공지능과의 검토 중, 반대와 모순의 개념이 혼용되었음을 지적받았습니다. 즉, '짜장면을 먹는다'의 부정은 '짜장면을 먹는 것이 아니다'이지 '짬뽕을 먹는다', '볶음밥을 먹는다' 그리고 '짬짜면을 먹는다'와 같은 반대관계에 놓여있는 명제와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허나, 여기서 가장 중점적으로 이야기 하고자 했던 부분은 짬짜면의 예이며, 이 경우에 대해서는 '짜장면을 먹는다'와 '짜장면을 먹는 것이 아니다'사이의 그 무언가로 규정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강조코자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준이나 근거를 들어야 함을 말한 것입니다.

또, 추가로 반박받은 내용이나 보충할 만한 내용이 생긴다면, 이하에 추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