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정확히는, 좋아하게 된 책이라고 부르는게 맞겠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죠. 사실, 이 책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처음 접했을 떄는…상당히 불편하고, 불쾌했습니다. 아주 전형적인 악인을, 마치 옆집 아저씨나 친구의 아버지를 이야기하는 것 처럼 아주 평범하게 묘사했거든요. 처음엔, 그 점이 저는 매우 불만이었지만 그럼에도, 워낙 유명한 책이었기에 그래, 읽어나보자라는 마음으로 책을 다시 폈습니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말이 처음 등장한 이 책은, 아주 평범한 남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의 재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네, 아주 평범한 남자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아버지로, 또 누군가에겐 능력좋은 부하였지요. 그는 명백히 평범한, 한 명의 공무원이었습니다. 물론, 세계 2차대전에서 수많은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전범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말입니다. 동시에, 본인이 저지른 일에 대해 그저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질 나쁜 악인 처럼 보였습니다.
그런 이중성을 보고 한나 아렌트는, 이 책에서 악의 평범성을 주장합니다. 악이란 사람 내면의 악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도 무사유,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멈추는 순간 탄생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책에 적힌 주장들을 보고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이 글대로 악한 행동이 인간 내면의 악에서 비롯되는게 아니라 무사유의 상태에서 찾아오는 것이라면 악인은 어디에 있는가? 또 선인은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 말입니다. 단순한 흥미로 시작된 이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책을 덮은 뒤에도 자꾸만 저를 따라왔습니다. 그 시간들은 결국 저를 한 가지 더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끌었습니다.
나는, 어떤 인간이고 싶은가.
저는 기본적으로, 스스로를 선한 사람이라 믿어왔습니다. 비록, 공감능력은 약간 모자란 편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타인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고,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공공의 이익을 조금 더 생각하고, 도덕과 예의를 충실히 따르려고하는 보편적으로 선한 축의 사람이라고 믿었습니다. 만약 악이 특별히 악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면, 선 역시 특별히 선한 사람만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라는 의문은 제 그런 믿음을 천천히, 갉아먹기 시작 했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한 번 저라는 인간을 돌아보았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과연 제가 해왔던 선한 행동은, 저라는 인간이 선했기 때문에 한 것이었을까요? 잘 생각해보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냥 그게 옳은거니까, 그렇게 배웠으니까, 다들 그렇게 하니까…저는 생각해서 선을 택한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선을 택한 건 이었습니다. 아이히만이 무사유의 결과로, 악을 행했듯이 저는 무사유의 결과로 선을 행했을 뿐이었습니다.
혼란스러웠습니다. 또 두려웠습니다. 내가 선한 사람이라고 믿어왔던 사실이 꺠어지는 것이 두렵기도 했지만, 더 정확히는 한 가지를 알아 버렸기 떄문입니다. 어쩌면 내가, 악을 행하기 전 단계에 와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 말입니다.
당연히 누군가 저에게 악을 행하라고 한다면, 거부 할 것입니다. 다만, 만약 주변의 모두가 그 악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고있다면? 혹은, 제 직장 같은 아주 중요한걸 빌미로 잡고있다면? 혹은 그것이 악인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사소하게 포장된다면? 저는 확신 할 수 없었습니다. 언젠가 아무런 의심 없이 악을 행하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저는, 선인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정말 선인이란것은 존재하지 않는걸까요? 전 그 두려움 속에서, 희망을 찾고자 했습니다. 선인이라는 희망을요. 만약, 선과 악이 무사유 속에서 행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이라면 진짜 선인과 악인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그 고민 속에서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알면서 선을 택하는 사람이 선인이고, 알면서 악을 택하는 사람이 악인이라면, 어쩌면 선과 악은 행위 그 자체보다 그 행위를 얼마나 사유했는가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닐까요.
실제로 그런 사람이 존재하는가와는 별개로 그 생각에 닿았을 때, 두려움 속에서도 작은 희망 하나를 쥘 수 있었습니다. 나는 지금 악을 행하기 전에 서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언제든 선인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으니까요. 지금의 사유를 멈추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제 이전 글을 봐오신 분이라면, 마지막 말에 당연하게도 의문을 표하실지도 모릅니다. 전 분명 지난 글에서, 사유에 잠식되지 않고, 사유를 멈추어도 괜찮다고 이야기 했었거든요. 그래놓고 다시 사유를 멈추면 안 된다니, 모순입니다. 저 역시도 이 모순에 제가 찾은 답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쪽이던, 틀렸을테니까요.
하지만, 더 이상 고민을 해도 지금의 생각 이상으로는 사고가 뻗어나가지 못했습니다. 능력의 부족일수도, 시간의 부족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순을 그냥 둘 수는 없었습니다. 재미있게도, 이 질문에 대한 저의 답은 사유를 멈추면서 찾게 되었습니다. 잠시 이 고민을 멈추고,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업무를 보려는 찰나에, 떠오른 답이었습니다. 사유를 멈추어도 괜찮습니다. 쉬어가도 괜찮아요. 하지만 사유가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저는 그 때만큼은 생각을 멈추고 싶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유에 짓눌리는 압박 속에서 살아가는 것도, 사유를 멈추고 선악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채로 살아가는 것도 답이 아니었습니다. 선인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런 단순한 태도가 아니라, 사유가 필요한 순간을 알아차리는, 통찰이었습니다. 내 선택이 타인에게 닿는 순간, 익숙함에 기대어 생각을 흘려보내려는 순간. 바로 그때, 멈추고 돌아보는 것입니다. 악을 행하지 않기 위해, 선을 행하기 위해 사유 해야하는 순간을 알아차리는 통찰이 있어야 비로소 선인에 한 발자국 더 다가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사유가 필요한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도, 그 사유 속에서 선을 찾아 내는 것도, 인간의 욕망과 욕심을 넘어 선을 선택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결국 저는 인간이기에, 너무나 쉽게 악에 흔들리고, 무사유가 주는 안온함에 스며들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인간이기에 선해지고자 합니다. 비록 때로는 악을 행하고, 사유 없이 선택하기도 하겠지만, 그럼에도 조금씩 선인에 가까워지고자 합니다.
아직 저는 부족하기에 선인이 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악인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고민과 사유 없는 삶 속에서 남이 말하는 선과 악에 휩쓸려 살아가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어제보다 오늘 더 선인에 가까워지고자합니다.
그래요. 그런 ‘인간’이고자 합니다.
선악은 사유의 깊이에 달려 있다. 진짜 선인은 "알면서 선을 택하는 사람", 진짜 악인은 "알면서 악을 택하는 사람"이라는 것. 즉, 선과 악은 행위 자체보다 선악에 대해 얼마나 깊이 사유했는가에 의해 갈린다.